[Review] 한국의 페미니즘은 어떻게 흘러왔는가, 모던걸 백년사

작은 행동이 모여 큰 물결은 일어난다.
글 입력 2021.08.0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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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부러 두 번 세 번 말하지 않는 것,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취하던 입장이었다.

 

여자와 남자가 평등하다는 것,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이 보장되고 어떤 일에서든 젠더로 인한 불평등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이론으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페미니즘이 현실에서 옳다고 이해받거나 누군가 먼저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나서주지 않음을 오랫동안 절감하였다.


입이 아프도록 여성의 귀가 중 밤길 안전이 취약하고 성범죄의 주요한 대상임을 말해도 사건이 일어나면 밤늦게 다닌 피해 여성의 책임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여전히 참 많다. 출산과 육아는 부부 공동의 책임이라 해도 여전히 모성을 이유로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하는 것이며 정서 발달에는 절대적으로 엄마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녀 양육은 부부 모두에게 부모로서 동일한 책임과 의무가 있다. 여기서는 하나의 성별로 치우치는 돌봄 노동에 대해 말한다.)

 

여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은 살아가면서 도덕적으로 이행해야 할 숙명이 되고 이는 많은 여성들이 자의와 타의에 의해 윤리적으로 속박되게 한다.


어머니의 된장찌개는 맛있지만 편리하다. 고생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되는 한편 어머니의 고생은 계속된다. 여동생이 걱정되고 여자친구는 예쁘지만 정해진 여성상 안에서 존재해야 한다. 딸도 마찬가지. 언젠가 수행하게 될지도 모를 미래의 모든 저 역할에 걱정과 분노가 앞선다.

 

백 년 전의 모던걸이 그랬고 현재의 이화영이 그렇듯이.




연극 소개.



1920년 경성에 사는 경희는 어렸을 적 오빠의 지지로 이화학당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잡지에 여성 해방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하고 이혼을 한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선 사회의 비난을 한 몸에 받는 '모던걸'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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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서울에 살고 있는 화영은 성적에 맞춰 간 대학을 다니며, 주변의 성화로 적성에도 맞지 않는 교직이수를 하는 중인 '착한 딸'이다. 주변에서 말하는 "예쁘고 학벌 좋고 직업도 받쳐줄 테니까, 걱정 없네~"라는 말이 어쩐지 불편한 화영은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동아리에 연극 <인형의 집>에 참여한다.


세간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경희는 조선의 여성들을 깨닫게 만들기 위해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을 번역하기로 마음먹는다. <인형의 집>을 읽으며 화영은 점차 용기를 내기 시작하지만 또 다른 벽에 부딪히게 된다.


1920년의 모던걸과 2020년의 페미니스트가 각각 자신들의 꿈과 사회의 요구, 비난 사이에서 갈등하며 싸워가고 그들의 삶이 교차된다.




모던걸 경희.



무릎과 발목 사이에서 떨어지는 치마를 입고 머리는 서양식 보브컷 혹은 펌으로 말아올린 경성의 여성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상징일 수 있겠으나 단번에 줄줄 읊을 정도로 입고 꾸민 것이 먼저 생각나는 이유는, 그들을 바라보는 여성 시점이 부재하고 남성 편향적인 매체에 의한 영향이 클 것이다. 치마가 더 이상 땅에 끌리지 않게 되고 머리를 짧게 자를 수 있게 된 것은 첫 등장에서는 여성 해방이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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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원하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같은 패션 아이템을 장만했고 이는 당시의 패션을 대표하게 되었다. 변화가 싫었던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모던걸들의 외양을 비난했고 페미니스트 모던걸의 이미지는 점차 흐려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들이 외치고자 했던 여성 해방은 백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화려한 패션만을 남긴채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현재의 이화영.



화영은 20대 대학생이다. 그 주변에는 모순적인 남성 페미니스트들과 힘을 주는 선배 나진, 착한 딸을 원하는 엄마가 있다.

 

극은 화영과 모던걸 경희를 교차하여 보여주는데 특히 화영의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들은 극이라기에는 너무도 사실적이다. 현실의 것을 허구나 과장 없이, 혹은 지나친 것은 조금 덜어내어 20대 여성들이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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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동아리에서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을 올리겠다던 남자 선배와 그 무리는 성추행과 성차별적 발언을 일상적으로 행한다. 화영은 합당한 처벌을 위해 애쓰지만 그가 받은 상처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정학이라는 징계가 그들에게 내려진다.

 

일련의 감정 변화를 통해 화영은 다시 일어서길 결심하고 인형의 집을 통해 경희와 조우하게 된다.




언어의 답습.


 

그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다수의 커뮤니티발 페미니스트 비하 언어들과 어제도 페미니스트들을 향한 수두룩한 악의적 댓글들은 백년 전 남성들의 시각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표현은 과거보다 더 과격하고 자극적이며, 무지나 비난을 별로 숨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차별점이라 할 수 있겠다. 여성과 남성을 구별짓는 제도와, 생물학적 성별로 결정짓는 허구적 성 역할을 믿고 현실이 그렇게 지속되길 바라는 데서 이렇다 할 발전 없이 시간이 흘러버렸다.


물론 많은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이 노력했고, 사회적 분위기는 젠더 갈등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는 쪽으로 변화했다. 이 갈등이 피곤하고 성별 불평등이 당연하다는 의식이 재생산 되어 과거로 다시 돌아가버리는 백래시가 오지 않기만을 바란다.

 

비관적으로 보자면 말만 많아졌을 뿐 소득 없는 젠더 갈등 속에서 무지한 기계적 중립이 늘어나고 있다. 긍정적으로는 젠더 갈등이 계속해서 수면위로 드러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의식하고 고려해보아야 할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최근에도 대기업과 공공기관의 어이없는 사과와 무리한 페미니스트 '논란'들이 헤드라인을 수차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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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논란이 될 만한 일이었는지 생각해보며 또 한번 현재와 미래의 수많은 여성들에게 빚지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페미니즘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가 여성 해방이라는 데에 이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여러 차례의 공방과 소모전이 잇따르겠지만, 씁쓸한 소득이라도 그 빈도가 늘어나길 바란다. 작은 행동이 모여 큰 물결이 일어나니까.

 

 

++

여성 창작단체 ‘하이카라’

 

하이카라는 2016년 연출가 서승연의 프로젝트 그룹으로 시작한 여성 예술인 창작 집단입니다. 하이카라는 2016년 5월 뮤지컬 <모던걸 백년사> 공연 후, 2018년 1월부터 창작 단체로 정식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단체명 ‘하이카라’는 개화기 당시 서양식 공교육을 받기 시작한 사람들을 칭하는 은어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하이카라 여성’은 배운 여학생, 신여성을 의미했고 소위 외국 물을 먹은 ‘모던걸’을 비꼬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저 하이카라 여성을 누가 데려가누’라는 제목의 글이 나올 정도로 ‘하이카라 여성’이라는 단어에는 배운 여자들, 생각하는 여자들에 대한 경멸과 무시, 혐오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이카라’는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지워지고 잊혀진 서사를 다시 불러오며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기존의 서사를 다시 그려냅니다.

 

 

[차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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