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여러분도 위인입니다 - 사라진 소녀들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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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고등학교 친구가 문제집 표지마다 써놨던 문구를 아직도 기억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생각해보면, 저 말이 속담치고는 무척 이루기 어려운 목표인 듯하다. 몇백 년, 몇천 년에 걸쳐 나의 이름이 전해지려면, 인류에게 불을 전해주었다던 프로메테우스급의 활약이 있어야 하니까.
한국사 교과서를 펴면 불후의 업적을 남기고 장렬히 산화한 수많은 영웅이 있다. 필자는 특히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이 자랑스럽다.
가산(家産)을 정리하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6형제, 폭탄 투척으로 일제의 고위 간부를 사살한 윤봉길, 서슬 퍼런 일제의 총칼에도 불구하고 평화적인 만세 시위를 전개한 유관순 등. 이 페이지에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의 위인들이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우리는 결과적으로 일제가 패망하여 우리나라가 독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분들이 과연 당시에 이 모든 것을 예견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대단한 이유다.
암울한 현실 속,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려 했다는 그 용기가 너무 존경스럽다. 필자가 그때 사람이었다면 아마 섣불리 나서지 않았을뿐더러, 설령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도 체포되어 고문 조금만 받으면 아는 정보를 술술 불고 적의 앞잡이 노릇을 했을 것이다.
필자가 애국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극한의 상황에 놓였을 때 정신력을 끝까지 붙잡고 있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지척에 죽음이라는 진창이 도사리고 있으면서 거기에 빠질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무언가를 하기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팜 제노프의 소설 <사라진 소녀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로 파견되어 특수 작전을 벌였던 여성 특수요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의 플롯 자체는 평범하다고 느꼈다. 적지에 보낸 영국 특수요원들이 작전에 실패하고 모조리 독일 측에게 잡혀 기밀 정보를 실토하고 사살당하는 일이 반복되자, 특수작전국에서는 엘레노어 트리그라는 비서에게 의견을 물었고, 엘레노어는 평소 생각했던 대로 여성을 선발하여 훈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건의한다.
‘그러면 의견을 낸 네가 한번 맡아보라’는 명령을 받고 여성 요원을 양성하는 모든 권한을 쥐게 된 엘레노어는 철저한 조사를 바탕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마리를 포함한 열여섯 명의 여성들을 선발하고, 처음에는 집에 돌아가고 싶고 훈련 성적도 그저 그랬던 마리가 전우애와 사명감이 생기며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오늘날이면 부모님이 설치한 온실 속에서 쑥쑥 자라고 있을 화초처럼 자랐을 열일곱, 열여덟밖에 안 된 소녀들은, 어린 나이에 제2차 세계 대전의 무자비한 살상이 자행되던 현장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 폭격으로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았거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서 겨우 탈출했다.
일찍이 전쟁의 상흔이 마음속에 굳게 자리한 어린 소녀에게 남은 것은 가해자를 향한 복수심뿐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다 누리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에게는 적국에 피해를 남기는 것이야말로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제 발로 특수작전국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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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의 지배하에 놓여 있지도 않고, 분단국가이지만 매일 전쟁의 위협을 느끼고 살아가지는 않을 정도로 평화로운 편이다.
그렇다면 소설 <사라진 소녀들>은 80년 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픽션이 첨가된, 그저 옛날이야기로만 바라봐야 할까? 필자는 요즘에 어떻게 이 이야기가 적용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던 중, 한 사건을 떠올렸다.
약 두 달 전에 이천의 한 이커머스(e-commerce) 기업 물류센터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거대한 규모의 물류센터를 전소시키고 불은 6일 만에 겨우 잡혔다. 하지만 화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김동식 소방령이 목숨을 잃었다. 몇 년 전에는 독도에서 발생한 환자를 실은 헬기가 그대로 추락해 탑승했던 소방대원분들이 순직한 사고도 있었다.
소방관을 예시로 들었지만, 우리 주변에는 코로나 19에 감염된 격리 시설에서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의료인, 경찰, 군인, 순간의 방심이 바로 사고로 이어지는 건설 현장 노동자 등,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험지에서 묵묵히 일하며 사회에 일조하는 분들이 계신다. 범위를 넓혀 보면 우리나라의 ‘특수 작전 요원’이 꽤 많지 않을까?
소설 속 소녀들이 편안한 삶을 버리고 위험한 길을 택하여 최선을 다했듯,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누군가가 사명감을 띠고 구슬땀을 흘리며 위태로이 일하고 있다. 혹시라도 우연히 들어와서 필자의 글을 읽고 계실 우리의 ‘위인’에게 존경과 감사를 담뿍 담아 인사를 드리고 싶다.
[박대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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