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생각, 끄적임 - 아브젝시옹, 추 그리고 미술 - 장지아, 한효석

글 입력 2014.09.04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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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생각, 끄적임

Art, think, Write

by. 하마


아브젝시옹

 그리고

미술


 장지아, 한효석




왜 이야기를 꺼내나?


어느날 내가 배설해내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일이 있지는 않은가? 요즘은 나의 사소한 것마저도 떨어지는 순간에 궁금증이 생긴다. 나의 피는 혹은 배설물들은 어찌하여 나에게서 멀어지고자 하는것일까? 그것은 온전히 나 하나로만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라고 물어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일 뿐이다. 바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인간은 그것이 더러워서 배설한다기 보다 살기위해 배설한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즉, 생물학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이루어 지기도 한다. 우리가 날숨을 쉬며 내뱉는 이산화탄소와 땀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땀이라는 배출물 그리고 우리의 배설기관을 통해 배설되는 대변과 소변은 우리 몸안의 세균이나 찌꺼기를 버리는 행동이 된다. 또, 입으로 구토를 하여 몸안의 유해한 것을 배출하기도 하며 콧물, 침을 통한 세균 배출도 이루어져야 한다. 정신적인 문제에서는 우리에게 불쾌함과 불안, 공포 그리고 우울함, 권태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버리려고 노력하며 생물학적 문제에 비해서 조금 더 의식적으로 작용되지만 그것은 무의식에서 일어나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가 버리는 것에서는 사회적인 부정, 부패를 배격하려는 것도 있을 것이며 종교적 문제에서는 이단 혹은 사탄을 쫓아내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버리는 것으로 부터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느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것을 왜 배출해내는지 모르게 된다. 또, 우리가 배설해낸것을 돌아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그것은 멀어지는 것 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것은 ‘추’한 것이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고 버려지는 것들을 우리는 연민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배설한것을 자랑스러워하는가?와 같은 문제 즉,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버려진 것인 폐기에 대한 생각을 계속해서 하다보니 미술에서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고 싶었다. 철학적 접근은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 불가리아 태생)에 의해서 abject, abjection 이론으로 이루어졌다. 이 이론자체는 지극히 서구적인 이론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우리에게도 돌아보게 할 담론이 많다고 생각되었다. 아브젝시옹이론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그것에 대한 접근을 미술로서 표현한 작가들이 누가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때마침 아주 핫한 작가가 먼저 눈에 띄었다. 바로 2014년도 올해의 작가상 후보에 오른 ‘장지아’작가였다. 뒤이어 떠오르는 작가들은 한효석작가였다. 그들의 작업에 대해서는 자세히 뒤에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현대미술에서 이 두 작가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 다르다고 생각되어진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그들은 도태되어지는 것에 대한 연민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더 나아가서 본다면 그들의 작업의 결론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아브젝트이론은 무엇인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접근은 [공포의 권력] (Pouvoirs de l'horreur, Essai sur l'abjection, Editions du Seuil, 1980. / 국역본. 서민원 옮김, 동문선, 2001)에서 이야기 되는데 아브젝시옹에 대한 시론을 부제로 달고있는 이 책은 그 자체로 아브젝시옹을 핵심이론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의 개념은 버려진 것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일으키게 하였고 그것을 연민하거나 고민하는 사람들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미술에서도 그와 같은 일은 이루어지게 된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 이론을 쉽게 이야기해보자면 우리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쉬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 세계에서는 우리에게 위협할 것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에게 괴물과 같은 이상한 것이 찾아오게 된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의 ‘욕망’을 요청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근원적인 욕망이다. 우리에게 그것이 바라는 욕망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양가적인 태도속에 들어가게 된다. 곧 이어 우리 자신은 그것을 배격하고 배출하며 없애려고 한다. 하지만 그 괴물과 같은 것에게 묘한 끌림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런 묘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면 애초에 우리는 무관심으로 그것을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렇다 결국 우리는 버리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면서도 되돌아보고자 한다. 그것은 버리는 것에 대한 우리의 최소한의 연민이 되는 것일까? 크리스테바는 우리가 괴물을 배격하고 배출하려고 하는 인간 그 자신의 힘을 ‘절대적인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 ‘절대적인 어떤 것’에 대한 의견 중 가장 탁월한 것은 바로 ‘사회적인 금기의 상징체계’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우리의 사회적인 금기라는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정한 금기를 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기들은 우리에게 토악질을 하게 하는 힘을 제공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그렇게 분출하고 분비한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자부심의 사실로 인해 우리는 다시 괴물에게 압도되는 것이다. 그렇게 압도되어 끌려간 세계는 혐오스럽지만 매혹적인 세계이다. 때문에 다시 우리는 양가적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는 주체로 자리할 수 없다고 크리스테바는 이야기 한다. 앞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한 ‘괴물’ 그 괴물에 대해서 크리스테바는 그것을 ‘아브젝트’라고 칭한다. 오브젝트라고 칭해지는 ‘대상’과 다르게 아브젝트를 나와 대립하는 성질로 바라본다. 그것에 대해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가 대상이 대상의 지위를 박탈당해서 ‘추락해 버린’ 것 이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자면 아브젝트 그 자체는 추락한 것이며 그것이 다시 우리의 지위를 되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크리스테바는 적어도 그것때문에 인간이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다고도 보았다.


추와 아브젝트의 차이는?


    그렇다면 단순한 ‘추’ 혹은 ‘그로테스크’와 아브젝트에 대한 관심으로서 출발하는 예술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에게서 떨어져나온 혹은 인간의 사회속에서 도태되어 금기로 낙인찍힌 것들에 대한 접근의 차이라고 생각된다. 미술사적으로 ‘미’에 대한 접근은 유럽의 유미주의에서 잘 나타난다. 하지만 미의 방향성은 전통을 타파하고자 하는 이들에 의해서 변화되어진다. 그들을 ‘아방가르드’예술가라고 칭하기도 한다. 전위적 예술을 보여주었던 그들은 20세기 미술계에 혁신을 불어넣고 새 담론을 제기시킨다. 그들의 방식은 반미학적이었는데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추’이 발전하게 되었다. 반미학적 이미지로서의 추는 앵포르맬에서의 비정형(form less), 아트브뤼트(Art Brut)로 나타나기도 하였으며, 몇몇 초현실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미지는 완벽한 의미의 ‘추’는 아니었고 각자의 예술사조를 위한 선택적인 전략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현재에서도 ‘추’ 즉,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그리는 작가들이 많지만 그것은 자신의 내러티브를 위한 전략으로 생각된다. 사실은 ‘추’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은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이론을 근거로 이루어지는게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에게 떨어져나갔기에 우리가 추하게 보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연민하며 돌아보는 것이라고 설명한 이론에 부합하듯이 현대미술에서는 버려진것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는 작가들이 많다. 이 ‘버려진 것’이라는 소재에서 오늘 이야기할 작가들은 그것을 전혀 아름답게 비추려는 의도를 보여주지 않는 작가들이다. 하지만 ‘아브젝트’로 일컬어지는 소재나 이미지들을 보여주면서도 전혀 시각적으로 위배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것을 추하고 낯설게(Uncanny)하게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알고 있는(언캐니 이론은 말하는 억압된 것의 귀환으로 설명되는데 이는 낯설음을 발생시키며 두렵게 만들기도 한다고 한다. 억압된 것이라는 것은 즉,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따라서 아브젝시옹 이론은 언캐니 이론과 쌍을 이루기도 한다.)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장지아 : 떨어져나와 도태된 아브젝트에 대한 관심


    아까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장지아’작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고 말했다. 장지아 작가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자면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을 ‘몸’을 통해서 다루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업은 퍼포먼스, 영상 그리고 설치와 사진 등으로 구현되어진다. 그녀가 다루는 ‘몸’이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서 감각체계가 되는 몸이다. 여성의 몸을 관음의 수동적 대상이 아닌 욕망의 주체가 되도록 표현해내는 작가의 작업을 페미니즘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물론 여성의 몸을 욕망의 주체로 보여주는 것은 페미니즘 예술적인 특징으로 볼 가능성이 없지않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정말로 관심을 두는 부분은 그것이 아니라는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장지아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에서 촉발되는 것을 ‘몸’이라는 소재로 미술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선 그녀의 작품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보아야 할 것 같다. 


    먼저 2006년에는 장지아 작가의 작품인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 - 둘째, 모든 상황을 즐겨라]가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화면속에 등장하지 않는 어떤 남성이 작가 본인에게 침을 뱉고 달걀을 던지고 머리채를 잡아 뜯는 등 공격행위를 가하는 영상이 적나라하게 공개된다. 작가의 얼굴은 공격에 의해서 퉁퉁 부어오르게 된다. 본래는 2000년도에 제작되었다고 하는 이 작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일들을 영상에서 보여지는 ‘신체적 폭력’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외부의 남성은 사회 혹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에게 가해지는 공격들은 모두 ‘작가’들이 겪고 있는 참상을 말하는 것이고, 그것을 당하고만 있는 작가 본인은 그런 참상속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는 작가들을 대변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 작업속에서 이를 견디고 버텨내는 장지아 작가 본인처럼 그것을 각오하고 작업하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많은 평론가들은 말한다. 작가가 되기 위해 겪는 수모와 참상들을 버텨낼 수 있는 내성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이 작품은 답답하고 힘들며 어려운 미술계의 상황을 담담하게 영상속에 담아낸 작품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따지고 보면 그것이 비단 미술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적지 않은 공감을 얻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우리가 사회속에서 하나의 존재(미술계라는 사회에서는 작가가 될 것이다.)로 자리 잡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수모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작업이 아니었을까? 그렇다. 이 작업은 어떻게 보면 금기라고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렇게 당했지만 또 그것을 버텼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고, 때문에 우리가 초라하고 찌질해보이는 순간을 감추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브젝시옹 이론에서 이야기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한심하고 답답해보이는 순간들을 우리는 버리려고 하는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묘하게 작가의 작품을 보면서 공감을 얻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우리가 이미 겪은 일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지하고 다시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금기로 가려져버린 것을 꺼내서 공개하는 장지아의 작업은 이렇게 묘하게 그것을 되돌아보게하는 매력을 가지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한다. 이 작품을 한 번 감상해보자. 우리안에서 들끓는 감정이 생기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 둘째, 모든 상황을 즐겨라!

    싱글채널 비디오 /4분 20초 /2000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작업이 미술계에서의 작가에 대한 이야기 즉, 본인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후에는 그녀의 작업이 세계적으로 또 인식적인 측면으로 확대되었다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바로 ‘서서 오줌 누는 여자’와 ‘앉아 있는 소녀’,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일 것이다. 먼저 2006년에 발표된 ‘서서 오줌 누는 여자’의 경우에는 영상과 사진으로 이루어진 작업인데 제목 그대로 여성이 서서 오줌을 누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과 영상이다. 그것은 미술관에 그대로 걸리게 되었다. 여성은 서서 오줌을 누면 안된다?라는 금기는 누가 정한 것일까? 왜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서서오줌을 배설할 수 없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 같은 작품은 역시나 우리 사회의 관습적 규칙과 정면으로 맞서서 바라보게 한다. 작품 자체로서 시각적 아름다움을 가지지는 않는 이 작업은 우리에게 더러운 것이라고 인식되는 오줌을 소재로 했지만 역시나 묘한 매력을 지닌다. 그녀는 오줌이라는 소재를 이용한 ‘P-tree’라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오줌을 정화하는 구조를 가진 이 나무는 오줌을 물로 바꾸고 그것이 다시 생명을 만드는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우리가 아브젝트라고 인지하는 존재에 대해서 연민하고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이 그녀의 작업이다. 



    Standing up peeing 사진 /120cmX 150cm /2006




    P-tree /300cmX300cmX270cm /2007



    앉아있는 어린 소녀 사진 /150x170cm /2009


    ‘앉아 있는 소녀’와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와 같은 2009년의 작품들은 ‘금기’에 대한 그녀의 내러티브가 더 강력해진다. 작가는 이제 ‘고문’과 같은 요소를 작업에 대입한다. 홍경한 평론가는 이에 대해 ‘자학과 고문, 고통과 쾌락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층적 감각을 현실의 조건에 비유한 이 작품들 속 남녀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 누구일 수도 있다. 고문할 때 사용하던 장어나 나무는 외부 환경으로부터 더해지는 억압이기도 하다.’라고 이야기한다. 이외에도 그녀는 피를 이용한 작업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 [아름다운 도구들 시리즈]와 같이 고문도구를 장식성이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재해석해서 보여주는 작업도 이루어진다. [아름다운 도구들 시리즈 1]과 같은 경우에는 외과용 수술도구를 고문도구로 소개한다. 이번 2014년에는 [아름다운 도구들 시리즈3]이 올해의 작가상 전시에서 공개되어진다. 작품에 대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명을 보도록 하자.




    장지아_아름다운 도구들 3 (브레이킹 휠) / 혼합재료 / 가변설치 / 2014



    “「아름다운 도구들 3」(2014)은 작가가 5-6년 전부터 구상해온 것으로 흰 천이 드리워진 성소가 전시장에 구현된다. 성소 안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1950-60년대 수레용 바퀴 12개가 있다. 바퀴는 한때 고문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했었다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선택된 오브제이다. 그 바퀴에는 깃털이 달려있으며 큐빅이 박힌, 뚫린 안장 위에 퍼포머들이 앉아 고통스럽게 바퀴를 돌리며 노동요를 부른다. 바퀴를 돌려야하는 노동이 수반되는 한편 깃털이 음부를 스칠 때의 쾌락이 동반된다. 노동요의 곡은 서양 중세에서 불완전하고 퇴폐적이라 성가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던 프리지안 음계이며, 가사는 우리나라에서 오랜 세월 구전된 충북 음성의 디딜방아타령으로, 상반될 것 같지만 음란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는 두 요소를 작가는 효과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성소 밖 그림자를 통해 은밀함이 드리워지며 성스러운 분위기와 세속적 행위가 묘하게 결합되면서 미술관은 위반의 영역이 된다. 고통과 쾌락은 우리의 실존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금기시되었던 욕망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현실에서 미적 언어로 탄생하고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본능을 들여다보게 한다. 작품화하기 어려운 주제를 작가는 일관성 있고 집요하게 추구함으로써 미술의 경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고 현대미술이 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설명에서 나와있듯이 작품에 선택된 소재들은 금기의 총집합이 아닐까 싶다. 장지아 작가의 작업은 그 시각적 이미지가 꺼려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아브젝트로서 근본적으로 우리가 배출해내거나 도태시킨것들이기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주춤거린다. 하지만 곧 그것은 우리를 유혹하듯이 매혹적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가 감추려고 한 것들 그렇게 만들어버린 것들이 우리를 다시 끌어들이는 것이다. 장지아 작가는 인터뷰에서 작품속에 타액과 오줌 피와 같은 체액이 등장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서 이렇게 답한다.


    “컨셉 하에 선택되는 대상이 있는 반면에 당시에 왜 그것이 나에게 끌렸는지 모른 채 직관적으로 선택하는 대상도 있다. 그런 대상들은 오랜 시간이 걸려 나에게 명백한 이유로 스스로를 증명한다.그것이 압젝트적 성격의 신체에서 흘러나온 액체 부산물들이다. 처음엔 눈물과 침을 이후엔 오줌과 피를 작업의 소재로 삼았다. 이러한 소재들은 버려지고 기피되는 대상들이지만 작업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갖게 되는 새로운 가치와 의미에 매력을 느낀다.”


    그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버려지고 기피되는 대상인 소재들을 작가는 ‘미술’이라는 영역으로 끌고들어온다. 이 과정에서 그것은 당연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새 삶을 살아가게 되는 아브젝트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버리고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것이 작가가 말하는 새로운 가치와 의미는 아닐까? 물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건 그것을 돌아보게 하는 매력은 그것 자체가 우리가 감추려고 하는 금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에서 풍기는 것이다.


    한효석 : 우리가 외면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본 모습에 대한 관심


    피, 오줌, 침과 같은 체액이나 사회적으로 정해진 금기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작업을 장지아 작가가 보여주었다면, 한효석 작가의 작업은 사뭇 다르다. 대체적으로 그의 작업에 대한 이미지는 ‘파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전시장에 대한 많은 평은 도살장같다는 의견이다. 왜 도살장인가? 그것은 그가 유달리 ‘돼지’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대체적으로 돼지 혹은 유화로 그린 고깃덩이 얼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돼지와 관련된 그의 작업은 초기에 반인반수의 생명체로 나타난다. 그것은 돼지의 몸통에 작가 본인 혹은 다른이의 두상을 결합한 듯이 보이는 형상으로 기괴하게 보여진다. 이 반인반수 형상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가학적으로 도살되어 생명을 빼앗기는 돼지의 모습이나 사회라는 구조 속에서 국가나 조직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희생되는 현시대인"은 동일한 존재이다. "돼지가...느끼는 비논리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비도덕적인 현실이나 지금 우리 자신이 겪는 현실이나 다를 바가 없다.”




    한효석 / The uncanny / 합성수지와 인모에 유채


    이는 이 반인반수의 생명체가 실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존재와 같다는 화두를 던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작가는 이 돼지의 형상을 최근 작업에서 변화시켰다. 바로 인간의 두상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진짜 돼지처럼 보인다. 실물의 크기를 그대로 표현한데다가 돼지의 특유의 요소들을 모두 재현해낸다. 작가는 전북 정읍 양돈 농장에서 1년 반을 체류하면서 돼지들과 함께 지냈다고 한다. 이 돼지와의 생활에서 김미루 작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작가 모두 자본주의 구조에서 착취되는 돼지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지만 이를 표현하는 이미지는 차이를 부른다. 한효석은 양돈농가에서 돼지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착취’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새끼를 계속해서 낳다가 결국 죽어야만 정해진 펜스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는 돼지들에게 연민을 느낀 작가는 그 대상을 인간으로 확장한다. 그것은 양돈농가의 사정을 알아가면서 더 확장된 것 같다. 그는 양돈농가의 어려움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따라서 그 위의 기업에 착취당하는 양돈농가와 다시 그 착취를 위해 착취당하는 돼지들의 구조를 작가는 연민하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미술로 보여주기 위해 그는 죽어서 자유의 몸이 된 돼지들을 소재로 삼았다. 그의 작업 방식은 인터뷰 내용에서 잘 나와있다. 


    “ 무게 350∼400㎏의 돼지사체들을 혼자 옮기며 돼지들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사체가 썩기전에 본을 떠야했다. 여름엔 부패가 빨랐다. 작업은 겨울에 이어졌다. 액체실리콘과 레진 유화물감은 죽은 돼지를 생생하게 다시 살려냈다.”




    한효석 / 자본론의 예언 / 가변설치 / 2014



    이런 작업을 통해서 작가의 돼지들은 섬뜩할 정도로 생생한 형상으로 전시장에 걸리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압도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는 우리가 기피하려고 하는 대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는 그 돼지에게서 우리 자신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한효석 작가는 예술의 영역에 대해서 고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항상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서 그것을 끌어오고자 노력한다. 그 결과가 바로 돼지와 고깃덩이 얼굴 회화일 것이다. 계속해서 말하지만 작가의 작품은 파격적이고 기괴하기까지 하여 그것을 쉽게 눈에 담기가 어렵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의 시각의 범주안에 침입한다. 우리는 묘하게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작가는 회화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고깃덩어리 얼굴을 그린 회화작품을 통해 동물로서의 본질을 망각한 채 온갖 욕망에 사로 잡혀 사는 우리의 참 모습을 보여 주고자 했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델의 얼굴을 조우하는 우리는 한 순간 빛이 번쩍이며 지금까지 망각에 젖어 살아 온 자신들의 오만함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한효석 / 감추어져 있어야 했는데 드러나고만 어떤 것들에 대하여 19 / 캔버스에 유채 / 218×148cm / 2011~3


    고깃덩이는 굽는다는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핏덩이에 가깝다. 시뻘건 색의 고깃덩이들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먹는것이다. 그것은 다시 우리의 몸에서 적절한 영양분만을 빨아먹히고 배출된다. 즉, 고깃덩이는 우리가 배출해내는 요소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것은 작가의 작업은 인간의 얼굴을 한 꺼풀 벗겨냄으로써 인간의 본모습을 여과없이 공개하는 것이다. 그것은 작품의 시기가 지나면서 의미가 발전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동양인의 얼굴을 그리던 작가가 서구적 얼굴을 함께 그리며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이라는 의미에는 많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동성애자와 도태된 인종들과 같은… 그들은 일반인들에게 기피되는 대상이고 사회에서 폐기된 아브젝트들이 아닐까? 우리가 사회속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즉, 우리가 편하게 살기 위해서 그들을 버려낸 것이다.)이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작업은 비쥬얼 자체가 파격적이고 기괴하며 ‘추’에 가깝다. 이것에 대해 많은 이들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추’개념과 연관시켜 이야기한다. 미라고 하는 전통적인 가치에 대해서 엘리트주의적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그와 완전한 대립쌍은 아니지만 엄연히 대립한다고 볼 수 있는 ‘추’의 개념을 사회적 약자의 편으로 내세우면서 그것이 사회적 약자를 지켜주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따라서 이는 사회적인 불평등(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라는말로서 가장 잘드러나지 않을까?)을 해소하게 하려하는 도덕적이고 인본주의적인 임무를 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주체의 입장이 아닌 바깥의 타자로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기피하게 되는 아브젝트로도 보이는 ‘추’의 이미지로 작가는 아이러니하게 인간 그 자체의 인본주의적 회복을 바라는 것이다. 작가의 작업의 근본적인 이미지는 변하지 않지만 시간의 흐름에따라 그 의미는 다층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며 우리에게 다양한 담론을 제기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맺음


    장지아의 오줌, 피, 침과 같은 체액과 한효석의 돼지와 고깃덩이와 같은 ‘아브젝트’로 연상되는 소재들은 미술이라는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결국 다시 인간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각박한 현대사회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운것만 보고싶을지도 모른다. 허나 과연 그것이 옳은 일인지는 의문이다. 우리는 각박하게 살고있기 때문에 그것을 잊고자 하는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것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의 위치는 어디로 향하게 되는가? 이런 질문들을 다시 우리 마음에 던져줄 수 있는 것은 바로 미술이라고 생각된다. 장지아 작가의 경우 그것을 여성이 남성사회에 적응하면서 생기는 여러가지 문제들 혹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서 배설된 요소들로서 보여주고자 하였고, 한효석 작가는 우리가 어느샌가 무감각하게 받아들여버리는 돼지의 사육과 같은 문제 그리고 고깃덩이로서 보여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두 작가의 이런 관심들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아브젝트이론과 같이 어려운 철학적 설명은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미술로 표현된 이 작업들은 그런 어렵고 복잡한 설명을 요하기 보다는 관람자의 시각그리고 지각에 호소하기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보는순간 그것을 본능적으로 기피하겠지만 이것만은 생각해야한다. ‘왜’, ‘무엇때문에’ 작가가 저렇게 표현했을지에 대한 질문이다. 그 질문을 자기 내적으로 던지고 대답을 해본다면 더 나아가 아브젝트, 아브젝시옹 이론과 같은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완전한 이해가 아닌 관심을 가진다면 현재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볼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브젝트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이 글도 역시 ‘인간’이라는 주제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아브젝트와 추에 대한 관심은 우리 자신, 인간 본연에 대한 되돌아보기가 아닐까.



    사진출처 : www.neolook.com 그리고 www.akive.org

    참고 블로그, 웹주소 : http://jiro78.egloos.com/m/1529871,

    참고 서적 :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하재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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