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비주류의 가난한 지망생들이 보낸 일 년의 시간 - 렌트

글 입력 2024.01.14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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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우연이었다. 하필 작년에 친구의 추천을 받아 뮤지컬 <렌트>를 만든 조나단 라슨의 전기 영화 <틱, 틱... 붐!>을 본 것도, 그로 인해 <렌트>에 관심이 생겨 보고 싶은 마음을 간직하다가 하필 최근에 작품을 보게 된 것도, 며칠 전 평소처럼 집을 청소하다가 오랫동안 책장에 꽂아놓기만 한 김보라 작가의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온 것도 우연이었다.

 

<렌트>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가난한 청춘, 오페라 <라 보엠>, 사랑의 힘, 동성애, 에이즈, 젊은 예술가…. 파편적으로 떠오르는 여러 키워드에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그러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읽게 된 것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영화감독 지망생 열다섯 명의 솔직한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을 읽고 뿔뿔이 흩어졌던 <렌트>를 둘러싼 키워드를 엮어줄 단어를 발견했다. <렌트>는 ‘과정’의 뮤지컬이었다.

 


[2023뮤지컬렌트] 포스터.jpg

 

 

 

평범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


 

<렌트>는 푸치니의 유명한 오페라 <라 보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극으로, 조나단 라슨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 소개를 처음 보았을 땐 <라 보엠>과 <틱, 틱... 붐!>을 모두 본 사람으로서 어떤 극이 탄생할지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와 1990년대 뉴욕에서 고군분투하던 젊은 예술가가 서로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기대와 궁금증을 안고 뚜껑을 열고 보니 이질적일 줄 알았던 두 요소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섞이고 있었다.

 

두 작품 모두 크리스마스이브를 맞는 가난한 청춘을 다루고 있다. 친구들을 보내고 홀로 남은 이의 집에 ‘미미’(<라 보엠>과 <렌트>에서 모두 이름이 같다)가 불을 빌리러 오면서 사랑에 빠지는 것, 소중한 친구가 병으로 목숨을 잃는 것이 두 작품의 주된 사건이다. 원작에서 차용한 사건 외의 부분은 재기발랄한 인물들의 개성으로 채워진다. 2021년 가을, 나는 <라 보엠>을 보고 다음과 같은 감상을 남겼다.

 


왠지 오페라라고 하면 특별한 이들의 비장한 이야기만 다룰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라 보엠>은 그런 나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고 평범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다루었다. 그래서인지 내 눈 앞에 펼쳐진 이야기가 정말 19세기 프랑스 어딘가에서 일어날 법한 일처럼 보였다. 

 

 

 

평범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 시공간을 초월하는 요소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19세기 프랑스, 돈이 없어 자신이 쓴 원고를 땔감으로 쓰며 추운 겨울을 나던 그들도, 90년대 초 뉴욕, 집세가 밀리고 재개발에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시위하던 그들도, 그들의 삶을 지켜보는 나도 모두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 날것의 현실에서도 아름다움을 담아낸 <틱, 틱... 붐!>의 분위기와 <라 보엠>의 특별한 겨울 분위기가 원래부터 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2023뮤지컬렌트] Another Day_로저(장지후), 미미(김환희).jpg

 

 

닥쳐오는 시련에 마음껏 아파하다가도 서로를 붙잡으며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감동적이었다. <렌트>에서는 특히 소수 인물만 나오는 것보다 극의 모든 인물이 다 같이 무대에 서는 순간이 좋았다. 비주류인 저들의 연대가 얼마나 끈끈한지 알기에 그저 같은 자리에서 함께 노래하는 것만으로 뭉클했다. 엔젤이 세상을 떠나는 고통스러운 순간까지 우정의 힘으로 극복하는 공동체가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시 현실로 돌아온 나는 차갑고 삭막한 현실에 빠르게 식어갔다. 인생은 혼자인 것 같고, 뭐 하나 안정적이지 않은 내 상황은 비참하게만 보였다.

 

영화에서나 뮤지컬에서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저들은 참 아름다운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90년대 초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배경이 낯선 서양이 아니었다면, 감미로운 음악이 없다면 가난한 예술가들의 삶이 빛날 수 있을까? 영세한 예술가들을 위한 지원이 줄줄이 중단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읽고 <렌트>의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떠올랐다. 화려한 성취에 목매지 않고 친구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을 즐기던 그들이 말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빛나는 지망생의 삶


 

<틱, 틱... 붐!>을 보기 하루 전, 가족과 ‘실망하는 게 두려워서 처음부터 실패를 가정하고 노력하지 않는 태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만, 그건 실패해도 털고 일어설 만큼 든든한 기반을 가진 사람에게만 통하는 말이었다. 어느새 열정은 잃어버리고 냉소만 가득한 어른이 된 나는 실패해도 다치지 않기 위해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지 않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다음날 혼자 집에 남자 넷플릭스로 무엇을 볼지 고민하다가 전부터 친구가 추천했던 <틱, 틱... 붐!>이 떠올랐다. 별생각 없이 본 그 영화엔 자신의 뮤지컬을 완성하겠다는 꿈 하나만으로 8년의 세월을 쏟은 조나단 라슨이 있었다. 영화는 꿈에 인생을 바친 그의 삶을 ‘열정’이나 ‘청춘’이라는 단어로 미화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시간을 쪼개가며 작업에 몰두하고, 마음처럼 떠오르지 않는 영감에 피가 말리는 듯한 초조함을 느끼고, 작품에 대한 집착으로 소중한 연인과 헤어지고, 온 열정을 바쳐 겨우 완성한 작품에 상업성이 없다고 평가받는 조나단 라슨의 삶은 처절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나는 그 처절한 현실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몇 개월 전 나는 오랫동안 고민했던 퇴사를 실행했다. 자발적으로 불안을 선택한 나는 아르바이트와 프리랜서 업무를 경험하며 새로운 세상을 알아갔다. 프리랜서 업무가 종료되고,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나는 퇴사 직후와는 또 다른 느낌의 불안을 만났다. 그래도 이 불안이 뭐든 경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은 것 같아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무슨 일을 하느냐’라는 질문에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지금 나는 일을 하지 않고 무언가가 될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데,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건 적절한 답이 아닌 것 같았다.

 

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이 하는 일로 규정된다. 그럼 지금 나는 무슨 인간일까? 일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미완성의 존재인 걸까? 지금 내 일상은 회사에 다녔을 때보다도 풍부한데, 이것만으로는 나를 증명할 수 없는 걸까? 그 어떤 직함도 소유하지 않은 나는 이루지 못한 꿈에 삶의 의미를 빌리고 있는 걸까? 일을 하기 전까지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 속에서 책을 통해 열다섯 명의 영화감독 지망생을 만나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지망생의 씁쓸한 현실을 밝히는 사회보고서일 줄 알았으나 막상 책 속의 지망생들은 낙관할 수 없는 환경에서 비관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지망생이라면 경제적인 불안,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다는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불안에 짓눌리는 대신 달관한 상태로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건 희망을 품어서도, 열정이 넘쳐서도 아니다. 어차피 어떤 일을 해도 불안하니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뿐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열정’이라는 단어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었다는 걸 느꼈다. 이룰 수 없는 꿈에 매달리는 건 집착일 뿐이라고, 성공하는 건 소수일 뿐이니 빨리 현실을 깨닫는 게 좋다고, 오래전 내가 비판했던 어른의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책의 영화감독 지망생들은 현실을 모르는 풋내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삼자보다 훨씬 냉혹한 현실을 잘 알고, 그 현실에 맞서는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지망생 기간은 열정을 쏟고 의지를 꽃피울 수 있는 기간이 아닌 의지가 깨지지 않도록 저항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꿈을 가지고 뛰어든 이들에게 창의 노동의 장은 열정을 지펴 주기보다 외부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김보라,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87p

   

 

조나단 라슨은 <렌트>의 첫 오프브로드웨이 개막 전날인 1996년 1월 25일 대동맥류 파열로 사망했다. 오랜 시간 고생만 해온 그가 달콤한 성공을 맛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렌트>를 보고,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내 생각이 편협했음을 깨달았다. 조나단 라슨의 지난한 삶을 <렌트>의 성공으로 가닿기 위한 과정으로만 치부한 것이다. <렌트>가 성공하기 전에도 그의 삶은 이미 충분히 빛나고 있었다. 막막한 꿈에 다가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영화감독 지망생들처럼, 사랑의 힘으로 다사다난한 일 년을 보냈던 <렌트>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2023뮤지컬렌트] Seasons of Love.jpg

 

 

글을 쓰기 위해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줬던 노래 ‘Seasons Of Love’를 다시 들었다.

 

 

525,600분의 귀한 시간들

우리들 눈앞에 놓인 수많은 날

525,600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일 년의 시간

 

날짜로, 계절로, 매일 밤 마신 커피로

만남과 이별의 시간들로

 

525,600분의 귀한 시간들

어떻게 재요 인생의 시간

그것은 사랑

사랑으로 느껴봐요

 

 

공연을 보면서도 낭만적인 가사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들으니 더욱 깊이 와닿았다. 일 년의 시간을 채우는 사랑. 그 사랑은 가족, 친구, 연인과의 사랑일 수도 있고, 아직 무엇도 되지 못한 나를 향한 사랑일 수도 있다.

 

뉴욕은 전 세계 경제가 좌지우지되는 금융의 도시다. 극도의 효율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이 도시에서 한 젊은이는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을 보냈다. 그 결과로 <렌트>라는 아름다운 뮤지컬이 탄생했고, 저 먼 한국 땅에 사는 내가 위로받았다. 무엇도 되지 못한 비주류의 그들, 그들이 가난과 질병 등 숱한 역경 속에서 보낸 일 년의 시간을 사랑으로 채웠듯이 나도 나를 포함한 이 땅의 수많은 지망생을 사랑하는 2024년을 보내고 싶다.

 

 

[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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