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네마와 OTT의 간극 [영화]

OTT는 진정 시네마를 대체할 수 있을까
글 입력 2021.07.0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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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믹 이후 우리 사회는 ‘시네마(Cinema)’의 축소를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경험했으나, 이 사태를 위기로 받아들이는 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데이트나 가족 나들이를 위한 대표적인 장소나 수단이 축소되었다는 아쉬움이 주된 의견으로 느껴진다. 오히려 극장 티켓 가격의 상승이 더욱 큰 불만으로 나타나는 현상 또한 현 사태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대변할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시네마는 분명 위기를 맞이했다. 적어도 현재 국내 영화 시장이 후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산업적으로도 이는 큰 문제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20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극장 관객 수는 5,952만 명으로 전년 대비 73.7%, 매출액의 경우 5,104억 원으로 73.3% 감소했다. 이는 2004년부터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시행된 이후 최저치다.

 

코로나 전염을 우려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비대면화가 많은 인원을 폐쇄된 공간 속에 두는 영화관의 구조에 공포를 느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관객수 제한과 상영관의 축소가 그러하다. 조치 이후 상영 예정작의 개봉 연기와 그를 이유로 한 관객들의 실망이 시장의 악순환을 이끌었다는 것도 명백한 지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상황의 인식을 흐릿하게 만들었을까. 영화와 그 상영의 장, 시네마의 축소는 수치상으로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사회는 그만큼의 불편함을 느끼지 않으며 위기의식 역시 크지 않다. 2019년 미국 영화협회가 발표했듯 한국 영화 시장은 세계 5위의 거대 시장으로 그 규모는 인도와 프랑스를 앞지른 16억 달러에 달한다. 집 앞의 편의점만 사라져도 우리는 분명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이런 거대 시장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의 인식은 그에 비례할 만큼 크지 않았다. 그만큼의 공허함과 이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끔 만든 것이 무엇인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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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의 ‘부재’ 이후 그 ‘대안’으로 떠오른 OTT(Over The Top Media Service)의 유행이 나름의 장치로 작용했을 듯싶다. 해당 서비스의 부상은 분명 위기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시네마의 하락세가 두드려졌다면 OTT는 그와 달리 공격적인 증가세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컨설팅 업체 PwC의 미디어 산업 발표는 현 OTT 시장의 규모를 무려 462억 달러로 측정했다. 2019년 기준 세계 영화 시장의 규모가 411억 달러였음을 고려할 때 이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실제 월스트리트저널은 코로나가 절정에 달했던 2020년 미국 내 OTT 가입자가 3억 명을 돌파했음을 알렸고, 해당 사업의 선두 주자 넷플릭스는 작년 실적 보고를 통해 자사의 글로벌 유료 구독자가 2억 명을 넘어섰음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현재 넷플릭스의 상승세가 주춤거리고 있음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경쟁 업체의 활약에 근거한다. 아마존 프라임의 글로벌 이용자가 2억을 넘어섰고 디즈니 플러스는 역대 가장 빠른 속도로 구독자 1억을 달성하기도 했다. 국내 OTT 서비스 역시 증가세를 보였다. 방송 3사가 합작한 웨이브의 MAU(월간활성이용자)는 약 450만 명에 달했으며 티빙의 경우 약 300만 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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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확장 흐름에 힘입어 OTT가 코로나 이후 고난에 처한 ‘영화(Movie)’ 소비에 도움을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대규모 자본이 투자되어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조승희 감독의 '승리호(2020)'나 윤성현 감독의 '사냥의 시간(2020)'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두 작품은 그간 한국에서 그다지 시도되지 않았던 SF 장르와 디스토피아 장르였기에 더욱 의미를 지닐 것이다.

  

그러나 OTT가 현재의 위기 상황 속 나름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지라도, 또한 추가적인 시도를 이끌었다 할지라도 이를 위기 극복의 수단으로 단정 짓거나 시네마의 영역으로 성급히 포함하는 일은 곤란해 보인다. 해당 서비스가 곧 시네마의 대안이라는 사고 역시 그저 넘기기엔 찝찝함이 있다. 두 영역의 경험적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두 미디어 서비스의 차이, 즉 두 미디어 간의 ‘틈’을 느낄 수 있는 한 우리는 묘한 찝찝함을 버릴 수 없다. 곧 시네마에 대한 고민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기도 하다.

 

시네마와 OTT는 미디엄(Medium)을 보여주는 방식 역시 차이를 지니며 OTT의 관심 영역 역시 시네마의 것과 동일 선상에서 보기에 어려움을 지닌다. 우선 간략히 말해 두 미디어의 가장 큰 차이점은 1인 경험(가족 또는 연인과 함께 봤다는 주장을 고려해 소수 경험까지 인정하겠다)과 다수 경험이다. 유로 구독을 해야 하며, 넷플릭스가 한 계정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이를 증명한다. OTT는 1인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로 영사기와 거대 스크린을 거부한다. 스마트폰 하나면 충분하다. 즉 다자 간 경험 공유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가 1인 경험이란 측면에선 OTT와 유사해 보인다.

 

더하여 이들에게 '장르'는 시네마적 구분의 영역이 아닌 제공되는 콘텐츠 영역의 문제이다. OTT는 우리가 과거 기존의 영화관에서 보았던 영화를 넘어 16부작 혹은 시즌제 등 많은 ‘화’로 구성된 드라마와 엔터테인먼트 쇼, 코미디 쇼,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까지 제공한다.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다. 최근 OTT는 스포츠 중계권마저 유통한다. 현재 ‘유로 2020’이 티빙을 통해 중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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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르’란 카테고리의 영역이 엄밀한 구분을 지정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분명 스포츠 영화와 스포츠 다큐멘터리 그리고 스포츠 중계를 구분한다. 화제를 낳았던 넷플릭스의 스포츠 다큐멘터리 'Sunderland' Til I Die(죽어도 선덜랜드), 2018'와 12세 소년의 아스널 입단기를 다룬 스포츠 영화 'Fourmi, Of Love and Lies(어쩌다 아스널), 2019'는 분명 다른 장르다. 더해 이번 유로 2020의 덴마크가 소위 ‘극적인(Dramatic)’ 4강 진출을 이뤘다 할지라도 해당 경기는 스포츠 중계이다. 장르로서 하나의 ‘드라마(Drama)’가 될 수는 없다. 다만 그런 요소를 갖춘 한 경기로 기억될 뿐이다.

 

영화(film)의 담보가 곧 시네마(cinema) 재현은 아닐 것이다. 현재의 OTT가 말 그대로 영화를 보기 위한, 영화를 소비하기 위한 가장 두드러진 방법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영화라는 촬영물을 볼 수 있기에 이 서비스가 현재 시네마를 대체하였고 곧 시네마 경험을  계승했다고 단정 짓는 것은 다소 성급한 판단으로 보인다. 이는 영화와 영화 경험을 그저 흘러가는(streaming) 것으로 한정시킬 뿐이다. 초기의 영화 장치들이 'KINO'와 'CINE' 혹은 'KINE'라는 접두사를 사용한 것에서 추측할 수 있듯 영화의 근본적 취지는 '움직임(KINESIS)'의 재현이었다. 인간은 기하학적으로 공간을 차지한 물체와는 달리 시간적으로 존재한다. 즉 이는 인간과 시네마가 공유하는 본질적 속성이 시간임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현 시네마의 ‘대안’으로 여겨지는 OTT가 과연 그 ‘틈’을 메우거나, 혹은 그를 뛰어넘어 시네마를 대체하였는지 질문하고자 한다. 만일 진정 성공적 대체를 말하는 이가 있다면 역으로 질문해야 한다. OTT의 역할이 현재 정말로 시네마의 임무를 대체하였는지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기존 시네마는 어떤 일을 하였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답변이 요구되어야 한다. OTT가 도대체 무엇을 제공하였기에 이름은 물론 체험에서도 차이를 지닌 두 미디어가 실상 같아졌는지, 그 틈을 해소한 방법은 무엇인가를 질문할 정당성은 충분해 보인다. 시네마가 무엇으로서 어떤 일을 수행하였는지 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OTT가 그 의문의 무엇을 대체하였음을 자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본질적으로 시네마의 부재라는 위기 사태를 흐릿하게 만드는 것은 OTT의 유행이 아니다. 미디어로서 OTT 자체는 그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인식의 문제를 일으킨 진정한 이유는 결국, 질문의 부재이다. 시네마의 본의와 그 근원적 위기에 대한 물음이 없는 한, 답을 구하는 일은 애초 불가능하다. 지난 기사에서 코로나 이후 시네마가 마주한 진정한 문제는 그 장소적 물리적 축소가 아닌 질문의 부재임을 말했다. 이 위기를 인식하는 것에서도 시네마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필수불가결적이다. 묻지 않기에 모르며 모른다면 인식조차 불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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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OTT와 가까워지며 우리는 시네마는 그만큼 멀어졌다. 그렇기에 이는 동시에 질문의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에게서 멀어졌기에 익숙함 또한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낯섦’을 통해 시네마가 무엇인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를 시도하지 않은 채 그저 OTT가 제공하는 편안함에 매몰된다면 문답의 기회는 사라질 것이다. 현재는 물론 미래에서도 마찬가지다. 현재 코로나로 마주하게 된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듯이 말이다. 새로운 위기 속 사람들은 아마 가장 가까운 편안함을 대안으로 말하며 떠나갈 것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가 시네마를 원하고 있기에 고민의 가치는 더욱 값질 것이다. 점점 회복세를 보이는 영화 시장과 이어지는 재개봉 시도가 그 증거이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작년 3월 대비 2021년 3월 전체 관객 수는 77.5% 증가했다. 더하여 3월 전체 극장 관객 수는 전월 대비 4.7% 늘어난 326만 명이었다. 상승세는 점점 더 이어지고 있다. 2021년 5월 영화결산보고서는 5월 관객 수가 전월 대비 71%, 전년 동월 대비 187% 상승했음을 밝혔다. 매출 역시 287억 원 증가했다. 시네마를 향한 열망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딜타이는 세계의 끝에서만 역사의 의미를 알 수 있음을 말했다. 전체를 보고자 한다면 필히 끝에 도달해야 한다. 부분 속 전체를 파악할 순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실 시네마와 시네마적 경험을 무엇이라 말하며 OTT와 비교하는 것이 적절치 않을 순 있다. 다만 시네마를 향한 확장의 사고가 멈추어선 안 됨을 말하고 싶다.

 

전체가 가지는 정체성과 의미의 이해는 분명 그 ‘끝’에서 이뤄지지만, 이 끝은 결국 미래를 향해 나아가가 과거가 되어버린 현재의 축적이기도 하다. 나뉘어 그 홀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프레임들이 쇼트와 신으로 모여 영화를 구성하듯 말이다. 그리고 관객은 그런 축적의 흐름을 사고하며 영화를 관람한다. 만일 이가 도중에 끊긴다면 우리는 결국 끝에 이를 수 없고 의미를 물을 수 없다. 앞선 프레임의 연속이 무의미해지는 셈이다. ‘시네마’ 역시 마찬가지이다.


차후 무엇이 시네마의 영역으로 인정받을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속에서, 지금껏 축적되어 온 시네마적 경험과 그에 대한 사고의 중단이 무기력하게 일어나선 안 된다.

 

 

[김동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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