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밀스러운 햇살 [영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
글 입력 2021.07.0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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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를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용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

 

- 이청준 ‘벌레 이야기’ 中

 

 

 

#0


 

[크기변환]밀양.jpg

 

 

교회 안에는 찬송가가 울려 퍼진다.

 

목사는 강단 밖으로 나와 신도 한 명 한 명을 살핀다. 목사 뒤에 있는 벽에는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라고 적힌 주황색 현수막이 걸려있다. 목사는 신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한다. 생채기가 난 곳에 붙였던 반창고를 떼어내듯, 신도들을 위로하는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다.


신도들은 축복을 받은 듯이 고개를 하늘로 들어 황홀한 표정을 짓거나,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조용히 흐느끼곤 한다. 신애는 떨리는 눈동자로 이 광경을 지켜보다 울음을 터트린다. 목사는 신애에게 다가가 안수한다. 하지만 고름과 같이 계속 터져 나오는 신애의 절규는 계속된다.

 

 

 

#1

 

신애는 얼마 전 남편을 잃고 밀양에 왔다.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서 신애가 의지할 사람은 아들 준이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준이가 유괴된다. 유괴범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었으나 준이는 끝내 살해당하고 만다. 얼마 뒤 범인이 준이가 다니던 학원의 원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큰 충격을 받았음에도 신애는 울지 못한다. 기대어 울 곳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점을 잃은 눈으로 살아가던 신애에게 이웃은 교회에 나올 것을 거듭 권한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신애는 교회에 방문한다. 그곳에서 신애는 비로소 기댈 곳을 찾았고 목 놓아 울음을 터트린다

 

그날 이후, 신애는 하나님을 믿게 된다. 교회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고 시내 한복판에서 함께 찬송을 부르며 지낸다. 이들과 함께 있을 때 신애는 비로소 웃음을 되찾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혼자 남겨지게 되면 신애는 여전히 준이의 환청을 듣는다.

 

 

 

#2


 

[크기변환]밀야앙.jpg

 

 

신애에게 하나님은 진통제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진통제 한 알로도 통증이 가시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양의 약이 필요하듯이, 신애는 하나님의 말씀에 점점 더 매달린다. 신애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한다. 마음속으로 용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신애는 직접 유괴범을 만나 용서해 주기로 한다.

 

면회를 하러 간 신애는 유괴범의 평온한 표정에 당황한다. 유괴범은 자신도 하나님을 믿어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말한다. 피해자는 용서하지 않았는데 가해자가 먼저 용서를 받아버렸다. 신애는 자신보다 먼저 유괴범을 구원해 준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나님에게 반항이라도 하듯 신애는 악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야외 찬송회에서 찬송가 대신 ‘거짓말이야’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노래를 틀고, 교회 집사의 남편을 유혹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행위도 신애에게 일말의 위로조차 되지 못한다.


이후 신애는 과도로 손목을 긋게 되고 정신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퇴원 후 머리를 자르기 위해 방문한 미용실에서 유괴범의 딸을 만나게 되는데, 신애는 그녀를 용서하려 애쓰지 않고 머리를 자르는 도중에 뛰쳐나온다. 집으로 돌아온 신애는 스스로 머리를 자른다.

  
 
 

#3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원작 소설은 구원받지 못한 주인공의 자살로 끝이 나지만, 영화 속 신애는 삶을 이어나간다. 이는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구원은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 절망>

 

 

절망은 자신을 반성하지 않기 때문에, 구원은 절망을 굴복시키는 방향에서 오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한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신애의 노력은 구원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신애가 구원에 대해 체념하게 되었을 때, 구원은 비밀스럽게 시작된다. 신애가 온 곳이 밀양(密陽:비밀스러운 햇살)인 이유, 그리고 영화가 구석진 땅에 비친 햇살을 보여주며 끝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포맷변환]밀양_31.jpg

 

 

 

#4


 

‘밀양’은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오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구원에 다가가는 영화이다. 그렇기에 구원에 대한 해답을 영화 속에서 찾기 어렵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면, 해답을 찾기 위해 스스로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각자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절망을 이기려 애쓰지 않는 것을 나의 해답으로 삼으려 한다. 충분히 아파하면서도 언젠가 예기치 못한 구원이 올 거라 믿고 싶다. 그렇다면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폴 발레리의 문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안균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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