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누구든 볼 수 있는 공간 - 에도가와 란포 '지붕 속 산책자'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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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에도가와 란포의소설 <지붕 속 산책자>에 관한
스포일러를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오직 범죄에만 흥미를 느끼는 한 남자가 있다. 그에게 범죄가 아닌 세상 모든 것은 지루함과 같다.
다행히도 그는 범죄는 좋아해도 감옥과 나쁜 평판은 좋아하지 않아서, 실로 범죄를 저지르진 않는다. 저지르는 ‘상상’만으로 대리만족을 할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변장을 하고 남몰래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다니거나, 범죄 조직과 암호를 주고받는 것처럼 스산한 담벼락에 분필로 화살표를 그리며 무료한 시간을 버틴다.
그렇게 상상만 즐기던 그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하숙집 천장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였다. 하숙집 모든 방의 천장 위에는 이어진 빈 공간이 있었고, 여길 통해 그는 다른 이들의 천장 위로 이동할 수 있었다.
누구도 자신을 볼 수 없지만, 자신은 틈을 통해 누구든지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공간에서 범죄에 대한 그의 상상은 끊임없이 반복됐고 욕망은 증폭됐다. 결국 그는 평생 상상만 하던 범죄를 천장 속 공간을 활용하여 실제 행동으로 옮길 계획을 세운다.
이는 에도가와 란포의 단편 소설 <지붕 속 산책자>의 주인공 코우다의 이야기다. 코우다는 현실에서 무료함을 느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새로운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게 아니라 ‘새로운 공간’을 찾아 하숙방을 옮겨 다닌다.
이는 공간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보여준다. 범죄에 매혹된 코우다는 범죄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더 실감 나게 만들어줄 공간들을 찾아다닌다. 어두운 골목길이나 텅 빈 공원에서의 범죄 놀이는 무료한 현실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코우다가 범죄를 흉내 내는 데에서 그치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다른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비난, 경찰에 의한 발각 등 ‘타의 시선’이 항상 그를 가로막았다. 그런 그에게 관음은 가능하지만, 노출은 되지 않는, ‘일방적 시선’을 가능케 하는 천장은 범죄를 참을 이유가 사라지는 공간이다.
더군다나 천장의 비장함과 비일상성은 그곳에 존재하는 사람을 극 속의 캐릭터로 만든다. 어둠에 가려진 “이무기 같은 마룻대”는 공간을 더 기묘하게 만들고, 천장에서 수직으로 내려다보는 하숙방은 더 이상 지겨운 일상 공간이 아니라 긴장감을 갖춘 색다른 공간이다.
그리고 그 안의 코우다 역시, 평소의 그가 아니라 그의 상상이 만든 다른 어떤 이가 된다.
천장 속 코우다의 흥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해보고 싶다면 우리 각자가 어릴 적에 만들었던 자기만의 요새를 떠올려보면 좋다.
의자와 의자 사이에 이불을 걸쳐 만든 집, 우리 몸의 다섯 배쯤 되던 장롱 속, 놀이터 미끄럼틀 아래 그늘진 곳 등. 우리에겐 나무 위에 올려진 근사한 오두막집은 없었지만, 각자 스스로의 집과 동네에서 얼마든지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정글 속 군인이자 미지의 세계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마법사, 혹은 미션을 수행 중인 비밀 요원이 되곤 했다. 그때 우리를 사로잡은 상상은 터무니없이 비현실적이었지만, 동시에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숨이 찰 정도로 생생하고 구체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보통의 우리는 오래 지나지 않아 공상에서 벗어나 현실 속으로 불러내어 진다. 그런 우리와는 달리, 코우다의 공상에는 그만하고 밥이나 먹으라는 엄마의 부름이나, 비웃음 섞인 형제자매의 조롱 같은 것이 개입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의 공상은 비밀 요원이나 마법사처럼 도저히 현실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는 종류의 공상이었다. 누구도 그의 공간을 허물지 못한 결과, 누구도 그의 공상을 멈추지 못했고, 결국 그의 공상은 현실로 번져갔다.
<지붕 속 산책자>는 공상과 공간이 사람을 어떻게, 어디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무서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공간과 공상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지만, 나는 누구든 볼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진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싶다면, 혹은 그저 코우다의 계획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궁금한 사람에게도, 에도가와 란포의 <지붕 속 산책자>를 추천한다.
[조예음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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