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호모사피엔스의 바람직한 종말을 위하여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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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한계를 극복해왔다. ‘남방의 원숭이’(오스트랄로피테쿠스)였던 인류 최초의 조상은 상대방보다 강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하여 ‘직립 원인’(호모에렉투스)이 되었다. 이후 네안데르탈인은 두려움의 대상이던 불을 활용하여 고기를 익히거나 추위를 막고 적을 쫓아내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하지만, 문화적 진보를 통해 가혹한 기후환경과 질병을 이겨낸 유일한 인류가 바로 호모사피엔스이다.
이브 헤롤드는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에서 호모사피엔스의 다음 세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외부적 요소로부터 살아남는 과정 속에서 자연적으로 진화된 이전의 인류와 달리, 먹이 사슬의 최정점에 선 현재 인류는 호모사피엔스의 종말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한다. 즉, 인간의 최후의 과제인 불멸을 정복함으로써 전통적 인간을 넘어 새로운 인류로 거듭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단계로, 인공장기의 보급을 시작하여 트랜스 휴먼의 시대의 문을 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진보가 과연 옳은가에 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아직 많은 이들은 철학적, 종교적, 윤리적 이유를 근거로 인간강화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노화를 비롯한 각종 질병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는다. 이와 같은 대립으로 새로운 종의 개막이 늦춰지고 있으나 영원히 미룰 수만은 없는 문제이다.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미래의 인류를 맞이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가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01. 학제적 교육에서 시작하는 문화적 혁명
책의 저자는 트랜스 휴머니즘을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절차 중 하나로 만인의 대화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지금까지는 과학자와 철학자만 참여했다면 지금부터는 종교, 정치, 환경, 법률, 규제, 의료 분야는 물론 대중이 두루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서로의 분야에 대한 아무런 이해 없이 대화의 장에 참여하는 것은 단순히 갈등만 심각하게 만들 것이다.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또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학문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과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학제적 교육은 대화의 장을 구성하기 위한 기본적 단계인 동시에 필수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대화의 장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술적 측면뿐만 아니라 인문, 사회, 예술적 측면을 강조하는 교육 시스템으로의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까지의 교육은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 과학, 기술적 인재를 창출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러한 교육적 패러다임으로 인하여 윤리적 의식이 기술적 진보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해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다학제적 교육과정을 제시한다. 한국도 역시 과학기술 창조력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융합적 교육 과정 (2015 교육 과정)을 따르고 있다.
비록 한국은 여전히 대입 중심의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지속적인 교육 패러다임의 개선을 통하여 인문, 사회적 소양을 포함한 학제적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매우 바람직하다. 이전처럼 문,이과의 구분으로 제한된 교육을 받게 된다면 첨단 기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어려우며 그와 관련된 사회, 도덕적 이슈와 관련된 논의를 시작조차 할 수 없다. 학문을 개별적으로 배울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학문을 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통합 과목이 구성되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과학기술과 인문사회를 연결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와 같은 학제적 교육은 문화적 혁명의 시작이다. 융합적 교육을 통해 지성을 더 높은 수준으로 강화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화의 장을 열어 사회적으로 정의하는 ‘인간성’의 기준을 재조정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인간강화의 제한선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트랜스 휴머니즘의 핵심적 논제인 ‘인간이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논의가 진행되는 시점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답에 도달하게 될 것이며 이러한 답은 대화의 장을 통해 언제나 변할 수 있다. 인류는 스스로의 진화를 결정하는 존재로서 미래의 교육과 담론을 통하여 트랜스 휴머니즘의 틀이 직접 형성될 것이다.
02. 평등을 묻고 세계시민주의로 답하다.
책에서 소개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어쩌면 트랜스 휴머니즘의 첫 번째 희생양은 인간의 평등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백신 전쟁이 펼쳐지는 현재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그의 말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결국 부유한 국가는 트랜스 휴머니즘을 신속하게 활용할 것이고 모든 질병을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지능적 강화를 이룰 수도 있다.
그러나 의식주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빈곤국의 경우에는 기술이 존재한다고 해도 값비싼 비용을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책의 저자는 시간이 지나면 국제적 차원의 복지가 이뤄져 결국 모든 사람이 인간강화를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과연 그럴까?
기근과 코로나19를 사례로 생각해 보자. 기근으로 위협받는 빈곤국의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전부터 국제적 차원으로 원조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빈곤은 해결되지 않는다. 자국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타국의 원조가 최소한으로만 이루어지기에 국제적 원조와 시간의 흐름이 결코 평등을 이루는 정답이 될 수 없다.
코로나19의 백신 접종 역시 경제적 능력에 따라 국가 간의 양극화를 보여준다. 부유한 국가의 경우 자체적으로 연구를 진행하며 가장 빨리 백신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당연히 대량의 백신을 확보할 수 있다. 2021년 5월 29일 기준, 미국의 경우에는 백신 접종률이 50% 이상으로 기록되었으나 빈곤국의 경우에는 올해 백신 접종을 시작하지 못할 확률이 90%로 예상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과연 미래의 인류는 과연 평등할 수 있을까? 현재의 ‘각자도생’ 의식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불가능하다.
이를 해결하고 트랜스 휴머니즘이 진정한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세계시민주의를 바탕으로 글로벌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물론 현재의 우리에게 모든 인간을 국경을 넘어선 동일한 세계의 동일한 가치와 권리를 지닌 시민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다분히 공상적으로 느껴진다. 또한, 모든 국가는 각 국가의 이익을 위해 권력 다툼을 하고 있기에 글로벌 민주주의를 추구하기에는 지구의 모든 시민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어렵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가기 위한 윤리적, 사회적 규범을 끊임없이 논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상적이라고 치부하여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과학기술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윤리적, 정치사회적 측면에서도 천문학적인 상상력을 펼칠 필요가 있다. 물론 오랜 시간과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겠지만 우리는 호모사피엔스의 바람직한 종말을 위하여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세계적 시민의식을 함양하기 위해 국제적 차원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누가 알겠는가? 현재 우리가 조선시대의 신분제도를 생각하듯이 미래의 인류 역시 현재의 ‘각자도생’식 자본주의를 바라보게 될 수도 있다.
03. 새로운 인류를 맞이하기 위하여
이브 헤롤드가 말했듯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반감과 두려움 때문에 진보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역사의 수레바퀴가 멈출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결국 사회의 전 영역에서 인간강화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융합 기술을 필요에 맞게 건설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서로의 학문을 이해하고 또 자신의 학문적 측면에서의 기술적 필요성 및 한계를 제시하기 대화의 장이 열려야 한다. 학제적 교육은 이를 위한 필수조건이자 문화적 혁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대화의 장이 국제적 차원의 담론으로 이어진다면 트랜스 휴머니즘의 최대 난제 중 하나인 기술 분배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다가갈 수 있다. 아직은 다소 추상적이지만 국가의 분류를 넘어서 세계시민의식을 함양하게 된다면 기술적 진보에 걸맞은 도덕적, 사회적 규범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는 20세기의 짧은 한순간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인류의 변화를 포착하기 어렵다. 지속적으로 변하는 교육적 커리큘럼은 불편하고 세계시민주의의 중요성이 와닿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미래를 맞이하기 위하여 계속되는 변화에 도전하고 새로운 대회의 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우리가 종종 상상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아니라 호모사피엔스의 바람직한 종말을 맞이하기 위하여 낯섦을 기꺼이 받아들여보자.
[박세윤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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