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들은 왜 굴뚝에 올랐을까 - 굴뚝을 기다리며 [공연/연극]

글 입력 2021.06.1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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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여기, 굴뚝 위에 누누와 나나가 있다. 그들은 굴뚝을 기다리고 있다. 절뚝거리며 굴뚝을 따라 걷는 누누와 나나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싸움을 벌이고 이내 다시 화해하고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똑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것만 같은 그들의 일상에 청소와 로봇 미소, 그리고 이소가 찾아오는데…….

 


노동자들의 현실을 다룬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가 오는 6월 27일까지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무대에 오른다.


극단 '고래'의 17번째 작품 <굴뚝을 기다리며>는 고공농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이다. 고래의 공동대표이기도 한 이해성 교수가 직접 극작과 연출에 참여했다. 그는 수년간 고공농성 해고노동자들과 연대했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 빗대어 노동자와 노동운동이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그려낸다.


따라서 <굴뚝을 기다리며>는 우스운 동시에 서늘하다. 유쾌하면서 처연하다. 한 작품 안에서 이러한 양가적인 감정을 느낀다는 게 모순적이긴 하지만 괜찮다. 이건 결국 아이러니를 이야기하는 연극이었으니까. 마치 굴레와도 같은 '우리'와 '노동'이라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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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누와 나나


연극이 시작되면 두 남자가 등장한다. 그들의 이름은 누누와 나나. 굴뚝 위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이다. 좁은 난간 위를 절뚝거리며 돌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위태롭지만 동시에 우스꽝스럽다.


그때 갑자기 누누가 발이 아프다며 주저앉는다. 이에 나나는 발이 아픈 이유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쓰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번번이 길을 잃고 미끄러진다. 이 발이 아픈지, 저 발이 아픈지. 발이 아픈 이유가 신발이 작아서 그런 건지, 발이 커서 그런 건지. 내가 부끄러운 건지, 발이 부끄러운 건지 등등.


결국 통하지 못한 말들은 몸을 잃고 공중으로 휘발된다. 그러니 누누와 나나의 대화는 텅 비어있다. 실체는 있지만 내실은 없다. 속절없이 시간만 흐르는 가운데 텅 빈 대화는 텅 빈 하루를 만들어냈다. 무의미하고 무료한 오늘. 결국 참다못한 누누가 나나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그러자 나나가 대답했다. '우린 굴뚝을 기다리고 있지.'


굴뚝? 웬 굴뚝? 그들이 말하는 굴뚝이 뭐길래? 대관절 왜 굴뚝을 기다리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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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청소, 미소, 이소


앞서 말했듯 <굴뚝을 기다리며>를 아우르는 핵심 테마 중 하나는 '아이러니'다. 일례로 발이 아파 신발을 벗었던 누누는 다음날 발이 아파 다시 신발을 신어야 한다. 이때 발과 신발의 관계는 인간과 노동의 은유이기도 하다. 너무 작은 신발은 발을 고통스럽게 만들듯, 고된 노동은 인간을 병들게 만든다. 허나 그렇다고 신발을, 노동을 분리할 수는 없다. 신발은 맨발을 보호하고, 노동은 인간에게 먹고 살 경제력과 실존적인 가치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한편 굴뚝 위에서 누누와 나나는 세 사람을 만난다. 청소와 미소, 이소. 이들은 극중 아이러니적 요소와 함께 각각 오늘날에 노동자와 노동 운동이 처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상징한다.


'청소'는 굴뚝을 청소하는 청소부다. 그는 세상의 부조리에 쉽게 분노하고 따져 묻기를 좋아한다.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는 산타를 비난하며, 진짜 선물이 필요한 사람은 다름 아닌 우는 아이라고 일갈한다. 왜냐하면 필요한 게 없는 아이는 굳이 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청소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는 관대한다. 침묵하고 순응한다. 그가 오늘 청소해야 할 굴뚝은 총 365개. 개당 10원씩 받는다고 하니 그가 온종일 굴뚝을 청소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 3,650원뿐이다.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잔 값도 안 되는 그 돈을 위해 오늘도 청소는 굴뚝을 오른다. 이렇게 위험한 일은 반드시 두 명이 함께 움직여야 하지만 청소 단가도 후려치는 마당에 2인 1조 원칙을 지켜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청소는 웃는다. 스스로를 성자에 비유하며 사람들의 무시와 저임금, 고위험에도 도를 닦는 심정으로 굴뚝들을 청소해 나간다. 그리고 그 순응의 대가로 청소는 일자리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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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소'는 굴뚝 청소용 로봇이다. 그는 인간을 대신해 굴뚝을 청소한다. 덕분에 청소는 이제 위험한 노동에서 벗어났다. 허나 그렇다면 청소는 이제 무슨 일을 하며 먹고살아야 할까.


미소의 이야기는 기술의 발전에 일자리를 침식당하는 인간의 현실을 담담하게 그린다. 19세기 초 산업화와 근대화를 겪으며 인간의 노동은 성스러운 지위를 획득했다(청소가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인간에게 노동은 먹고 살 돈을 버는 수단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술의 발전으로 노동은 성스러운 지위를 떠나 해방의 목표가 되었다. 기술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허나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간은 동시에 실직자가 된다. 이게 바로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주는, 미소가 가져온 또 다른 아이러니다.


마틴 포드의 <로봇의 부상>에 따르면 기술의 발전(혁명)은 새로운 계급을 낳았다. 농업혁명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구분을 가져왔고, 산업혁명은 노동자 계급의 탄생시켰다. 그리고 오늘날 21세기의 혁명은 쓸모없는 계급을 만들어낸다. 그런 고로 청소는, 어쩌면 누누와 나나까지도 이제 쓸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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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소는 20대 젊은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누누(누구)와 나나, 청소, 미소와 달리 이름에서 기원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등장도 흥미롭다. 다른 인물들과 달리 무대(굴뚝) 밖 허공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때 굴뚝은 고립된 장소다. 실제로 이소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누누와 나나를 답답하게 여긴다. 잠시 들어와서 쉬었다 가라는 나나의 호의에도 자기가 그곳에 왜 들어가냐며 거부한다. 이건 그녀가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소도 '내가 이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요?'라는 대사를 통해 그녀 자신도 서글픈 노동자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결국 그녀도 누누와 나나처럼 굴뚝을 기다리는 노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누와 나나를 공감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이소의 모습은 똑같은 노동자이지만 정치적 프레임 등에 갇혀 보편적인 공감을 얻지 못하는 노동 운동의 씁쓸한 현실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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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굴뚝을 기다리며

 


"여기는 너무 높아."

"아니야. 여긴 너무 낮아."

"너무 높다니깐?"

"너무 낮다니깐?"

 


연극 속에서 굴뚝은 한없이 높으면서 동시에 한없이 낮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만 동시에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그런 곳에서 누누와 나나는 굴뚝을 기다린다. 굴뚝에서 굴뚝을 기다린다.

 

 

"올리고, 내리고, 뒤집고, 넘기고…

올리고, 내리고 뒤집고, 넘기고…"

 


허나 굴뚝 위에서 굴뚝을 기다리는 삶도 굴뚝 아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나나는 굴뚝 아래에서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올라온 이유를 되새기지만 정작 그 자신도 굴뚝 위에서 보내는 하루는 거의 비슷하다. 올리고, 내리고, 뒤집고, 넘기고. 아침에 일어나 씻고, 운동을 하고, 밥을 먹고, 사람들과 소통을 하고. 그런 가운데 희망은 난간에 매달린 화분 속 꽃마냥 위태롭기만 하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굴뚝 위엔 한 사람만이 남아 있다. 계절도 바뀌어서 벌써 겨울이다. 내일이면 온다던 굴뚝은 아직도 오지 않은 모양이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곳에서 여전히 굴뚝을 기다린다. 텅 빈 노동을 반복하며, 텅 빈 하루를 반복하며 그가 기다리는 굴뚝은 과연 무엇일까? 임금 상승? 처우 개선? 복직? 아니면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무언가?

 

안타깝게도 연극은 그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굴뚝을 기다리며> 자체가 하나의 질문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렇기에 대답의 책임은 극장을 나서는 관객에게 주어진다. 처음의 질문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왜 굴뚝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들이 기다리는 굴뚝이란 대관절 무엇일까. 혹시 당신이라면 이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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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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