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조각] 눈을 좋아하세요...

어른이 되면서 달라진 눈과 눈에 대한 단상들
글 입력 2021.05.19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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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조각 두 번째. 눈과 눈


 

 

# 안경이 좋은 사람들을 위한 대변(代辯)서

 

[크기변환]안경_3.jpg


 

다섯 살에 안경을 쓰기 시작해 지금까지 함께 하고 있다. 장난삼아 안경이 내 본체라고 말하고 다닌 지 오래되었다. 스무 살 이후로 안경은 왜 쓰는지, 혹은 왜 안 벗는지에 대한 질문을 무수히 받아왔다. 그들의 질문 속 숨겨진 단순한 저의는 안경이 불편하다는 인식일 것이다. 드나드는 곳의 온도 차가 심한 여름과 겨울이면 안경의 김 서림을 신경 쓰면서 살아야 하고, 온종일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코로나 이후, 마스크와 안경의 조합은 얼굴 위에서 불협화음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마스크 대신 안경을 포기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나는 안경과 오래된 인연을 놓지 않았다. 놓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안경을 쓰게 된-시력이 안 좋아지게 된- 계기를 물어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안경을 쓰고 싶어서 일부러 시력이 나빠지도록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었다든지, TV를 본 적이 있었다고 말하는 경우를 말해주었다. 형제자매 중 한 명이 안경을 쓰면 다른 한 명이 부러워하는 에피소드도 종종 들었다. 보통 손위 형제가 먼저 안경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을 텐데, 동생들에게 자신의 형제자매가 쓰는 안경은 마치 애니메이션 속 히어로가 가진 무기 마냥 멋져 보이는 아이템이 된다. 이렇듯 대부분의 어린이가 처음 마주하는 안경에 대한 이미지는 자신에게는 ‘없는’ 아이템이고, 동경의 아이템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안경의 위상은 조금씩 추락하는 것일까.

 

안경 쓴 사람을 바라보는 고정적인 이미지에 대한 발화를 숱하게 들어왔다. 안경 하나로도 어떤 사람들은 안경 쓴 사람들을 쉽게 단정 짓는다. 그리고 그 안경을 쉽게 벗어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안경에 얽힌 기억은 어린 시절 짓궂은 남자아이들의 놀림으로 시작된다. 안경을 얼굴에서 빼내려고 하거나, 벗어보라는 질문들. 이후로 계속 악의가 없어도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사람들, 혹은 은근한 단정으로 안경 쓴 나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말들을 들어왔다.

 

이제는 덤덤하게 넘길 수 있지만, 매번 비슷한 말들을 듣는 것이 싫어서 안경을 벗고 렌즈를 껴보려고 했다. 스무 살 이후 주변 친구들도 안경은 집에서나 쓰는 존재 취급했으므로, 그것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안경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시도들은 전부 실패했다. 어떤 점이 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렌즈를 낀 눈으로는 전보다 세상이 잘 보이지 않았고, 머릿속은 한 겹의 안개를 두른 듯한 기분이었으며, 시간이 지나자 눈 안에서 굴러다니는 눈동자의 움직임이 거슬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시기를 거치고 나서야 나는 내게 안경이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경에 대한 세상의 부정적인 시선을 뾰족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시선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안경을 왜 쓰냐는 질문에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기도 하고, 사실 안경을 이렇게 오래 썼음에도 내 눈 상태에 대해 잘 몰라서 답하기가 꽤 곤란하다. 분명한 하나는 안경이 없어도 지장은 없지만, 안경을 썼을 때와 온전히 같은 상태는 아니라는 점 정도.

 

사실 나는 시력이 좋다. 안경이 없어도 세상을 보는 데 무리가 없고, 시력이 좋지 않은 친구들이 묘사하는 흐릿한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그 흐릿한 세계-너무 자세히 세상의 모든 것들을 눈에 담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를 좋아해서 안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어느 날은 가수 아이유의 앨범 수록곡 안경의 가사와 ‘안경’을 쓰게 된 가사 비하인드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얼마 전에 라식 수술을 하셨어요. 수술을 하고 나서 “잘 보이니까 좋아?”라고 물었는데 “아니, 안 좋아.”라고 하셨어요. “왜? 왜 안 좋아?”라고 물었는데 수술을 하기 전에는 세상이 살짝 뿌옇게 보였었대요. 약간 뿌옇게 보였지만, 수술을 하고 나서 모든 게 선명하게 들어오고 나니 세상이 생각했던 것 기대했던 것만큼 예쁘지가 않다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아, 그럴 수 있겠구나. 무조건 자세히 보고, 제대로 보고, 더 더 많이 보려고 하는 것보다 불편하더라도 좀 멀리 떼어놓고, 더 보려고 안달하지 않고, 그런 시야가 훨씬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태어난 곡이 ‘안경’입니다.

 

- 아이유 콘서트, ‘안경’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

 

 

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세상과 세상 속 사물들을 느끼는 사람의 시선은 여태껏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시야의 세계였다. 한 번은 하루 정도의 시간 동안 글자를 읽을 수 없었던 적이 있다. 버스에 내리는 순간 마주한 풍경이 어딘가 뿌옇다는 것을 바로 인지하고, 이상함을 감지했다. 하지만 일요일 오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서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월요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두려움을 안고 간 안과에서 들려준 이유는 심한 안구건조증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렌즈를 끼거나 라섹/라식 수술을 하는 사람들이 인공눈물을 달고 사는 이유도 이 안구건조증 때문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내가 영영 앞이 보이지 않게 될까 봐 겁먹었던 뿌연 세계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미 익숙한 세계였을 수도 있겠다. 나아가 나와는 달리 그 세계에 머무르기를 자처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흐릿한 세계가 궁금한 동시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르는 세계를 내 손으로 놓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시 교정을 위해 쓰기 시작했던 안경을 이제는 교정이 끝났음에도 놓아줄 수 없게 되었다. 너무 오랜 시간 함께 해서 더는 안경이 없는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이유도 있고(결국 안경이 내 본체야,라는 농담은 진실로 농담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셈이다), 안경을 통해 보이는 조금 더 또렷한 세계를 감각하는 일이 내게는 더 소중한 이유도 있다.

 

같이 있는 사람이 멀리서 오는 버스가 몇 번이냐고 물어볼 때 나서서 봐줄 수 있는 것,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들 각각의 움직임과 그들의 가진 결을 담을 수 있는 것, 그렇게 쌓여가는 작은 것들을 담은 사진첩의 두께를 늘려갈 수 있는 것은 분명 다섯 살부터 함께 해온 안경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 눈을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차용)

 

[크기변환]눈.jpg

 

 

1. 눈 오는 날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들

 

눈이 내리기 전의 흐릿한, 묽은 회색빛의 하늘. 어두운 계열의 겉옷을 껴입은 사람들의 어깨와 대다수의 까만 머리카락 위에 쌓이는 흰 눈. 눈이 펄펄 내리던 하늘에서 눈이 그치고 나면 거짓말처럼 새파래지고, 그 아래 새하얀 눈과 함께 세상이 푸르고 깨끗해 보이는 순간. 눈이 오지 않던 어느 겨울, 눈이 조금 내렸다던 곳으로 떠났던 여행과 그곳에서 만난 눈으로 덮인 언덕. 영화 <원더풀 라이프(Wonderful Life, 1998)>를 보고 나오는 길, 내리는 함박눈을 그대로 맞으며 오랫동안 친구와 걸었던 일. 느릿느릿 지나가는 차들의 소리에 서로의 말소리에 더욱 귀 기울여야 했던. 추워서 들어간 기억나지 않는 술집에서 마셨던 이름 모를 맥주와 그걸 다 마신 후에도 계속 내리던 눈에 잡히지 않던 택시.

 

 

2. 눈에 얽힌 가장 깨끗한 추억

 

수능이 끝난 뒤, 학교에 가면 어떤 것이 끝난 후의 나른함이 교실에 퍼져 있었다. 매일 같이 틀어주던 영화들, 그 영화를 보는 아이들과 구석에서 게임을 하는 아이들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 사람들을 어딘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던 그 해의 어느 눈 오는 날에는 겨우 등교했던 아이들이 등교 시간이 지나서도 올 수 없었던 아이들의 빈자리에도 불구하고 어수선하게 폭설로 인해 세상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어수선한 틈 사이로 빠져나가 빌렸던 만화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빌리러 나간 길. 늦게라도 등교하는 학생들과 반대 방향으로 교문을 향해 나가던 걸음이 눈에 푹푹 박혀서 발이 시려왔다. 사장님이 만화책들을 담아준 검정 비닐봉지를 품에 안고 이대로 들어가기는 아쉬워 근처 떡볶이집에서 따뜻한 떡들을 야무지게 깨물어 먹었다. 친구와 가게에서 나오니 더는 등교하는 학생들도 없던 등굣길을 올라가며

 

-이렇게도 눈이 올 수 있구나

-그러게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었던 그 날의 겨울까지는 눈으로 덮인 세상을 그저 낭만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3. 눈에 대한 최근의 단상들

 

눈이 그리워서 눈을 찾으러 떠났던 여행이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이미 지나간 지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올해 겨울의 마지막. '생각보다 내가 눈을 좋아하지 않을지도...'라는 생각을 했다.

 

자정이 지나고 사람들의 새해 인사가 핸드폰에 쌓여가던 어느 1월 1일 밤.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 아래 눈을 맞으며 누워 있었던 고양이를 보았다. 추운 겨울을 누구보다 혹독하게 보낼 아이들의 존재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처음으로 무력함을 느꼈던 그날. 이후로 눈이 내리면 왠지 눈이 내려도 마냥 행복하지 않을 대상들에 대해 생각한다. 눈이 내리면 눈을 피해 들어갈 곳을 찾아야 하는 길 위의 동물들 혹은 갈 곳을 잃은 사람들, 눈이 내리거나 눈이 내린 뒤 얼어있는 도로 위를 그 어느 때보다 조심하게 운전해야 할 사람들(특히 초보운전자들). 눈 덮인 깨끗한 세상을 동경하던 난 그 세상을 치우며 길을 만들고, 눈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당장 밤새 눈이 내린 다음 날 아침이면 눈을 쓸러 나가는 엄마와 눈을 치워도 미끄러울 도로 위를 운전해서 출근하는 아빠를 보며 눈은 더 이상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를 눈 덮인 세상으로 보내고 나서 나까지 집을 나오고는, 눈이 내려 연착되는 전철을 기다리며 연착으로 인해 곤란해질 사람들을 상상해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눈이 내려도 온전히 기쁘지 않을 때 들춰보는 시, 사이토 마리코의 시집 『단 하나의 눈송이』에 수록된 시 ‘눈보라’가 있다. 이 시에는 눈에 얽힌 깨끗한 기억을 되살리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어서 거대한 눈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할 때 꺼내어 읽는다. 이 시는 산문시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특히 두 번째 이야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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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마리코, '눈보라' 중 일부

 

*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당신의 눈과 당신에게 찾아오는 눈을 좋아하시는지.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눈이 좋지 않아서 안경을 써야 했고(어린 나이에 수술할 수 없어 안경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오랜 기간 쓰게 될지 몰랐다고 엄마는 종종 말씀하신다), 그 시간이 흘러가며 나의 눈마저도 미워하게 되었다. 남들이 안경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안경을 써야 하는 내 눈을 좋아하지 못했던 날들은 안경을 써야만 보이는 세계를 알고 나서 서서히 지워졌다.

 

반면에 내리는 눈을 마냥 순수하게 좋아했던 시절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막을 내리기도 했다. 하루하루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언제나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늘 그렇듯 의연한 모습을 상상하지만 어쩐지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겁이 많아지는 일이기도 한 것 같다. 그래도 매년 겨울에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모두 밖으로 나가서 귀여운 눈 오리를 만들거나, 눈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들-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을 만들어 낸다. 그 덕에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눈으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지레 겁먹지 말자고 다짐한다.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는 눈의 속성 대신,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눈의 속성에 대해 더 오래 생각한다.

 

눈과 눈에 대해 올해 한 가지씩의 목표가 있다면 다음과 같다.

1. 눈 : 안경을 방어막 삼아 모든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그들의 눈동자를 관찰해보기.

2. 눈[눈:] : 누군가를 행복해지게 만들어줄 수 있는 눈사람 만들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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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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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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