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애린 왕자 [도서/문학]

<어린 왕자>의 경상도 사투리 버전
글 입력 2021.05.16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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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왕자가 무슨 뜻이야? 아프다라는 뜻인가? 싶었지만 '애리다'는 '어리다'의 경상도 방언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주야장천 읽어왔던 바로 그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그가 사투리를 장착하고 나타났다.

 

옛날부터 번역체 덕후일 정도로 고전문학을 많이 읽고 사투리라곤 전라도 밖에 모르는 내가 경상도 사투리를 읽을 수 있을까 싶었다. 사투리를 쓰는 어린 왕자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 지 걱정하며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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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박한 표지를 가진 책만큼이나 사투리는 투박했다. 난생처음 보는 단어들이 줄을 이었다. ‘마카다’, ‘이바구’, ‘미구’ 등. ‘마카다’는 ‘전부’라는 의미였고 ‘이바구’는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문맥으로 어렵사리 단어를 맞춰가며 읽는 데 그 재미가 꽤나 쏠쏠했다. 이런 단어가 있었다니?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새로운 단어를 알아가는 건 보물창고에 보물을 쌓는 기분이였다. 이미 알고 있는 식상한 표현을 신선하게 쓰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에는 명언이 많다. <애린 왕자>에서는 그 명언들을 새롭게 들을 수 있었다.

 

*

 

특히 어린 왕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왕자와 여우의 이야기다. 애린 왕자에서는 여우를 ‘미구’라고 부른다. 미구는 여우의 경상도 방언이다.

 

미구는 왕자에게 자신을 ‘질들여달라’고 한다. ‘질들인다’는 ‘관계를 맺는다’라는 뜻이다. 관계를 맺으면 서로가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것은 마치 빵을 좋아하지 않는 미구가 밀을 볼 때 금색 머리를 가진 왕자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그 밀밭에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처음엔 멀찍이 떨어져서 조금씩 가까이 앉아야 한다. 말은 해선 안된다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미구는 애린 왕자에게 같은 시간에 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한다.

 

“예를 들모, 오후 4시에 니가 온다카믄 나는 3시부터 행복할끼라”

 

특별할 것 없던 일상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의미가 생긴다는 일화. 나는 이제 그전의 대사가 기억나지 않았다. 사투리로 이야기 한 이 말이 내겐 더 와닿고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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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왕자에게 장미가 소중했던 이유는 수많은 장미 중 애린 왕자가 정성을 쏟은 장미는 그 장미 하나뿐이였기 때문이다. 정성을 쏟았던 그 시간은 지워지지 않고 관계는 영원히 남는다.

 

미구가 밀밭 색깔을 얻은 것처럼. 미구는 애린 왕자와의 작별에 이렇게 이바구했다.

 

 

“중요한 기는 눈에 비지 않는다쿠네.”

 

“그니까 니는 잊으모 안된데이. 니가 질들인 거에 니는 끝까지 책임이 있으이. 니는 니 장미한테 책임이 있는기라…”

 

 

우리는 관계를 끝내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해서 슬퍼한다. 그러나 관계에 쏟았던 정성과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인생 곳곳에 흔적으로 남는다. 미구는 보여지는 관계보다 그 흔적들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질들인 것에 대한 책임. 관계의 소중함을 애린 왕자는 깨닫는다.

 

애린 왕자는 이제 아재를 질들인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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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가 밤하늘을 바라보모, 내가 그 별 중에 어느 별에 살고 있고, 내가 그 별들 중에 어느 별에서 웃고 있을 테이까, 아재는 별이 마카 웃고 있는 기로 보일 기야. 아재는 웃을 줄 아는 별을 가지는 기지!”
 

 

애린 왕자는 미구에게 밀밭을 준 것처럼 아재에게 별을 주고 떠난다.

 

*

 

어렸을 때 읽은 <어린 왕자>는 조금 어른스러운 아이처럼 느껴졌다. 번역체의 딱딱한 말투가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애린 왕자>의 왕자는 정말 천방지축 어린애로 느껴졌다. 투박하고 어린 단어를 사용하는 어린아이.

 

갱상도 사투리라 마냥 어렵게만 느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새로운 단어들을 많이 알아가는 것 같아 재밌고 흥미로웠다. 뜻을 알지 못해도 술술 읽히는 건 우리의 언어로 쓰였기 때문일까. 사투리의 매력을 한 번 더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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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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