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인을 적신 화가 [문학]

글 입력 2021.05.13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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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바로 김춘수의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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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춘수

 

 

그의 작품 세계는 섬세한 시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김춘수의 시적 세계를 흥건히 적셔 놓은 인물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 <꽃>의 명성에 비해 덜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화백 이중섭이다.

 

김춘수는 9편의 연작시를 통해 화백 이중섭에 대해 노래했다. 그의 연작시에는 '이중섭의 평전을 읽고'라는 부제가 붙어 있기도 하다. 즉, 그는 이중섭 화백과 개인적인 교류 이전에 평전만을 읽고 이미 그의 존재에 크게 매료되었던 것이다. 시인 김춘수가 목도한 이중섭은 역사가 기록한 그와는 주안점이 다르다. 과연 이중섭의 어떤 점이 김춘수의 시적 자아를 건들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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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화백

 

 

필자는 이중섭이 지닌 '서사성'에 집중했다고 판단했다. 시에서 드러나는 서사성은 분명 소설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서사의 가장 큰 특징은 '개방성'이다. 즉, 누구든지 서사에 빠져들과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서사의 개념에 대해 좀 더 논해보자.

 

루이스 캐럴의 소설이 ‘골방의 앨리스’가 아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앨리스가 흰 토끼를 보고 궁금증을 느껴 끝내 행동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서사의 태동을 위해서 주인공은 무릇 모험을 떠나야 한다고 했는데, 이와도 맥락상통하는 얘기이다.

 

김춘수는 마치 앨리스처럼, 흰 토끼인 이중섭의 서사에 이끌려 시적인 모험을 시작했을 것이다. 이 기저에 놓인 것은 단순히 호기심일 수도, 그보다 깊은 차원의 유대와 사회적 자본일 수도, 흔히 ‘뮤즈’라고 일컬어지는 영감의 한 축일 수도 있겠다.

 

 

내가 만난 이중섭

-김춘수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어쨌거나 김춘수가 시에 담은 이중섭의 서사는 역사가 기록한 ‘가난하고 불행한 화가’이기 이전에, ‘머리에 바다를 인’, 아내와의 일상을 그리워하는 하나의 인간을 중심으로 형상화된다. 화백으로서의 예술가적 면모 보다는 이중섭이라는 인간 자체와 그가 아내와 이룬 관계성에 대한 집중은 매우 독특한 주안점이다. 시인 김춘수를 앨리스로서 일으키게 하는 원천은 그 불가피한 인간성에 대한 묘사 욕구에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필시 그의 작품과 그림을 잠시 차치한 이중섭의 이야기성 자체에 매료된 듯 하다.

 

김춘수가 이중섭의 이상한 나라에 빠져 뱉어낸 연작시는 텍스트의 형태로 곧 현재의 우리에게까지 닿는다. 시에 담긴 이중섭의 이야기는 여타 서사들과 같이 활짝 열린 특성을 지닌다. 이는 이중섭과 김춘수라는, 개인과 개인 사이에 형성된 시적인 형상을 초월해 현재를 사는 또 다른 서사적 인간들과 맞닿는다. 개인의 이야기는 곧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시를 읽는 누군가는 이중섭이라는 실존 인물 자체에 집중하다가도, 화가로서의 거대한 세계를 배제한 이중섭의 모습으로부터 ‘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 곧이어 스스로를 김춘수의 위치에 두고, 나에게 있어 이중섭과 같은 인물은 누구일지 생각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과정은 곧 이 거대 서사에 또 다른 인물을 끌어들이는 셈이다. 그렇게 김춘수가 형상화한 이중섭의 서사는 그 몸짓을 자꾸만 불려간다. 시간과 공간을 먹고 자란 서사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수많은 서사적 인간들의 머리 위 바다는 곧 대양(大洋)을 이룬다.

 

 

이중섭 3

- 김춘수

바람아 불어라,

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남쪽으로 쓸리는

끝없는 갈대밭과 강아지풀과

바람에 네가 있을 뿐

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아내가 두고 간

부러진 두 팔과 멍든 발톱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가도 가도 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바람아 불어라,

 

 

김춘수의 연작시는 이중섭의 작품처럼 회화적인 특징을 지닌다. 외부의 풍경과 오브제를 그렸던 이중섭의 내면을 그려준 김춘수의 시도는 분명 인상적이다. 그가 그린 것은 이중섭의 수많은 페르소나 중에서도 외로운 인간으로서의 모습일 것이다. 이중섭 연작시의 공통된 특징은 서사성을 극대화하는 구체적 지명의 등장이다.

 

특히 ‘서귀포’, ‘광복동’, ‘남포동’ 등의 지명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모두 인간 이중섭으로서의 고독과 서글픔이 묻은 자리이다. 또한 서사가 태동하기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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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이 이고 있었을 서귀포의 바다

 

 

자주 등장하는 시어는 ‘바다’와 ‘바람’인데, 연작 중 이중섭 3의 시구를 살펴보자. ‘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아내가 두고 간/부러진 두 팔과 멍든 발톱과/바람아 네가 있을뿐.’의 구절은 특히 인상적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김춘수는 ‘바다’라는 시어의 긍정성을 드러내는데, 이중섭 연작에서의 바다란 그 이면 역시 드러내는 듯 하다. 생명력의 이면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 생명의 잉태가 활발한 만큼, 이들의 수많은 죽음 역시 내제하고 있는 것이 바다인 것이다.

 

이중섭의 서사는 생명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터, 즉 바다가 부재한 공간인 서귀포에서 시작되고 또 끝난다. 바다 대신 바람이 존재한다. ‘바람’은 어떤 물질의 흔들림으로 밖에는 증명될 수 없는 비가시적인 자연 현상이다. 그래서 자꾸만 외롭다. 이중섭의 마음에는 물 한 자락 없이 메마른 서귀포 땅이 있고,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트리는 바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보이진 않는 것들이 자꾸만 마음을 시리게 하는 것이다.

 

서사의 힘은 그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음으로부터 기인한다. 크고 작은 서사를 형성하고 공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창작이나 소비의 역할을 맡아 되고 모두를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누군가의 개인적 서사가 특정 장르를 통해 가시화되고 공유되는 것은 분명 예술이 낳을 수 있는 기적이다. 김춘수의 이중섭 연작시에서 나는 또 다른 기적을 목도할 수 있었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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