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구원 서사는 없다 [문화 전반]

나를 구하는 것은 나일 뿐
글 입력 2021.04.22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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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서사를 좋아했다. 누군가의 구원이 되는 게 퍽 낭만스럽다 여겼다. 아픔을 가지고 상처를 앓는 이들끼리 서로를 보듬는 것이 사랑 같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었다. 구원 서사는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등장했고,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비극에 처한 주인공을 멋지게 구해내는 상대역. 우리는 거기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래서 나는 구원 서사를 좋아했다.


구원. 국어사전에서는 이를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 구원은 종종 사랑의 이유로 등장한다. 예전부터 그랬다. <인어공주>의 왕자는 자신을 바다에서 구해준 이에게 사랑을 느끼고, 프시케는 자신을 구해준 에로스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 서사는 현대에도 이어져 구원 서사라는 이름을 가졌다.


고난은 어디에나 있었다. 상처를 받은 사람도 너무 많았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무참히 짓밟히면서도 동시에 누군가를 짓밟았다. 우습게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도 사람이었다. 혼란스러운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향한 구원은 작은 인류애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나 구원 서사에 매달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구원 서사는 없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소피



구원 서사_소피하울.jpg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군중 속의 고독은 언제나 무거운 법이다. 지브리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랑 하울은 군중 속의 고독을 씹는 사람들이었다. 복작복작한 마을 모자 가게의 소피는 많은 직원과 함께 하면서도 혼자였고, 하울은 혼자인 게 외로워서 여러 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소피는 언제나 외로운 사람이었다. 새엄마는 항상 바빴고, 하나뿐인 여동생도 언제나 바쁘게 일했다. 소피의 곁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모자들밖에 없었다. 한 번도 자신의 의견을 소리 내어 말한 적도 없었고, 언제나 조용히 그 자리를 지켰다. 그랬던 소피가 마녀의 저주로 할머니로 변하게 되고, 소피는 자꾸만 곤경에 처하게 된다. 하울도 마음 한구석이 결핍된 사람이었다. 강력한 마법사지만 하울은 자주 방황했고, 가치관의 충돌을 겪었으며 그럴 때면 몸도 마음도 아프곤 했다.


어딘가 결여된 두 사람의 관계가 매끄러울 리 없었다. 움직이는 성 안에서 소피와 하울 사이에는 종종 의견의 충돌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면서도 서서히 두 사람은 변해갔다. 제 의견을 낸 적 없던 소피는 할머니의 외관이라는 감투 아래 제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언제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제 감정을 숨기기 급급했던 철없는 하울은 점점 솔직한 감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끝내 두 사람은 서로를 옭아매던 족쇄를 벗어던졌다. 소피는 하울을 만나 그를 향한 마음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조차 들여다보지 않았던 자신의 의지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본 모습으로 돌아갔다. 위험에 빠졌던 하울은 소피의 노력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구원은 서로에게서 기인했을까?


아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은 건 소피 스스로였다. 자신의 머리를 잘라내 캘시퍼에게 준 것도 소피 자신이었다. 모든 결정은 소피에 의한 것이었고 그 주체 역시 소피 스스로였다. 하울도 마찬가지다. 설리반에게 겁먹었던 과거의 자신을 이겨낸 건 하울이다. 캘시퍼를 삼키기로 결정한 것도, 다시 움직이는 성을 움직이기로 한 것도 전부 하울의 선택이었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그들은 변화했다. 그 주체적인 변화가 주변을 바꿨고,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의 본질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했다.

 

 


그날 죽은 나는; 양이영


 

구원 서사_그죽나.jpg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녀들은 위태로웠다. S의 문자 아래 모인 ‘우리’는 그래서 더 빠르게 무너졌다. 네이버 웹툰 <그날 죽은 나는>의 주인공 양이영 역시 그 중 하나였다.


S는 서서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사람을 집어삼켰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가 자신이 익어가는 줄도 모른 채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그렇게. 이영이는 마치 개구리처럼 S가 자신을 좀먹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세상이 점점 붕괴되는 걸 속수무책으로 받아내고만 있던 이영이는 어느 순간 도피처를 찾았다. 그곳에서 트인 숨통으로 간신히 숨을 쉬며, 이영이는 조금씩 제 세상을 재건해나갔다. 그 도피처에는 향조가 있었다. 향조는 이영이에게 여러 조언을 해줬고, 그 조언은 이영이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물했다.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분명한 건, 이영이는 성장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상황을 타개할 줄 아는 용기가 생겼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더 이상 묵인하지 않게 되었다. 그건 모두 향조의 조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무너지던 세상에서 이영이를 구원한 건 향조인가?


향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본 모습은 사실 네 안에 있는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 말에 이영이는 다른 사람이 가진 장점들을 발견하게 된 건 다름 아닌 그 점이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항상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던 이영이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처음으로 당당한 목소리를 낸다. 이건 이영이가 스스로 해낸 일이다.


이영이는 향조의 말을 듣고도 변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여태처럼 좌절하며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 머무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영이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바꿨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을 바꾸는 일은 스스로밖에 할 수 없다. 향조가 아닌 이영이가. 스스로를 구했다.


누군가에 의해 흥망의 여부가 갈리는 게 아니다. 도움의 손길을 잡거나, 잡지 않거나 선택은 각자의 몫이었다. 이 웹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결과를 얻는다. 그래서 <그날 죽은 나는>은 구원 서사가 아니다. 그들을 구한 건 타인에 의한 구원이 아니었다.

 

 


미스터 션샤인; 고애신


 

구원 서사_고애신.jpg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무언가를 뜨겁게 열망한 사람들이 있었다. 목표의 시작과 방향은 달랐어도 같은 결말을 원했던 사람들이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구동매, 김희성이 그랬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과 함께 고애신의 안위를 바랐다.


고애신은 유진과의 위장결혼을 통해서 의병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유진의 신분과 지위를 이용해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김희성 역시 고애신의 의병 활동을 물심양면 도왔고, 구동매는 고애신의 안전을 위해 여론을 조성했다. 그 도움의 결과로 고애신은 생채기가 날지언정, 부서지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


끝내 고애신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건 유진이나 구동매, 김희성이 그를 구해서만이 아니었다. 고애신은 매일 스스로를 위해 신문을 읽었고, 총 쏘는 법을 배웠으며, 학문을 익혔다. 그로 인해 의병 활동에서 작전에 투입되면서 고애신은 자신의 목표에 스스로 가까워져 갔다. 고애신은 가만히 앉아 누군가의 구원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애신이 온전히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성장한 것은 아니었다. 주변 인물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고애신은 더욱 큰 꿈을 꿀 수 있었고, 목표에 다가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길을 선택한 건 고애신이었다. 양반가의 손녀라는 편한 지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길을 선택한 건 고애신 자신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건 고애신이었다. 고애신이 그렇지 못했다면, 스스로 단단하게 일어서지 못했다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역시 무용지물이었을 테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고애신은 스스로를 불꽃이라 칭했다. 불꽃은 연소되기 위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고애신이라는 불꽃이 타오르기 위해 유진, 구동매, 김희성이라는 조건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온전히 타오르는 건 불꽃 그 자체다. 고애신은 스스로를 태워 뜨겁게 타오른 불꽃으로 살았다.

 

 

 

방아쇠를 당기는 건 나 자신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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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꼭 필요하다.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꼭 타인의 손으로 이루어야 하는 법은 없다. 타인에 의한 극복은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다. 언제까지고 누군가 나서서 나를 구해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세상의 풍파가 너무나도 불규칙적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해야 한다.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기꺼이 총을 장전해 내어줄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 총은 상황을 타개할 결정적인 한 발을 발사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방아쇠를 당기는 건 스스로밖에 할 수가 없다. 방아쇠를 당기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선택이니까.


그래서 더 이상 타인에 의한 구원 서사는 없다.

나는 나 자신만이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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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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