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 판은 거지들이 깨뜨린다! - 창작연희극 '딴소리 판'

광대 거지들의 유쾌한 유랑
글 입력 2021.04.07 15:1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고전 판소리의 판을 깨다, 연희집단 ‘The 광대’


 

포스터_딴소리판.jpg

 

 

<딴소리 판>. 이름조차 생소한 이 제목은 무엇인가. 판소리도 아니고 딴소리라니? 감상 후기를 쓰기에 앞서 연희집단 The 광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야겠다.

 

 

공연사진_5.jpg

 

 

연희집단 The 광대는 2006년 창단된 연희극 창작단체이다. 풍물, 탈춤, 무속, 남사당놀이 등 한국의 전통예술을 전공한 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딴소리 판>, <연희 땡쇼>, <당골포차>, <도는 놈 뛰는 놈 나는 놈> 등이 그들의 대표작품이다. 다양한 창작 공연을 통해 국내 유수의 극장과 축제에서 활동을 펼쳐왔으며, 다수의 해외 초청 공연으로 국내외에 한국의 멋을 널리 알려왔다.

 

전통연희란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공연 예술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는 탈놀이, 꼭두각시놀음, 판소리, 남사당놀이 따위가 있다. 연희집단 The 광대는 연주와 춤, 재담 등 전통연희의 각 분야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단원들이 모여 수준 높은 창작 연희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단원 개개인이 연희의 명인으로 성장하는 동시에 시대와 함께 가는 예술가로서 광대의 모습을 만들어나간다.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던 옛 광대들의 예술과 삶의 자취를 기억하며 그 길을 이어가고자 한다.

 

 

 

거지, 거지, 그런 거지, 인생사 다 그런 거지


 

공연사진_1.jpg

 

 

춘향가의 한 대목을 부르는 소리꾼의 판에 광대거지들이 난입하면서 극의 포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동안의 춘향가와는 전개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이몽룡은 ‘암행어사’가 아니라 ‘아맹거사’,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이며 춘향에게 사랑 구걸이 아닌 밥 구걸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춘향은 거지꼴로 등장한 몽룡의 곡절이라도 들어보고자 하니, 광대거지들이 딴소리 판을 펼치기 시작한다. 이것을 시작으로 시놉시스는 총 6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거지들은 춘향전의 뒤를 이어 차례로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의 판을 깬다. 이어서 다시, 춘향전의 판을 깬다. 전국맹인대회가 벌어진 황궁에 맹인으로 위장한 거지들이 잔치에 몰려들어 효도의 부질없음을 논하면서 깽판을 놓고,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조조의 군사 앞에, 입대하면 밥을 준다는 이야기에 거지들은 조조군이 될 것을 약속한다. 그들은 적장인 제갈공명을 만나게 되고, 대의와 명분을 부르짖는 상대에게 거지들의 엉망진법을 가르친다.

 

수궁의 축성을 축하하는 잔치에는 간이 상한 용왕의 상태를 살피는 자라를 꾀어 가짜 약을 팔기 시작하고, 대박을 꿈꾸며 박을 타던 흥보 앞에 나타난 거지들은, 소원을 이뤄주지 않고 듣기만 한다. 그렇게 마지막 장. 다시, 거지 떼의 딴소리 사연을 다 들은 춘향은 몽룡과의 해후를 택하는 대신 자신의 길을 택하고, 몽룡과 광대거지들은 역시 제 갈 길을 향한다.

 

분명 내가 아는 판소리의 다섯 마당인데, 많은 차이점이 있었다. 오래전에 읽은 고전 이야기들이라 기억이 왜곡되었나 싶었다. 모든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각 마당의 하이라이트 부분에 거지들이 등장하여 내용을 새롭게 각색한다. 전통적인 극의 내용에 중심을 둔다기보다,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해석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언제나 거지들이다. 현대 사회를 대변하는 풍자와 해학, 신선한 반전의 사실들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거지들이 각 마당의 판도를 바꾸는 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것일 것이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다. 지갑도 없고, 염치도 없고, 내일도 없다. 그렇기에 자유롭고, 뒷일을 걱정하지 않으며 오늘만을 살 수가 있다. 거창한 벼슬자리를 바라지도, 금전적인 혜택을 바라지도 않는 그들은 단지 오늘의 식사가 가장 중요할 뿐이다.

 

서민들의 기쁨과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던 옛 광대의 삶을 닮아가고자 하는 The 광대의 신념이 드러난다. 판소리의 각 마당이 끝날 때마다, 장단을 만들어내는 고수는 사회를 풍자하는 말들을 한마디씩 던진다.

 

 

 

전통적인 통념에서 벗어나다


  

거지들이 주인공이 되는 퓨전 판소리인만큼, 현시대가 추구하는 가치들에 초점을 맞추고 재해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춘향가에서 춘향이는 그래도 세상 구경을 좀 더 해야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한 사람을 위하고 지지해왔던 여성의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난다.

 

심청가에서 거지들은 ‘효도는 각자 할 수 있을 만큼 알아서’ 하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효 문화와 도덕 윤리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희생적인 모습을 강요한다기보다는 개인의 여건에 맞게 하라며 가볍게 화두를 던진다. 이후 거지들은 삶을 즐길 뿐이다.

 

흥보가에서는 우리가 아는 전래소설과는 다르게, 욕심이 없다고 생각한 흥보가 대단한 무언가를 바라며 박을 타고 있었다는 게 신선했다. 또한, 흥보는 극 중의 놀부와 대비되는 선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흥보에게도 광대거지들이 나타나며 소원을 ‘듣기’만 해주고 밥을 달라고 한다.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은 이뤄주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들어준다는 것이다. 흥보가는 권선징악의 대표적인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지만, 현실에서는 박을 탔을 때 부자가 될 재물들이 쏟아지지 않는 것이 당연한 사실이다. 극에서는 흥보가를 비틀어, 흥보의 자식들도 유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언급한다.

 

극 중 인물들은 이러한 설정 속에서 훗날 어떠한 성과를 얻기를 기대하기보단, 현재를 살아가고, 개인의 삶에 집중하게 된다. 어쩌면 사회 속 배제된 거지들의 목소리는 현재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콘텐츠인 ‘밈’이라고 불리는 것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개인이 재가공한 디지털 콘텐츠인 ‘밈’은 수많은 문화 콘텐츠를 양산하고, ‘풍자와 해학의 민족’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사회 구축을 재단하고 있는 그것들을 보며 우리에게 특별히 위안이 되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사진이나 동영상 하나로 유쾌하게 웃으며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성 역할에서 벗어나고 효 문화의 통념을 깨며, 현대적 풍자와 패러디를 통해 현시대의 문제점을 꼬집는 장면들이 통쾌했다.

 

 

 

과거 세대와 현대 세대를 잇는 다리


 

공연사진_4.jpg

 

 

극을 보면서 부모님도 아주 좋아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판소리, 탈춤, 사물놀이... 생각해보니 그 어떤 배경음악 없이, 목소리와 장단을 맞추는 소리로 공연장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꼿꼿하고 딴딴한 목소리로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소리꾼’의 소리, 소리북(장구)과 함께 장단을 맞춰가는 ‘고수’의 역할이 누구보다도 드러났다. 동시대적으로 가볍게 풀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우리나라의 유산을 향유 하며 모두가 공감하는 사실로 세대와 세대를 잇는 합의점을 만들어낸 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시대와 함께 가는 예술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연희집단 The 광대의 행보를 앞으로도 기대하는 바이다.

 

 

 

박세나.jpg

 

 

[박세나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5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