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젠더 프리(Gender-Free)의 힘, 자유로움과 강렬함 [문화 전반]

글 입력 2021.03.14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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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는 것이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제자는 나지막히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영화 <달콤한 인생> 中

 

 

영화 <달콤한 인생> 속 이병헌 배우의 대사다. 같은 대사를 박규영 배우가 연기한다면 어떤 느낌일까? 상상해 본 적 있는가?

 


 

'마리끌레르 젠더 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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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끌레르 젠더 프리 2021 영상 캡쳐본

 

 

3월 5일, 유튜브 채널 Marie Claire Korea (마리끌레르 코리아)에 ‘8인의 여성 배우들이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하다. 마리클레르 젠더 프리 2021’ 라는 제목으로 한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


마리끌레르의 젠더 프리(Gender-free)는 2018년부터 매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지속적으로 선보이고 있는 기획 영상으로, 8인의 여성 배우들이 각자의 스타일대로 영화 속 남성 캐릭터를 연기한다. 올해는 고민시, 김신록, 김향기, 박규영, 박주현, 백은혜, 엄지원 그리고 최수영 배우가 참여하였다.


해당 영상의 설명 글을 보면 ‘젠더 프리’의 개념 및 기획 영상의 목적이 쉽게 다가올 것이다.

 

 
“텍스트에는 성별의 구분이 없고 지금껏 우리도 모르게 남성이 연기하는 영화 속 인물에 익숙해졌을 뿐이죠. 8명의 배우가 젠더로부터 자유롭게 영화 속 남성 캐릭터의 대사를 연기했습니다. 이토록 뜨거운 열정을 가진 배우들이 더 많은 작품에서 더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기를 마리끌레르가 응원합니다.”
 

  

즉, 젠더 프리(Gender-free)란, 성에 의한 제약이나 차별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 공연계에서는 실력만 있다면 성별에 관계없이 역할을 맡기는 일명 ‘젠더 프리 캐스팅’이 활발히 진행 중이며 올해의 트랜드로 떠오른 상황이다.

 

 

 

'마리끌레르 젠더 프리 2021'에서 볼 수 있는 것


 

영상을 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점들이 있다.

 

첫째, 배우들의 연기력이다. 8명의 여성 배우들은 ‘젠더 프리’라는 기획 아래 각자만의 이유로 영화 속 남성 캐릭터 및 대사를 직접 선정하여 독백 연기를 펼친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영상 속 작품의 내용이나 캐릭터를 다 알지는 못한다. 모르는 대사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각 8명 배우마다 불과 몇 초 동안의 아주 짧은 독백 연기가 흥미롭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각자의 스타일대로 다르게 내뱉는 대사의 호흡 때문이다.

 

남성만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대사를 배우들이 각자의 스타일에 맞게 소화를 함으로써 영상을 보는 시청자들은 찰나의 순간 홀린 듯 분위기에 압도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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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끌레르 젠더 프리 영상 캡처

 

 

둘째, 영상의 연출 방식이다. 영상 속에는 어떤 소품 장치도, 음악도, 색감도 없다. 보이는 것은 흑백 화면 속 여성 배우이며, 들리는 것은 그가 내뱉는 대사 뿐이다. 아무 색감 없는 흑백 연출과 백색소음만 가득한 독백 연기가 주는 효과는 확실하다. 바로 ‘몰입도’이다.

 

흑백으로 인해 배우의 메이크업 컬러가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대사에 따라 달라지는 목소리 높낮이, 대사의 호흡, 찡그리는 표정, 감정에 따른 미세한 눈동자의 흔들림, 자유롭게 움직이는 디테일한 동작까지 배우가 연기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에 몰입하게 된다.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돋보여야 할 것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여성도, 엄마도, 누나도 없다. 오로지 연기하는 사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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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끌레르 젠더 프리 영상 캡처

 

 

배우들의 고유한 개성, 매력은 흑백 연출의 독백 연기로 인해 한껏 극대화 되어 표현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기에 있어서 성별의 차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금 누구보다 자유롭고 뜨겁게 연기하고 있음을 온몸을 다해 표현하고 있다. 적어도 이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배우들의 강렬한 독백 연기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통해 단번에 체감할 수 있다.

 

동시에 궁금해졌다. 왜 이런 멋진 배우들에게 이제껏 더 다양한 캐릭터의 배역이 주어지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 그리고 이번 기회로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된 배우를 더 알고 싶게 만드는 호기심이 생겼다. 젠더 프리는 이러한 궁금증,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마리클레르 젠더 프리’가 전하는 메시지


 

2018년부터 매해마다 업로드 되는 ‘마리끌레르 젠더 프리’ 영상 설명 글에서는 하나의 공통적인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젠더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며, 성별을 떠나 실력으로 평가받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이는 젠더 프리의 핵심이다.

 

젠더 프리 영상 기획자가 올해 인터뷰를 통해서 기획 의도에 대해 밝힌 바가 있다.

 

 
"처음 젠더 프리 기획을 시작했을 때는 한국 영화가 유독 남성 캐릭터 중심이라는 데 대한 아쉬움이 컸으며 보다 많은 여성 배우가 작품에 등장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보다 많은 여자의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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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끌레르의 젠더 프리’는 그저 성별이 전복된 역할의 연기가 전해 주는 짜릿함, 통쾌함, 흥분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보다 많은 여성 배우가 작품에서 각자의 서사를 풍부하게 쌓으며 존재하기를, 그리고 더 다양한 여자의 이야기가 펼쳐 지기를 기대하는 마음과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갈증과 갈구, 갈망이 충분히 풀어지기를 응원하는 마음까지 내포되어 있다.

 

해당 영상을 통해 비슷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앞으로도 더 관심을 가지고, 표현하고, 응원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향력이 큰 미디어계에서 좋은 시도를 해낸 만큼 ‘마리끌레르 젠더 프리 시리즈’가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인터뷰 내용 중 인상적이었던 고민시 배우의 말로 글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

 

 
"등장하는 인물들을 성별로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는 남성이어도 약할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용기가 부족할 수 있다. 여성도 마찬가지로 용기가 부족한 사람도 있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다양한 모습이 있듯, 여성 배우들이 성별에서 자유롭게 존재하고 더 입체적이고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는 작품, 그래서 문화 예술계에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들고 강렬하고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작품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신송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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