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 노트 Sigak] 별책. 미술을 말하는 나의 언어에 대한 고찰

제가 미술을 ‘경험한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는요...
글 입력 2021.02.02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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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사람이 마주하는 순간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전시회를 보러 갔어요”,  “작품을 감상했어요” 정도가 가장 익숙한 것 같다.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로 시작하냐면, “전시회에서 무엇인가를 경험했어요”, “작품을 만나러 갔어요”라고 돌려 표현하는, 혹은 진짜 그렇다는 듯이 말하는 내게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미술을 이야기하는 나의 특정한 언어에 대한 관심에서 이 별책을 쓰게 되었다.

 

 


 

 

“흠.... 아직 이도 저도 아닌 거 같으니까,

적어도 경험하는 게 아닐까.”

 

 

처음 미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이런저런 전시회를 찾아다녔었다. 작품을 보고 있자면 뭔가 느껴지고 떠오르는 것 같은데, 나 스스로 이것이 무엇인지 쉽게 확신하지 못했다. “내가 정말 이걸 느끼고 있는 게 맞는 건가?”라는 의문이었다. 이 질문은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정말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가?”와 “이 작품을 이렇게 느끼는 게 맞는 건가?”로 말이다.


“나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있어”라고 말하기 민망스러울 정도로 막연한 상태의 연속이었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다른 예술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감상한다’라고 표현했었는데, 미술은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모습보다는 저마다의 이유로 난해하게 존재하는 예술이기 때문이었을까. 단번에 이해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는 듯한 미술 앞에서 무엇 하나 쉽게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정말 ‘감상’이란 걸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난해해도 서로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미술 작품들은 분명 새로웠고, 비록 말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일상과는 다른 순간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확실했다. 순간, 그러니까 순간은...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이때부터 막연한 마음으로 ‘경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한편 현대미술을 다루는 친절한 책들을 읽으면서 내가 작품 앞에서 느낀 막연한 것들도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걸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저 느끼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것이다*. 현대미술에 애증의 시선을 두고 있던 내게 이 앎은 작은 용기가 되어주었다. 미술의 난해함을 무작정 이해해야 한다는 부담을 살짝 덜어내고, 내게 시선을 돌려 내 느낌에 대한 이유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은 바로 도서 『느낌의 미술관』(저자 조경진)이다. 내게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작점과 관점을 선사한 책 중 한 권이다. 미술 관련 도서 중 일종의 인생책이랄까.

 

스스로도 명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에 대한 이유를 찾는다는 건 연기를 만지는 기분 같은 것이었다. 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하지만 아마 그때의 나는 큰 고민이나 별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아주 느리게,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채 조금씩 이 과정이 이뤄졌던 것 같다.


“인식하지 못한 채 이유를 찾는 과정을 가졌다고?” 싶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단순한 것이 그럴 수 있게 했다. 바로 관심과 호기심이다. 그때의 나는 그저 계속 궁금해하고, 찾아가 보고, 읽어보고, 엉뚱한 질문까지 해 대며 고민해 봤다. 그야말로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것은 일종의 ‘미술을 좋아하는 나만의 관심’(너무 거창한 표현인 것 같지만...)이란 것을 만들게 했다. 나는 이 과정을 ‘나’라는 사람 자체가 겪는 성장의 한 축으로 생각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이유로도 예술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그저 “내 느낌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했었다. 작품의 이론적인 의미를 살펴보는 만큼 나를 살펴보는 것이 미술과 사유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면서 미술 작품도 결국 나와 같은 사람인 예술가가 자신의 목적과 사유를 통해 창작한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으로 작품에 내포된 의미를 떠올려 보고, 그 앞에서 그런 것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나에게 질문해본다. 거기에 작품과 예술가에 대한 내용, 기획자의 의도... 등등을 조금씩 더해간다.


그렇게 미술 작품 앞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경험’이라 부르는 것이 일방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오가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작품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관점, 이야기가 만나는 것. 나는 이것이 ‘대화’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작품을 ‘만난다’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면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단지 주체와 객체의 문제가 아닌, 주체와 주체의 만남이 작품과 사람의 만남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술을 ‘경험’하고 ‘만난다’라는 표현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내 입과 손가락에 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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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이제 관람객에게 ‘보는 것’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보고, 관찰하고, 느끼고, 사유하고, 참여하고, 휴식하고, 뒹굴고, 즐기고, 배회하고, 상호작용하고, 먹고, 만지고, 듣는 일까지... 사실상 살아가며 순간을 음미하는 모든 행위가 미술이란 예술을 통해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비대면이 화두인 중에도 여전히 ‘현장성’이 중요한 가치로 회자되는 만큼, 직접 작품을 마주하는 경험은 여전히 미술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서 오가는 크고 작은 상호작용, 내 표현대로라면 일종의 ‘만남’과 ‘대화’가 작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사람이 존재하며 겪는 더 다양한 순간과 상황을 포함하는 듯한 ‘경험하다’라는 표현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가령 ‘보다’는 눈에서 나오는 일직선의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면, ‘경험하다’는 그 순간에 저마다의 형태로 온몸을 담그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같다. 그래서 ‘경험하다’라는 말에 더 마음이 간다. 이렇게 말한다면 ‘경험하다’는 지극히 주관적으로 선택된 언어일 수도 있겠다.


한편 인간의 경험은 꼭 특정한 공간에서 외부로부터 직접 자극을 받는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닌 것 같다. 내면에서 조용히, 때론 강렬하게 일어나는 공명의 경험 역시 존재한다. 마치 내가 루이즈 부르주아라는 예술가로부터 큰 감동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루이즈 부르주아는 내 내면에 오롯이 기억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녀의 작품을 직접 본 적은 없다. 내 마음을 동하게 한 건 예술을 해야만 했던 그녀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작품을 끄적이던 나는, 그런 모습의 예술을 해야만 했던 루이즈 부르주아의 이야기로부터 알 수 없는 공감과 위로를 받았었다. 얼핏 보면 흉측하고 거대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거미가 나에겐 비로소 이뤄진 내면의 고통을 넘어선 나아감의 실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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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부르주아, 마망

 

 

사진으로 마주한 <마망>은 알 수 없는 벅차오름을 느끼게 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용서할 수 없는 상처와 배신, 혼란스러운 성생활을 목격하며 얻은 트라우마, 어머니의 죽음, 그러한 끔찍한 기억을 예술이라는 것으로 꺼내 놓은 그녀가 끝내 표현한 것은 그녀에게 정말 소중했던 어머니였다. 수십 년의 움직임이 비로소 피워낸 것이 그토록 소중한 존재이자 친구였던 존재라니. 알 수 없는 감동이 요동쳤다. 사진으로 거대한 <마망>을 보며 작은 사람 안에서 솟구쳐 오르는 감정의 덩어리,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해방이란 것이 무엇인지 아마 처음으로 이해하고 느꼈던 것 같다.

 

- 글 “삶을 위한 투쟁으로서의 예술, 루이즈 부르주아” 중에서

 

 

미술 작품은 ‘그냥’ 제멋대로 난해한 형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작품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나타난다. 보는 것만큼이나 작품의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우러나온다. 귀를 기울이는 ‘내용’이 이론적인 지식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술가의 삶과 고백, 어쩌면 그 고백을 통해 동하던 내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말들까지를 포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예술을 이해하는 데 내가 개입하는 것이 의미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늘 무엇인가를 보고 이해하는 데 자연스레 자신의 주관을 개입하지 않은가. 다만 우리가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작품을 ‘잘못 이해하는 것’일 테다. 그래서 나는 작품 앞에서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늘 ‘오픈 마인드’ 상태에 있으려 노력한다. 나의 생각을 하는 만큼 작품의 이야기를 듣는다. 동시에 다른 이들의 목소리에도 계속 귀를 기울이려 노력한다. 반대로 누군가의 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에 주의한다.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귀를 곳곳에 열어두는 것, 이 또한 내가 예술과 할 수 있던 유의미한 경험들이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는 것처럼, 친구의 말 끝에 나의 생각을 한두 마디를 덧붙이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처럼. 나는 미술과 함께할 때 그런 형태의 소통을 좋아하고, 그러한 대화를 자연스레 연습하게 된다. 작품을 집요하게 파헤쳐야 할 공부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 역시 미술사를 전공한 나로서는 필요한 일이다. 이런 시선은 분명 지적인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미술을 여전히 좋아하는 마음과 더 다양한 예술에 호기심을 가지게 하는 기회는 늘 이런 ‘대화’와 ‘만남’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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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전히 새로운 작품 앞에 서면 막연함을 느낀다. 나는 숱하게 써온 전시 리뷰의 모든 내용을 작품을 마주한 그 순간에 모두 떠올리는 능력자가 아니다. 사실 쉽게 확신하지 못해 망설일 때가 더 많은, 느린 사람이다. 이 글처럼 미술과의 순간에 대한 생각은 이토록 나아왔지만, 여전히 새로운 작품 앞에서는 오래 망설인다. ‘대화’라고 표현하기에는 부끄러울 지경의 침묵과 망설임일 수도 있겠다.


다만 바뀐 것은 나의 태도다. 우선 그런 침묵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과 만나자마자 바로 대화할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처음 만난 사람을 바로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확률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해와 다가감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침묵을 넘어서 더 깊이 다가가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그만큼 시간을 두어 더 깊이 들여다보거나 알아가는 과정을 가지는 것이다. 나는 일단 그렇게 한 번 다가가보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표현하자니 꽤 가벼운 마음처럼 보이지만, 새로움을 서슴없이 마주하게 하는 건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얼마든지 해볼 수 있는 시도들이라 생각한다.


예술을 향유하는 것이 거창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주 많은 걸 아는 사람만이 꼭 더 의미 있는 향유를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치 식물 같은 것이다. 식물의 탄생이나 생애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이 없어도 누구나 식물을 곁에 두고 그 생기를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미술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어도 새로운 작품 앞에 서면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느낄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인간은 살아가며 늘 느끼고 생각하는 존재니 말이다.


식물과 살아본 사람은 그저 가만히 존재할 뿐인 식물이 주는 생기와 활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을 향유한 사람들은 예술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예술은 그냥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현실과 동떨어진 존재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술과의 순간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예술을 향유해본 사람은 그것을 삶 곁에 둠으로써 일어나는 다채로운 경험이 무엇인지, 그 가치가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다. 예술이 정말 ‘현실’과 동떨어져있을지언정, 적어도 누군가들의 삶에서는 배제할 수 없는 의미 있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여전히 미술 그리고 예술이 더 많은 사람의 삶에서 가치 있게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건 이런 크고 작은 ‘만남’과 ‘대화’ 그리고 그것이 일어나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나의 언어도 이런 예술에 대한 가치관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닐까, 라며 자연스레 결론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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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을 두고 하는 게 글쓰기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언어와 표현에 관심이 간다. 어느 날 내가 쓴 글을 모아놓은 블로그에서 아무 창이나 띄워놓고 컨트롤+F로 단어 ‘경험’을 검색했는데 결과가 무려 54개나 나온 것에... 꽤나 충격을 먹었었다. 같은 단어만 반복해 쓰는 것은 글에 있어서 드러난 내 표현의 한계일 수도 있는데, 처음에는 “이거 좀 문제다(?)" 싶었다가 오히려 엄청난 개수에 되려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 왜 이 단어를 이렇게 좋아하는 거지?


잠시 뒤로 돌아가 하나씩 상황을 살펴보는데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구나 싶어서, 그런 지독한 반복적인 언급에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물론 글 연습도 꾸준히 해야겠다). 한편으론 이 글을 쓰면서 언어 표현 하나가 자리 잡기까지에는 한 사람의 여러 경험과 가치관 그리고 저마다의 의미가 개입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특정한 표현이 나의 언어 속에 자리 잡는 것이 얼마나의 의미를 지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술을 이야기하는 나의 언어가 앞으로 어떻게 자리 잡고 또 변화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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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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