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일상이 하나의 시가 되는 순간 [도서]

한정원, <시와 산책>
글 입력 2021.01.1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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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은 눈이 자주, 그리고 많이 내린다. 언제부턴가 눈을 봐도 일관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게 되었다. 차가운 공기에 얼굴을 내놓고 열심히 눈을 만지고 돌아오면 급격하게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잔뜩 껴입은 탓에 몸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겨울의 눈이란, 무방비하게 내 멱살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누군가의 주먹 같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그렇게 생각하면 눈이 그리 즐거운 일은 아니었다. 슬프지만, 난 조금 재미없는 인간이 되었다.


겨울이 이미 시작되고도 한창인 1월 1일, <시와 산책>을 펼쳤다. 첫 장을 읽고 너무 놀라 그만 책을 덮어버렸다. ‘난 이제 눈을 사랑하게 되고 말거야.’


일주일 전에 눈이 한 번 크게 왔었다. 그때 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창밖으로 점점 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어지럽던 바깥은 금세 하얗게 정돈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퇴근길이 난장판이겠군, 한숨부터 쉬었을 테지만 그날 나는 장갑도 없이 눈을 만지러 나갔다.

 

손이 땡땡해졌고, 양말과 앞머리가 젖어갔다. 모처럼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손의 물기 때문에 핸드폰 잠금이 잘 풀리지 않았다. 사진 찍기를 포기하기로 한 나는 가만히 서서 온 얼굴로 눈을 맞았다. 그때, 눈에 대한 짧은 글이 내 마음속에 나레이션처럼 읽혔다.

 

 

눈은 흰색이라기보다 흰빛이다. 그 빛에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실려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멀어도, 다른 세상에 있어도, 그날만은 찾아와 창밖에서 나를 부르겠다는 약속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두고두고 눈을 기다리게 한다.

 

내일은 눈이 녹을 것이다. 눈은 올 때는 소리가 없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 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

 

<시와 산책>, p.14

 

 

눈은 창밖에서 소리 없이, 흰빛으로 찾아온다. 커튼을 걷으면 ‘웃으며 손바닥을 힘차게 흔드는 애인처럼’ 눈이 거기에 있고, 시간이 지나면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처럼 젖은 소리’를 내며 사라진다. 눈을 맞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울음을 닮은 물소리를 얻기 전인 거라면 내 앞머리가 조금 더 젖는 일 따위는 아무렴 상관없겠다고 생각했다.


덤덤했던 일상 한구석에 글이 얹힐 때 나는 이 순간이 하나의 풍경으로 다가옴을 느꼈다. 그건 마치 시와 같았다. <시와 산책> 속 스물다섯 편의 글을 만났던 보름간, 쓸모와 낭비로 계산되었던 바깥의 시간은 그저 다정한 산책이 되었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나는 한정원이라는 이 책의 저자를 어떻게 지칭하면 좋을지 난감했다. 이 책은 그녀의 첫 책이었다. 그녀가 쓴 산문집은 하나의 시 같아서, 나는 처음에 그녀를 시인이라 불렀다. 하지만 정작 시를 읽어 보지 못하기도 했고, 뭔지 모를 이유로 시인이라는 지칭은 왠지 충분치 않아 보였다.

 

스물다섯 개의 짧은 글들을 넘길 때마다, 그녀를 부르는 이름이 계속 바뀌었다. 그녀는 시인이야, 아니 중학생이야, 그녀는 아랫집 이웃이야. 책의 마지막에 가서는 수녀가 되기 위해 그녀가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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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글라스 공방, 출판사, 목공소를 차례로 지났어요. 수사님들의 일터이지요. 목공소 화단 앞에서 톱밥들이 둥글게 말린 꽃 시늉을 하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요.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넘어왔어요.

 

“걷고 있어요?”

 

백발의 수사님 한 분이 기척도 없이 제 곁에 다가와 있었지요. “같이 걸어요.”

 

모든 시작이 이런 말이면 어떨까요. 같이 걷자는 말. 제 마음은 단번에 기울 것입니다.

 

<시와 산책>, p.169

 

 

책을 덮을 때쯤이 돼서야 그녀가 시인이라 불리는 것만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사람임을 확신했다.

 

그녀를 모든 것으로 부르고 싶었다. 중학생, 아랫집 이웃, 종종 트럭에서 과일을 사던 여자, 봉사자, 매번 거기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 이들은 산책을 하면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이자, 나이기도 했다. 스물다섯 가지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되고자 했던 모든 이가 좋았다.


산책자. 모든 것이 될 수 있기에 아무것도 아닌 이름. 나는 그녀를 산책자라고 소개하기로 한다. <시와 산책>에는 산책자 한 명이 바깥을 걸으며 만났던 시 같은 순간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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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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