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과 예술,무한의 점으로 완성되다 -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쿠사마 야요이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정
글 입력 2020.12.18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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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해도, 무수히 많은 점으로 뒤덮인 호박조형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우린 그토록 인상적이고 잘 알려진 작품을 만든 저명한 작가의 삶은 내내 평탄하고 부유했을 것이라는 맹목적인 동경과 환상을 갖고있다.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는 일본에서 태어난 한 여성이 작가로 자립하기까지 고단했던 여정과 그 이면의 이야기들을 작가의 삶과 함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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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くさまやよい | 草間彌生 | Kusama Yayoi

일본,1929~

 

 

 

강박과 트라우마 속에서 찍어낸 첫 번째 점



예술, 특히 엘리티시즘과 서양 미술 위주로 전개되어온 미술사 속에서 동양인 여성이 후원없이 순수미술 작가로 자립하는 것이란 무척 고된 일이었다. 사회에서 주는 무게감부터 녹록지 않았던 때, 쿠사마 야요이는 한 사람으로서도 순탄치 못한 삶을 보냈다. 영화는 그런 쿠사마의 어린 시절로 관객을 이끈다.

 

쿠사마는 작은 재배산업을 하는 가정에서 태어나, 미술을 반대하며 빨리 시집을 가길 권하는 어머니와 데릴사위로 외도를 일삼던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 시절 쿠사마의 그림을 불태우던 어머니가 준 압박감과 아버지의 그릇된 행동을 직접 목격하고 말았던 트라우마 속에서 쿠사마의 감정을 표출할 수 있던 유일한 경로는 어디든 무수히 많은 점을 그려넣어 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것이었다. 쿠사마는 그런 환경에 굴하지 않는 여성이었고, 점을 통해 세상을 표현하기 시작한 쿠사마의 단초가 싹트고 있었다.

 

당시 쿠사마의 개인전은 동네에 있는 작은 영화관 건물의 갤러리였고, 관람객 한 명이 없었다. 그럼에도 쿠사마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선망하던 여성작가 조지아 오키프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에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어떻게하면 작가로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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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쿠사마 야요이의 점 - 그리고 '그'들의 접점



달러 송금이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쿠사마는 어렵게 모은 달러를 기모노에 숨겨 뉴욕 행을 결정할 정도로 작가가 되겠노라 결심한 자신에 대한 강한 확신과 의지가 있었다. 후원자 하나 없던 시대에 쿠사마는 아주 저돌적으로 자신을 미술계에 알리고 작품을 만들어 전시할 곳을 찾아다녔다.

 

큐레이터, 작가, 또 다른 영역의 예술가 할 것 없이 작가생활에 조력자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닥치는대로 만나고 어필했다. 큐레이터들의 말에 따르면 쿠사마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무렵 쿠사마는 무수한 점으로 우주를 연상시키는 추상작업과, 부드러운 천을 꿰매어 만든 설치작업을 병행했다. 그리고는 이 작업의 이름을 '남근의자'라고 명명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도록 유도했다. 쿠사마는 '동양인', '여성'이라는 비주류에 속하던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그 개성 그대로를 뽐내려고 애썼다.

 

계속해서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기모노를 입은 긴 흑발의 자신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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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쿠사마의 노력이 거듭될 때마다 불청객처럼 그녀를 제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남성작가들이 있었다. 그녀의 작품에서 차용한 '무언가'를 가지고 말이다. 때로는 부드러운 천으로 조형을 만드는 행위였고, 때로는 공간 전체에 거울을 설치하는 것이었고, 때로는 벽면에 작품 자체를 패턴처럼 반복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작품을 모방한 작품'이라하면 그 어감이 너무도 저열해 우리가 이름조차 모르는 수준 이하의 작가일 것 같지만, 그 중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현대미술의 대표작가이자 팝아트의 거장 앤디워홀이었다.

 

쿠사마는 누구보다 당시 미술계에서 자신의 한 자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반복되는 모방과 접점들에 점점 지쳐간 쿠사마는 큰 상처와 충격을 받고 자살시도를 하는 등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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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대중과 평화를 사랑하던 작가



자신의 설 자리 하나를 내어주지 않고 계속해서 숨통을 조르는 주류 미술계 속에서, 쿠사마가 잃지 않고 작업을 계속할 수 있던 원동력은 아마도 세상에 전하고 싶은 무언가의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보게 되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해 몇 천개의 미러볼을 늘어놓고 '당신의 나르시스즘을 팝니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실제로 2달러에 미러볼 하나씩을 팔던 쿠사마 야요이의 행동과 그로인해 벌어졌던 소동은 그야말로 해프닝 그 자체인데, 우리는 왜 미술사에 쿠사마의 미러볼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저 가쉽으로 치부하기에는 쿠사마의 행동이 다양한 관점에서 현대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 미술작품은 핫도그처럼 팔리면 안되는 건가요?"

 

- 미러볼을 팔지 말라는 비엔날레 측 직원에게, 쿠사마 야요이가 남긴 말

 

 

쿠사마는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더욱 쉽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시절 예술을 '대중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자, 사고판다는 매매행위를 작품에 개입시킴으로서 엘리티시즘을 순식간에 전복시킨 이 행위야말로 미술사에서 그토록 외쳐왔던 아방가르드이자 현대미술의 다양성 아니던가.

 

큐레이터는 쿠사마가 낸 성과에 대비해 많은 제약을 받은 것에 대해 '젠더와 인종의 문제가 분명히 개입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여전히 그녀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아닐까.

 

평화와 사랑을 외치던 그녀는 때로는 트러블메이커로 여겨졌고, 관심과 자극만을 이끄는 작가로 평론되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잊혀지던 때도 있었다. 쿠사마는 스스로 정신병원 입원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시간들을 지나 현존하는 여성작가 중 최고의 경매가와 많은 관람객을 확보한 작가로 자리매김한 쿠사마 야요이. '현존하는 작가 중 최고'라는 수식어가 성별과 인종에 무관하게 적용될 수 있는 그 언젠가를 위해, 자신의 삶 전체에 계속해서 점을 찍어왔던 쿠사마 야요이의 삶에 주목해보자.


 

[지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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