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일이 왜 이리 힘들까요 - 연극 '작가'

글 입력 2020.12.04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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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창작자가 자신의 욕망과 대중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한다. 내가 원하는 바가 대중의 취향에 정확히 부합하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겠지만, 슬프게도 그런 일은 흔치 않다.

 

대중과의 간극이 단순히 취향 차이로 발생할 경우에는 창작자는 타협을 시도하곤 한다. 자리를 잡기 전까지 대중이 원하는 취향의 작품을 선보이다가 어느 정도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졌다 싶으면 뒤늦게 본래의 색을 드러내는 사례를 숱하게 봐왔다.

 

그런데 단순히 취향이 아니라 가치관의 차이라면 어떨까? 내가 용납할 수 없는 가치관을 대중이 원할 때, 그때에도 창작자는 타협을 시도할 수 있을까.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려는 여자 작가와 그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남성 기득권과 대중이 나오는 연극 <작가>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작가 포스터.jpg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


 

이주윤 작가의 <팔리는 작가가 되겠어, 계속 쓰는 삶을 위해>라는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솔직하면서도 재치 있는 문체에 시종일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을 느낀 부분들도 많았다. 모든 에피소드에 작가로서 생계를 이어나가는 게 쉽지 않은 현실이 전제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의 꿈은 오로지 작가였다. 그 꿈은 지금까지도 변치 않아 여전히 언젠가 서점에 내 책이 비치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어떤 글을 써야할까 고민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지만 그 결은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그 고민이 마냥 두근거리고 행복했다면 지금은 내 글이 잘 팔릴지 확신할 수 없어 불안하기만 하다.

 

대중성과 작품성은 반대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같이 가는 개념도 아니다. 뛰어난 예술성을 지녀도 안 팔릴 수 있고 별 볼일 없는 작품성에도 큰 인기를 끌 수 있다. 문제는 창작활동을 지속하게 해주는 건 오로지 ‘대중성’ 뿐이라는 것이다. 예술도 어쩔 수 없는 상품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연극 <작가>의 연출가 캐릭터의 대사를 통해 나타난다.

 

연극은 총 6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극이 불쾌했던 페미니스트 관객과 그 연극의 연출가가 논쟁하는 1막, 1막의 연극을 만든 제작자와 배우가 관객과 대화를 나누는 형식의 2막, 연극의 영화화를 두고 거절하려는 작가 여자친구와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친구의 이야기인 3막, 오로지 독백만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를 모티프로 한 유토피아에 대해 말하는 4막, 1막부터 4막까지의 연극에 대해 작가와 연출가가 대화하는 5막,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6막으로 진행된다.

 

2막과 4막에 등장하는 연출가 캐릭터는 연극 분야에서 꽤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로 보인다. 그는 여성 작가 캐릭터를 향해 끊임없이 ‘잘 팔리는’ 연극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2막에서 연출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작가의 말을 끊고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견해를 내비쳐 작가를 당혹스럽게 한다.

 

5막에서도 마찬가지다. 4막으로 작품을 끝내려는 작가를 향해 그래서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며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결말을 쓰라고 강요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1막이다. 작가가 가장 즐거운 마음으로 썼다던 4막은 모호하고 난해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한다.

 

나 역시 관객으로서 1막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봤지만, 그의 말을 듣고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나와 비슷한 나이대의 페미니스트 관객이 성적 대상화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 기득권 남성을 향해 큰 소리로 비판한다는 점에서 깊은 공감과 감탄을 느꼈는데, 이것마저도 연출가의 시선에선 그저 팔리기 좋은 분노에 불과했다.

 

상업성을 강조하는 건 연출가만이 아니다. 3막에 등장하는 남자친구 캐릭터 역시 거액을 받을 수 있음에도 자신의 작품이 영화화되는 것을 원치 않는 여자친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작가가 작품의 영화화는 곧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강간하라고 내놓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절절하게 말해도 그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다. 어렵게 영화화 하지 않겠다고 결론을 내려도 ‘내가 더 열심히 돈 벌게’라는 말로 작가의 선택을 무시한다.

 

 

 

연극과 현실의 경계


 

연극은 처음부터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시작한다. 처음 1막이 시작되었을 때 앞자리로 향하는 인물을 보고 ‘한 관객이 조금 늦게 들어왔나 보다’하고 생각했다. 자리에 바로 앉지 않고 무대에 오르는 것을 보고 나서야 배우임을 깨달았다.

 

2막에서도 관객과의 대화에서 질문을 받겠다는 작가의 말에 순간 ‘정말 손을 들어도 되나’는 생각이 스쳤다. 객석에 앉아있던 이가 손을 들고 질문을 하자 순수한 관객인 건지 이것마저도 모두 연극인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반응을 통해 곧바로 객석에 앉은 이도 배우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무대 세트를 담당하는 스태프도 계속해서 관객에게 얼굴을 비춘다. 보통 연극에서 소품을 정리하거나 세트를 변경할 때 이를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 암전을 한다. 아무리 눈앞에 펼쳐진 연극이 허구의 이야기임을 알아도 무대에서만큼은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 마련이다.

 

그런데 액자식 구성으로 이뤄진 이 연극은 앞의 내용이 실제 일어난 일인지, 작가가 쓴 대본에 불과한 건지 자꾸 헷갈리게 한다. 2막을 통해 1막이 연극 속 연극이라는 게 밝혀지고, 5막을 통해 1막에서 4막까지가 연극 속 연극(그러니까 1막은 연극 속 연극의 연극…)임이 밝혀진다.

 

왜 이 연극은 이렇게 복잡한 액자식 구조를 선택했을까. 연극의 제목처럼 이 연극은 희곡을 쓰는 작가가 주인공이다. 연극 속 작가가 처한 현실과 실제 이 연극을 쓴 (정말 무대 뒤에 있는) 작가가 처한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객석에 앉아있던 작가 지망생인 나도 예외는 아니다.

 

2막에서 관객 역할의 배우는 손을 들고 왜 여성 캐릭터의 성적 대상화를 비판하는 인물이 다른 약자의 인권을 이야기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현실에서도 정말 자주 들은 말이었다. 여성의 인권에 대해 주장할 때면 ‘그럼 이거는?’ ‘그럼 저거는?’ ‘왜 페미니스트들은 다른 건 신경 쓰지 않는 거야?’라는 식의 의미 없는 트집을 여러 번 겪었다. 많은 소수자가 자신의 인권에 대해 주장하는데 유독 페미니스트는 도덕적으로 완전히 무결한 정의의 수호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3막에서 남자친구와의 말싸움에 지친 작가가 푸념하듯이 늘어놓은 말이 가슴에 박혔다. 음식점에서 새로 나온 메뉴를 고민할 때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남자친구를 볼 때면 어떤 맛을 선택할지가 가장 진지한 고민인 그만의 세상이 부럽다는 말을 듣고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 여성의 비참한 현실을 접할 때마다 ‘내가 이런 것들을 모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게 다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 내가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 여성의 현실에 대해 말해도 상대가 ‘나는 그런 거 본 적 없는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곧바로 그 논쟁은 종결되곤 했다.

 

누군가에게 이 연극은 그저 숱한 허구 중 하나일 뿐이겠지만, 나에게는 현실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이 연극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따지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다.

 

 

 

쉽게 답을 내리지 않는 연극


 

3막과 6막은 동거하는 연인의 대화라는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3막에 등장하는 이성 연인과 6막에 등장하는 동성 연인 모두 애정 어린 대화를 나누고 성관계를 갖고 갈등을 맺는다.

 

3막에서 연인이 격렬하게 논쟁하는 도중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성이 이 소리가 무엇이냐고 묻자 남성은 아무렇지 않게 우리 아기라고 말한다. 우리한테 아기가 어디 있느냐는 말에도 남자는 절대 뜻을 굽히지 않는다. 결국 스태프가 소품으로 아기를 여성에게 안겨준다. 여성은 갑자기 품에 안긴 아기의 존재가 당황스러우면서도 거절하지 못하고 능숙하게 아기를 달래준다.

 

나는 연극 속 아기가 가부장제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여성이 아기를 낳고 삶이 완전히 뒤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엄마가 되는 순간 여성의 주체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아기와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리고 미디어는 ‘숭고한 희생’이라는 프레임의 모성 신화를 내세워 이를 합리화한다.

 

6막의 동성 연인이 등장할 때 (4막을 제외하고) 드디어 여성들만 나오는 부분이니 당연히 이상적인 모습이 그려지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여성 사이에도 권력 관계는 있었다. 바로 ‘나이’였다. 성관계 중 상대의 독단적인 태도에 여자친구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친다. 그리고 상대에게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과 섹스한 적 있느냐고 묻는다. 상대는 그 질문에 나는 그런 거 싫다고, 상상도 하기 싫다고 답한다. 바로 몇 분 전에 자신의 여자친구가 나이 많은 사람과 섹스를 했는데도 말이다.

 

1막에서 관객과 연출가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객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열심히 설파하지만, 연출가는 그의 말을 재밌어하고 평가하기만 한다. 언뜻 보기엔 치열한 논쟁처럼 보이지만, 나이와 성별, 직업으로 이뤄진 계급구조 안에서 여자가 하는 말은 남자에게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1막에선 한 쪽이 젠더 권력을 지녔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6막을 보고 ‘성별’을 빼도 여전히 많은 것들이 수직적인 계급 구조를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물이 아무도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독백만으로 진행된 4막이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단순히 형식이 달라서만은 아닐 것이다. 현실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오로지 한 명의 독백으로만 전달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오는 이질감일 것이다.

 

페미니즘을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더 많아지는 기분이다. ‘정말 이게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나라고 여성 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함부로 비판해도 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항상 나를 따라온다.

 

연극 <작가>는 그동안 많은 예술작품에서 ‘뮤즈’라는 이름으로 대상화되기만 했던 여성에게 작가의 주체성을 불어넣어줌으로써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에 대한 고민 없이 예술을 생산하고 소비해왔는지를 지적한다. 이 연극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건 정해진 답이 아니라 응당 했어야 할 고민이다.

 

나의 꿈은 변함없이 작가이다. 내가 원하는 세상을 내가 직접 창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고 싶은 대로만 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쓰며 고민한다. 어떤 글을 써야 잘 팔릴 수 있을지, 여성으로서 어떻게 여성을 묘사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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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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