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대도시의 타인들에 관한 고찰 - 도시와 산책자

"영원한 도시의 무자비한 반구."
글 입력 2020.12.0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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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도시와 산책자.jpg

 

 

 

1. 군중의 껍질


 

 
“…벤야민의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도시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더욱 현재성을 확보해가고 있다. 그의 도시 산책자는 거리의 행인, 소비자, 여행자들로 거대한 파사주를 이룬 근현대 신화의 동굴 안에서 꿈의 집들 안팎을 유랑하면서 그러한 도시화가 진행되는 현재를 몸으로 육화하는 존재들이다.” (도시와 산책자 中, 102p)
 

 

산업화의 물결이 일던 19세기 말부터, 유럽에는 대도시가 들어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최첨단 증기 기관이나 고급 예술 극장, 국립도서관, 신식 건물, 도시를 상징하는 온갖 종류의 건축물들은 이때부터 세워지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근대화’라는 이름은 순식간에 그동안 사회를 구성해 온 요소들을 옛것으로, 구식의 것으로 치부했다. 정치 엘리트들은 그 과정을 진보라고 쉬이 불렀다. 그들은 국가 중심의 도시 재구조화, 금융 자본의 도입, 자본주의의 유입, 산업 자본의 지배력을 신성시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물질’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요소가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급작스러운 변화에도 사회는 그럭저럭 잘 적응해 갔다. 온갖 향락으로 점철된 오락적 요소들도 전방위적으로 보급된 탓에, 대중 역시 산업화 과정에 자연스럽게 물들어갔다.

 

사람들은 도시로 몰렸다. 소외되는 그림자도 당연히 있었다. 도시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와 주거 공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빈민으로 전락했고, 하루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존재는 산업화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걸림돌로 기능하지 않았다. 근대성이라는 껍질은 강력했다. 앞서 열거한 산업화의 “긍정적인”, 물신주의적인 면모는 근대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 대중 앞에 선보였다. 19세기 말부터 시작해 양차 세계대전 등 세계사의 주요한 순간이 포착됐던 20세기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발터 벤야민과 지그문트 크라카우어, 그리고 동시대 유럽 지식인들은 산업화의 전개 과정에 가미돼 있는 환상적인 요소와 일그러진 모순들을 잡아낸다. 이를테면 온갖 종류의 상업성으로 물든 광고판 표지로부터, 지식인은 상업주의적 향락에 잠식되는 사회의 단상을 포착한다.

 

이들에게는 ‘산책자’라는 말이 붙는다. 비단 지식인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뒤에서 ‘직장인’이라는 말에 대해 풀이하면서 살펴보겠지만) 일반의 대중 속으로 파묻히기엔 지나치게 예민한 특질을 가진 사람을 통칭하는 단어다. 근대 도시공간 속에서 도시의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물화된 흔적을 짚어 보고,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산업화가 유발한 비인간적인 현상과 기술의 발달이 인간에게 수여한 혜택을 동시에 목도하며 계속해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직장으로든, 학교로든, 문자 그대로의 산책을 시작한 공원의 첫 지점으로든. 산책자는 끊임없이 도시를 배회한다. 그럼으로써 군중의 사이를 거침없이 거닌다. 무표정한 사람들의 형태와 제각각의 움직임, 몰린 인파 사이로 흘러나오는 불만과 체념의 호흡 역시 읽어 낸다.

 

『도시와 산책자』는 이 시기에 세워진 세계 각지의 대도시 파리, 베를린, 도쿄, 경성을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들의 논의를 빌려 산책자가 걷는 궤적을 살핀다. “허무로 빠지는 경계 지점들이 무수히 많은” (142) 대도시를 거니는 대중들을 추적하는 동시에, 나아가 그런 군중의 껍질을 기록하는 존재로서 산책자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껍질을 들춰낼 듯 말 듯,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애매하다. 그들 자신부터가 대도시의 그림자에 발을 애매하게 걸치고 있기 때문이다.

 

 

 

2. 직장인의 불안



 
“크라카우어에게서 ‘직장인’으로 명명된 도시 대중들은 문화적 유목을 통해 사무실로 대변되는 합리적 체계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며, 대중문화를 통해 개체화와 원자화로 인해 실종된 도시 공동체의 유대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복구와 회복은 … 흔히 부르주아적 교양의 ‘깊이’가 아니라 대중문화의 ‘표면’, 즉 외면성을 통해서 시도된다. 그런 역설적 의미에서 문화적 유목과 대중의 문화적 거처들은 소위 <집 없는 자들의 피난처>가 된다.” (도시와 산책자 中, 159p)
 

 

애매하게 발을 걸치고 있다는 것은, 곧 책이 가리키는 산책자의 범위가 현대 사회의 일상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음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고지식한 지식인이나, 그 사회의 권력을 쥐고 있는 정치 엘리트나, 자기만의 세계가 뚜렷한 예술인처럼 정체가 뚜렷해 보이는 이들만이 산책자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장인’을 다룬 파트가 대표적이다. 흥미로웠다. 저자가 크라카우어와 벤야민의 논의를 빌려오면서 현대 사회의 ‘직장인’을 설명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라는 표현 대신, ‘직장인’이라는 현대적인 언어를 해명하기 위해 한 챕터를 할애한 셈이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함께 경제 위기를 맞이한 독일에서, 직장인들은 온전하게 급여를 받지 못한 채 경제적 빈곤에 시달려야만 했다. 거처도 온전히 제공 받지 못했다.

 

저자에 따르면 루카치, 벤야민, 블로흐, 아도르노, 크라카우어 등 당대 프랑크푸르트학파 지식인들은 이 시기의 독일 직장인을 ‘불안정한, 파편화된 인격체’로 바라본다. 도스 플랜을 거쳐 실업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와중에도, 자본주의를 채택한 으레 국가들이 자연스레 겪듯 빈부격차와 상대적 박탈감처럼 타인과 대결해야 하는 피로한 상황에 부닥치는 일은 피할 수 없었다. 현대인이 겪는 고난의 크기는 딱 잘라 재단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근대 유럽의 직장인들도 꿈은 진작에 뒷전으로 미룬 채 밥을 벌어먹는 일조차 버겁게 인내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직장인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한편으로 ‘프롤레타리아화’로 표현되는 빈곤화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면서 저소득층 직장인들을 타격하였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 도시의 이질성과 뿌리 없음이 베를린의 직장인 도시 대중 전반에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158p)

 

이들의 존재가 ‘산책자’로 정의될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대도시의 암울한 단면을 그대로 흩뿌리고 있어서다. 날마다 비슷한 노동으로 일과의 절반 가량을 보내면서 매너리즘에 빠지는 직장인들은, 자아실현의 욕구를 잃고 급여를 받는 날만 기다리며 무기력한 일상을 영위하게 된다. 이러한 무료함을 풀 곳은 화려한 영화관이나 극장처럼 순간의 유희를 즐길 수 있는 공간뿐이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인생에서, 개인은 근대성이라는 환상으로 물든 겉으로만 화려한 파사주를 거닐며 또다시 지루한 하루를 흘린다.

 

이 과정 자체가 대도시를 돌아다니는 산책에 해당하는 것이다. 개인 간의 유대 의식을 제고하기 위해 특정 지역과 인종, 직장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도시 사회의 자의적인 공동체 윤리 역시 무기력이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발전한 문명을 누리고 있다는 점, 비슷한 직종의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은 직장인을 위로해줄 수 없었던 것이다. 직장인들은 항상 불안에 떨었다. 자신이 직면한 생존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불가능했기 때문에 연대나 배려와 같은 거시적인 논의는 그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공동체 윤리가 얄팍한 그물망으로 전락해버린 이유기도 하다. 대도시의 한 카페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커피를 마시면서도, 빼곡한 건물 사이에 자리한 직장이나 거처로 돌아갈 때도. 그렇게 도시를 활보하는 산책자의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언제나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릴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으며 살아갔다.

 

 

 

3. 타인의 그물 속, 익명화된 개인



 
“산책자들의 실천을 반드시 저항적이라든지 순응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들의 일상의 실천을 정치경제적 체계 중심의 사유로만 보면 그 활동은 다만 체계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거기에는 분명 체계 중심의 모델로는 설명될 수 없는 일상의 삶을 위한 대응전략과, 체계로만 규정할 수 없는 일상의 실천적 양상들이 존재했다.” (도시의 산책자 中, 260p)
 

 

그렇다면 대도시의 기획은 개인의 인간성을 자본주의에 매몰시키기만 한, 비인도적인 기획이었을까.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어지러운 형국에서도 사람들은 (주로 물질적인) 무언가를 손에 쥐고자 끊임없이 노력했고, 더 가지는 것이 미덕으로 인정받는 시대에서 대도시의 수많은 산책자는 세계 내로 편입되고자 힘을 쓴다. ‘자신만의 색’이 담긴 일상을 영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서 말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디저트를 마음껏 먹기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전시회에 가기 위해 열심히 노동의 세계로 뛰어든다. 노동 바깥에 존재하는 저마다의 일상은, 저자가 철학자들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것처럼 자본주의 체계 중심의 모델로 단일하게 정의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점은 대도시의 체계 탓에 산책자들의 색깔이 흐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은 자신의 사회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파생한 질서가 지구적으로 퍼져 있는 상황에서 현대 사회의 인간은 이런 질서에 기반을 둔 사회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인격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인격적 개체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루만에 의하면 인간은 일차적으로 사회의 ‘부분체계들’을 받아들여 그 사회에서 자신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정체화해 인격을 획득한다. 해당 사회의 기초적인 이데올로기와 체계들에 편입되어야만 정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이때 이미 사회의 구성원이 돼 (이를테면) 자본주의를 둘러싼 비판과 부조리를 목도하는 개인은 그 부조리에 동의할 순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전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기란 힘들다. 이미 그런 이데올로기에서 파생한 체계들을 받아들여 자아를 정초한 상태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욕망을 마음껏 분출한다. 대도시가 주는 좌절감에 허덕이면서도 최대한의 물성을 가지길 원한다. 내 옆의 타인은 나보다 얼마나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는지 계속 비교하면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성은 지워진다. 색깔을 잃고 대도시의 환상에 동화된다. 모두가 충분한 몫을 가져갈 수 없는 현실이기에, 대도시의 군중들은 빈민으로 도태되지 않으려는 위기감과 더불어 최대한의 몫을 챙겨 자본주의가 표상하는 물질적 차원의 행복을 실현하고자 발버둥을 친다. 이 때문에 산책자가 모인 군중의 크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진다. 색깔을 잃고 익명화되는 개인의 숫자도 그에 비례해서 늘어난다. 대도시의 타인들로 북적이는 장에 발을 디딘 채.

 

 

 

실무진 명함.jpg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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