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인가 -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부조리는 헌법재판소에서 시작된다' 리뷰
글 입력 2020.10.2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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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 이후 1년 6개월


 

2019년 4월 11일을 기억한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날이었다. 발표를 기다리며 거리에 나가 있던 사람들이 환호하던 모습, 그 모습을 배경으로 국회가 2020년 12월까지 새로운 입법안을 내놓아야 한다던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그로부터 1년 6개월이 지난 2020년 10월, 낙태죄와 관련된 논의는 어디까지 왔을까? 오기는 한 것일까?

 

박이대승의 <임신 중단에 대한 권리>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후 지금까지 의미 있는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기존에 임신중단을 둘러싼 주장들이 어떤 점에서 비논리적이고 일관성이 떨어지는지 짚어본다. 그 시작은 2019년의 헌법불합치 결정문이다.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인가?


 

낙태죄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이야기되는 두 가지 쟁점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다. 2019년 헌법재판소에서 발표한 '헌법불합치', '단순위헌', '합헌' 의견 모두 이 두 가지 권리를 언급하며 각각의 논지를 이어나간다. 이때 여성에게 임신중단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있다는 결론은 헌법에서 명시한 '인간의 존엄성'으로부터 비교적 명확하고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도출된다. 반면 태아의 생명권 개념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특히 작년에 발표된 '헌법불합치'와 '합헌' 의견은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고 있는데, 그 근거가 빈약하다. 헌법불합치 의견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인정하는 논리는 '모든 인간은 헌법상 생명권의 주체이므로, 태아에게도 생명에 대한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로 정리된다. 태아에게 생명권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태아가 인간인지 여부를 먼저 논증해야 하지만 그런 과정은 빠져 있다.

 

생명권은 살아있기 때문에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주체가 '법적 인간'으로 인정받음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생명이 지닌 가치와 그 생명을 지닌 주체가 생명권을 가지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 책에서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참고해 정의하는 '법적 인간'이란 "자신의 지성을 이용해 자율적 판단을 하는 존재이며, 그런 판단에 따라 행위하므로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는 법적 주체"(63쪽) 이다. 이 정의를 바탕으로 할 때 태아는 법적 인간이라 하기 어렵다.

 

물론 이 단계를 건너뛰고 태아가 법적 인간이고 따라서 생명권의 주체라고 가정해볼 수도 있다. 다만 이때 태아가 죽는 것은 인간이 죽은 것과 법적으로 동일하게 여겨져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과실로 임신부가 유산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임신중단 역시 이유를 막론하고 금지되어야 한다. 인간이 이익이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명권을 제한하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직접적으로 생명권의 주체를 살해하는 것을 허락하는 일은 생명권을 성립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런 형태의 생명권은 '생명권'이라 할 수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반면 태아가 법적 인간이 아니라면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도 아니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내놓은 의견 중 '합헌 의견'과, 이 책에서 우리나라 헌법불합치 의견을 비판하기 위해 표준 논변으로 제시된 미국의 '로 대 웨이드 판결'의 경우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가 아님을 명확히 한다. 이 결론은 어감상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만, 태아의 생명이 소중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생명과 생명권을 분리함으로써 태아의 생명은 국가에서 보호해야 하는 가치라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를 종합해볼 때 태아의 생명권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결론이 나올 수 있다.

 

1. 태아는 법적 인간이고 생명권의 주체다.

2. 태아는 법적 인간이 아니고 따라서 생명권의 주체도 아니다.

 

태아가 법적 인간인지 논증하지 않은 채 편의에 따라 결론을 내리면 헌법불합치 의견처럼 태아가 우리와 같은 법적 인간은 아니지만, 생명권의 주체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태아를 법적 인간으로 보지 않으면서 생명권을 가지는 또 다른 제3의 존재로 인정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태아를 제3의 존재로 인정한다 해도 앞서 말한 법적 인간처럼 자기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기는 어렵다. 이때 태아의 법적 권리는 책임질 수 없고 보장받을 수만 있는, 법적 인간의 권리와는 다른 무언가가 된다. 그러므로 "인간과 구별되는 태아라는 별도의 법적 지위를 추가하고, 태아의 생명권을 법적 인간의 생명권과 다른 것으로 정의해야만 한다"(74쪽) 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되면 그에 따른 법 체계를 통째로 바꿔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법 체계를 바꾸기 전에, 애초에 왜 태아를 제3의 존재로 인정하려 했는지 되짚어보자.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굳이 태아를 비인간과 인간 사이 제3의 지위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 논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태아에게 생명권이 없다고 인정한 다음, 그럼에도 태아의 생명은 국가에서 보호할 필요가 있는 가치라고 주장하면 된다.

 

 

 

태아의 생명권 논의를 넘어서


 

 

결국, 인간 여성과 비인간 태아의 법적 지위를 뒤집기 위해 일종의 꼼수를 만들어내는데, 그게 바로 태아의 생명권이다. 이런 꼼수의 목적은 태아의 법적 지위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인간 여성의 지위를 떨어뜨리는 데 있다. 태아의 생명권은 대부분 임신중단에 관한 논쟁에서만 주장되고 그 주된 기능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86-87쪽)

 

 

'태아의 생명권'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양립이 불가능하다. 반면 '태아의 생명의 가치'라는 개념은 그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고 법률적으로 다룰 것인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함께 논의하는 것이 가능하다. 모두가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임신중단 문제를 놓고 사람들은 "임신중단에 대한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려는 진영"과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를 방어하려는 진영"으로 나뉠 것이다.

 

전자는 태아 생명을 보호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익'이 낙태죄로 인해 제한되는 여성의 권리의 정도보다 더 크다고 주장할 것이고, 후자는 "아무리 중대한 이익이라도 그 이익을 위해 인간의 자율성과 기본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불가능"(108쪽)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많은 국가에서는 이런 스펙트럼 사이에서 '이익'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부작용이 발생하는지 등 다양한 협의 과정을 거쳐 법이 정해진다.

 

한편, 이런 전제 하에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볼 수도 있다. 태아의 생명이 국가가 보호해야 할 이익이자 가치라면, 왜 임신중단에 제한을 두는 방향으로만 정책을 펴야 하는가. 이 '이익'을 증대하기 위해서 임신부나 어린이를 위한 복지를 개선하는 방법도 있다. 아이를 가진 여성의 책임만이 부각되는 현실을 자각하고 남성도 책임을 지도록 법을 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권이 아닌 생명의 가치에 초점을 맞추면 낙태죄와 관련된 법안 외에도 시야가 넓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법


 

 
문제는 제한적 허용이냐 덜 제한적 허용이냐가 아니라,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으로서 보장되었느냐다. (88쪽)
 

 

이 책은 임신중단을 다루는 다른 책들처럼 여성의 생생한 경험이 반영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제도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 아니다. 단지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문 속 비합리를 짚어나갈 뿐이다. 그럼에도 책을 읽을수록 낙태죄를 폐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뚜렷해진다.

 

그러나 이런 논증이 무색하게도 지난 7일 국회에서 내놓은 입법예고안에는 낙태죄가 남아 있었다. 입법예고안에 따르면 임신 14주까지는 임신한 여성 본인이 원한다면 임신중단을 할 수 있고, 임신 15주부터 24주까지는 기존에 임신중단이 허용되던 사유와 더불어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사유'가 있을 때도 허용한다.

 

언뜻 보기에 여성의 권리를 더 넓게 보장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임신중단을 기본적으로 '죄'로 간주한다는 근본적인 문제는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여성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죄로 여겨지고, 면죄가 가능한 예외 사항을 인정받기 위해 국가에게 '사유서'를 제출해야 하는 처지다. 낙태죄를 둘러싼 논의는 기존의 낙태죄를 전제한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여성의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형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임신중단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어떤(얼마만큼의) 제한을 둘 것인가를 협의하는 형태여야 한다.

 

다행히 국회 내부에서도 입법예고안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고, 개정안을 준비하는 의원들도 있다. 그렇지만 지금껏 낡은 법을 없애거나 바꾸는 과정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낙태죄 문제 역시 나를 비롯해 관심을 가지는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낙태죄 폐지에 찬성하면서도 설명을 하려 하면 어디선가 막히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에게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는 작지만 알찬 지침서가 되어 준다. 또한 제대로 된 논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생산적인 논쟁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줄 것이다. 이 책과 함께 우리가 더 나은 미래로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낙태죄 유지', 여성은 여전히 '처벌의 틀'에 갇혀있다(한겨레)

"낙태죄 존치가 개정안? 한 방 맞은 것 같다"(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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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봄문고 002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

-비합리는 헌법재판소에서 시작된다-

 

 

지은이: 박이대승

 

 펴낸곳: 도서출판 오월의봄

 

규격: 114*188 

 

쪽수: 136쪽

 

발행일: 2020년 10월 12일

 

가격: 11,000원

 

 ISBN: 979-11-90422-47-5 (03300)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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