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변명의 응어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 도서 '아버지의 사과 편지'

가해자를 붙잡아두는 일의 필요성
글 입력 2020.09.2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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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과편지_표1(평면띠지).jpg

 

 

 

1. 가해자를 직시하기


 

 

“그래서 나는 너를 경멸했다. 내게 살해된 희생자가 내 집에서 지내며, 아직 어린 자신의 존재가 분해되고 부패하는 과정을 매일 목격하게 함으로써 나를 고문했으니까. … 나의 에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달콤한 파이는 어디에 가버린 걸까? 물론 나는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이의 신뢰, 아이의 빛, 아이의 선함, 아이의 아름다움은 나에게 너무 과분한 것이었고, 그래서 내 손으로 그 모든 것과 더불어 너를 유린하고, 침범하고, 때려 쓰러뜨린 거야.” (97)

 

 

상처는 잘 씻기지 않아서 상처다. 해제의 글쓴이가 남겼던 말. 가정 내 성폭력 피해자인 저자 이브 엔슬러가 상흔을 마주하는 방식은 인상적이다. 그녀는 상처를 감추기보다 드러내는 쪽을 택했다. 대개의 사람은 언론이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혹은 비슷한 성격의 공개적인 보도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리라 예상한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하듯 이미 상처가 새겨진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봐’라는 이유로, 사건 그 자체를 묻고 지우려는 행동 역시 유의미한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어느 쪽이건 간에 결국 선택의 문제인 셈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어떤 방향으로 상흔을 드러내야 상처를 덮을 딱지가 덜 흉하게 질 수 있는지, 선택하기에 달린 것이다. 저자는 숨기기보다 폭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 책, 『아버지의 사과 편지』는 그래서 저자가 자신의 경험담과 아픔을 드러내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기도 하다.

 

화자는 아버지다. 저자는 가해자 아버지를 내세웠다. 가해자가 어떤 맥락에서 피해자에게 성적인 학대를 가했는지, 가해자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다. 우리는 성추행과 성폭력 등의 사건을 접할 때, 이런 의문을 떠올리곤 한다. 가해자는 무슨 생각으로 그랬던 걸까. 어째서 저런 비인도적인, 몰상식한 행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을까. 특히 가정 내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더욱이나 그렇다. 부모가 가해자인 경우에 사람들은 경악한다. 어째서 부모라는 작자가 자녀를 성적 대상으로 객체화할 수 있나. 우리가 늘상 말하는 것처럼, 독심술을 쓰지 않는 이상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이유가 과연 존재하긴 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최종적인 시선이 던져진다. 피해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녀 혹은 그에게만 동정과 안타까움의 시선을 던진다. 가해자는 그저 가해자로 규정되기에 그친다. 악마 같은 가해자는 그렇게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격리된다. 분석의 여지도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채 일종의 금기어로 봉인된다.

 

가해자를 옹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님을 확실히 하고 싶다. 그렇지만 가해자의 이름, 가해자의 존재 자체를 금기어로 고정하는 행위 역시 숙고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만큼이나 가해자의 심리와 정황을 분석하는 작업 역시 필요하다고 느꼈다. 가해자를 지워버리는 순간, 사건의 심각성과 경위 역시 동시에 지워질 가능성이 커서다. 사건을 저지른 가해자를 단순히 사회에서 격리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망각해버리려 한다면. 단지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정도로만 성폭력 문제를 정리하고 축소할 경우, 사람들은 ‘성적 유린의 피해자가 발생했다’라는 사실만 기억하기에 이른다. 어떤 신체적, 정신적 피해가 발생했는지만 기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비슷한 사건이 다시 발생해도 동일한 방식으로 폭력을 묻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흉악범이라 회자되는 수준의 범죄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2. 변명으로 점철된 자기고백


 

 
“나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특권층 남성이었다. 내가 악마 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그때 스스로 알았을까? 내가 끔찍한 짓을 하고 있다는 도덕관념에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을까? 아마 최악의 분노 속에서 가장 폭력적으로 널 공격했을 때, 피가 흐르는 네 얼굴과 다리에 든 멍, 네 눈에 담긴 공포를 바라보는 순간 잠시 움찔했다 하더라도, 내 행위에 대한 정당화가 늘 나의 죄의식과 자기 의심을 앞섰을 거야.” (110)
 

 

폭력의 결과로서 상처만을 재생산하는 구조로 사건의 정황을 간소화할 경우, 문제는 사건 축소에 그치지 않는다. 축소 이후의 상황에서 문제가 생긴다. 이미 폭력의 피해자라는 프레임이 씌워진 상태에서, 피해자는 수동적인, 권위에 저항하지 못했던 개인이라 함부로 객체화될 가능성에 처한다. 가해자의 권위성, 다시 말해 위해를 저지를 수 있다는 권위적 위치가 부각됨에 따라 피해자는 더욱이 무력한 존재로 치부된다. 동정만이 가득한 배려의 울타리 안에서, 단지 “피해자로” 그 자신의 인격적 특질이 고정되기에 일방적인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 쉽게 격하되는 것이다.

 

물론 가해의 정황 속에서 피해자는 가해자의 권위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공포에 짓눌려 말 그대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가 인간인 이상 최소한의 수준일지라도 경계심과 저항심을 당시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내보였을 것이란 사실은 명백하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피해자를 수동적인, 당하기만 한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사건의 가해자를 지워버리고 사건을 일단락하려는 행위는, 당시 정황에서 피해자가 행동했던 양상까지도 결국에 지워버림으로써 피해자를 단지 피해자로만 여기도록 종용한다.

 

저자의 서술 방식은 이러한 사건 축소화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목소리 높이기’에 집중한다. 피해자인 자신이 당시의 상황에서 어떤 피해를 입었으며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폭로하는 데에 망설임이 없다. 심지어 가해자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신의 폭로를 직면하도록 구도를 설정해 서술을 전개한다. 피해자 이브 엔슬러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하면서도 때때로 강력하게 그에게 저항했음을 아버지의 목소리로 전달한다. 그럴 때마다 가해자 아버지는 당황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고, 자신의 말과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이브를 보며 그녀가 제 뜻대로 호락호락하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책을 읽기 전까지는, 한 번도 이렇듯 가해자의 관점에서 피해자의 여러 행동이 어떻게 다가왔을지 상상해볼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서술 방식, 즉 저자가 이야기의 전개 방식으로 선택한 가해자의 자기고백적 관점은 사건의 가해자를 전면에 내세워 그의 책임과 과오, 잘못을 회고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그만큼 뇌리에 강하게 남는 기법이다. 아버지의 입에서 어떤 변명이 나오는지 지켜보는 동시에, 화자인 글쓴이가 동시에 어떤 치욕과 피해에 시달렸는지까지 총체적으로 상상해보도록 했다.

 

 

 

3. 실수였던 걸까


 

‘피해자성’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일반적인 피해자로서의 모습만을 싫어하는 게 아니다.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수동적인 면모 때문이기도 하다. 단어가 함의한 그런 면모는 피해자의 인격을 격하하는 동시에, 피해자의 인격적 특질을 고정시켜 때때로 그것이 악용되는 데에 일조하기도 한다. 시작부터 잘못된, 규정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야 할 피해자성을 위시하며 사건의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등의 특성 오용이 그러하다. 피해자에 대한 그릇된 시선뿐 아니라, 울타리와 보살핌을 수단으로 간주하려는 시선까지도 합쳐져 만들어진 잘못된 이해. 성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를 바라볼 때 항상 이 부분에서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이런 답답함을 호소하는 작문형 글을 얼마 전 논술학원에서 썼다. 논술학원 강의 시간에는 이렇게 수업 전에 논술이나 작문 하나를 쓰고, 학우들과 다 같이 쓴 글들을 하나하나 함께 읽어보는 시간을 가진다. 나는 이런 피해자성이 때때로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하필 내 바로 다음 글이, 교수에게 권력형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의 상황을 가정하고 쓴 작문이었다. 피해자가 교수에게 꼼짝하지 못하고 체념에 가까운 정서를 느꼈던 맥락이 글 안에서 전개됐다. 우연이 어떻게 이리 겹치나 싶으면서도, 내가 순간적으로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닌지 문득 조심스러워졌다. 죄책감을 느꼈던 것 같다. 어쨌건 피해자만이 자신의 피해 경위를 당위적으로 서술할 수 있을 테니. 자신이 피해자로서 말하는 것에 도대체 어떻게 비난의 화살을 들이밀 수 있겠는가.

 

*

 

복잡했다. 그런데도 책을 읽으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내 생각이 마냥 틀리지는 않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던 것 같다. 저자의 용기도 존경스러웠다. 강인하고 간결한 문체를 보며 분명 단단한 사람일 것이리라 생각했다.

 

 

 

실무진 명함.jpg

 

 



[이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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