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표의 존재에서 무표의 존재로 [영화]

영화 <델마> (Thelma)
글 입력 2020.09.1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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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에 대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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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언제나 유표(marked)의 존재였다. 남성과 인간의 규범을 뭉뚱그려 양자를 동일시하고 남성형을 대표 형태로 삼아, 이를 ‘보편(무표)’이라 칭하던 세상 속에서 여성은 갈 곳 없이 떠돌며 대상화되었다. 이러한 기조 아래 여성을 이분법적(성녀 혹은 창녀)으로 바라보는 상상력은 가부장제의 유구한 지배 구도로 존재해왔다.

 

특히 그리스도교적 가치관 아래, 뱀과 이브로부터 시작된 '죽음보다 더 비통한' 죄악은 여성을 '악마의 통로'로 만들었고, 이는 마녀사냥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오슬로를 배경으로 하는 마녀 이야기’를 해볼 요량으로 <델마>를 시작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델마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마녀다. 하지만 영화는 마녀에 대한 전통적 담론을 답습하지 않는다. <델마>는 유표의 존재로 여겨지던 이들을 무표의 존재로 그려낸다.

 

 

     

마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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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대학생이다. 의사 아버지와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에게선 매일같이 안부 전화가 온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에서 아냐를 마주친 후 델마는 발작하기 시작하고, 아냐와 가까워질수록 이상한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난다. 병원에선 델마의 증상이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 같다고 말하고, 델마는 기억에 없는 어린 시절의 병력과 할머니의 진실에 대해 알게 된다.

 

남성들이 규정한 영역에서 벗어난 여성의 불안은 종종 ‘히스테리’ 혹은 ‘빙의’란 이름으로 표현되었다. 영화에서 의사 또한 델마의 발작을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으로 설명한다. 이 증상은 역사적으로 접신 혹은 악마에게 홀린 상태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증상을 겪은 여성들은 ‘마녀’로 명명되었다. 델마가 자신의 증상에 대해 검색했을 때, 화면에 삽입된 마녀사냥과 쟌다르크의 이미지는 마녀의 역사성을 상기시킨다.

 

무언가를 사라지게 만드는 델마의 능력은 설명할 수 없는 낯섦이다. 그렇기에 부모는 의학과 종교에 기댔다. 남성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힘을 가진 소녀는 가부장적 세계에 적응하기를 요구받았다. 사회는 의학과 종교로 그의 몸과 정신을 재단했고, 델마 자신의 질서와 사회의 질서가 충돌하며 신체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의사 또한 델마의 발작을 ‘정신적 억압에 신체가 반응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즉, 델마는 가부장적 세계에 편입되지 않은, 사회화되지 않은 자신의 몸에 사로잡힌 것이다.

 

델마의 할머니 또한 델마와 같은 일을 겪었다. 하지만 델마와 다르게 실패한 존재로 영화에 등장한다.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남편을 이 세상에서 없애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린 나머지 요양원에서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델마의 할머니는 자신의 초능력에 대한 죄의식과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을 부정한다. <델마>는 단순히 현재의 델마만을 보여주지 않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할머니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는 모계로 이어지는 할머니를 등장시키며 마녀의 역사성을 다루는 동시에, 델마를 통해 앞으로의 희망을 제시한다.

 

 


새로운 성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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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는 델마의 성인식을 담아낸다. 하지만 이전에 재현되던 소녀들의 통과의례와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통과의례는 억제, 순응, 감내를 통해 기존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되는 구도로 이루어진다. 델마 또한 아버지의 언어와 법에 의해 억제되고, 순응하고, 감내하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아버지의 공간으로 표상되는 집을 떠나 대학이라는 낯선 곳에 발을 들이고, 그곳에서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며 변화가 시작된다.

 

델마의 새로운 욕망은 아버지의 법(기독교적 세계관)과 충돌한다. 그 과정에서 델마는 시련을 겪고, 공포에 휩싸인 델마는 아버지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부모는 델마의 능력이 다시 깨어날까 조심스러워하며 델마를 통제하려 한다. 이전까지의 아버지의 다정함이 가부장제의 교묘한 설득이라면, 델마가 부모의 집으로 돌아와 마주한 아버지의 모습은 강압 그 자체다. 설득은 사회의 요구를 내재화하게 만드는 반면, 강압은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델마는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자신의 욕망에 대해 똑바로 직시한다. 그는 이제 스스로를 검열하지 않는다. 델마는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아버지의 법을 넘어서고, 새로운 힘을 얻어 자신이 욕망하는 공간으로 돌아간다. 그곳은 델마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며, 사랑하는 아냐가 존재하는 곳이다.

 

이러한 델마의 이야기는 일종의 성장 서사이자 영웅 서사이다. 델마는 가진 힘을 억누르고 세계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억눌려 있던 힘을 긍정하고 발산한다. 동시에 델마는 시간을 사는 존재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공간에 정주하는 존재로, 남성은 시간을 사는 존재로 그려져 왔다. 하지만 <델마>는 이를 전복시킨다. 오히려 델마의 아버지가 집이라는 공간에만 정주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그의 죽음 또한 해당 공간 주변에서 일어난다. 반면 델마는 집이라는 공간을 떠나, 여정의 주체가 되는 존재로 그려진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뒤, 델마는 호수 안으로 깊이 들어가 학교 수영장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자신이 되살린 아냐를 만나고, 달려가 키스한다. 자신의 퀴어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능력 또한 긍정한다. 물에서 나온 델마는 푸르른 풀과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 속에서 어린 새를 토해낸다. 이어서 역동하는 애벌레와 벌레가 카메라에 포착된다. 델마의 새로운 탄생이다. 단단한 아버지의 세계를 깨부수고, 새롭게 자기 자신으로 태어난 것이다.

 

 


유표의 존재에서 무표의 존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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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마>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건, 강한 섬광의 이미지다. 영화 시작 전 “감광성 뇌전증 환자의 발작을 유발할 수 있으니 관람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메시지가 나올 정도로 빛의 깜빡임은 도드라진다. 이러한 섬광은 델마가 발작을 일으키고 능력을 일으킬 때마다 등장한다. 빛과 어둠의 이미지는 델마의 위치성을 보여준다. 빛과 어둠의 사이,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선과 악의 사이, 자신의 언어(능력)와 아버지의 언어 사이, 존재(하게 만드는 능력)와 비존재(하게 만드는 능력) 사이에 갇힌 델마는 ‘발작’이라는 신체적 반응을 일으켰다.


델마를 선이냐, 악이냐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답하기는 어렵다. 델마의 능력은 동생과 아버지를 죽이기도 했지만, 어머니를 치료하고 아냐를 되살리기도 한다. 이러한 선과 악의 모호성은 영화 속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 제시된다. 강의시간에 교수가 “빛은 측정방법에 따라 입자 또는 파동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의사가 심인성 비뇌전증 발작을 두고 “시대에 따라 그 주체가 신이나 악마가 됐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델마가 “예수사탄”이라는 대사를 내뱉기도 한다.


영화는 이러한 대사들을 통해 남성 권력의 논리가 납작하게 포착해 이미지화한 이분법적인 구분과 표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구도 안에서 포착되지 않았던 낯선 여성의 존재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영화는 델마를 선이나 악으로 특정화하지 않는다. 델마는 그저 델마다. 영화는 나 자신 그대로, ‘실존’으로 살아갈 델마의 모습을 비춘다. 힘을 가진 델마가 우리와는 다른 유표의 존재, 함께 있을 수 없는 존재, 교정해야 할 존재로 제시되지 않는다. <델마>가 지향하는 바는 명백하다. 가능성과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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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광장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부감 숏으로 비추고, 서서히 카메라를 줌 인해 ‘델마’를 지목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델마와 아냐의 모습을 보여주다가 천천히 멀어져, 하이 앵글로 광장 안의 인파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 델마와 아냐를 포착한다. ‘마녀’라는 유표의 존재였던 델마는 결국에는 무표의 존재로 이미지화된다. 기존 세계의 언어와 구도로 설명할 수 없는 낯선 존재로 그려지던 델마는 종국에 보편적인 일상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영화는 ‘델마가 과연 마녀인가?’라고 질문한다. 이는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세계의 구조에서 비일상적 존재, 마녀, 혹은 억압받고 통제받았던 존재들에 대한 질문이다. 동시에 델마를 마녀라 부르고, 마녀로 만든 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엔딩에서 보여주듯, 델마는 ‘마녀’가 아니다. 우리와 함께하는 일상적 존재다. 세계를 상상하는 주류의 언어로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고, 설명할 수 없었던 존재였을 뿐. 델마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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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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