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레몬 조각 같은 인생 - 레몬청 만드는 법, 핑거라임 [도서]

글 입력 2020.07.2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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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책이다. 이것이 내가 <레몬청 만드는 법/핑거라임>을 손에 쥐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이 책 속 두 개의 소설은 도서의 각각 양쪽 표지로부터 시작하여 읽을 수 있다. 책을 몇 번이고 뒤집어보며 레몬과 라임 중 어떤 과일을 먼저 펼쳐볼지 고민하다 우선 <레몬청 만드는 법>을 선택했다.

 

 

레몬라임_표지.jpg

 

 

 

레몬청 만드는 법


 

제목을 보자마자 엄마가 만들어 주신 우리 집 레몬청이 떠올랐다. 레몬청 안에 든 레몬 슬라이스를 컵 바닥을 적당히 덮을 정도로 담은 뒤 레몬즙과 설탕이 녹아 만들어진 청을 따른다. 그 위에 물이나 탄산수를 부어 섞어 마신다. 레몬향이 스쳐간 혀에 아리도록 단 맛이 돌면 그제야 여름이 느껴지는 것이다.

 

소설 속 서술자는 태국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을 꺼내며 레몬청에 관한 기억을 되살린다. 늘 함께 식당을 방문하는 연인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혼자 등장한 여자는 충혈된 눈과 텅 빈 표정을 한 채 레몬청 한 병을 달라고 말한다. 서술자는 레몬청이 담긴 유리병을 꺼내어 주며 마신 잔의 수대로 계산을 하기로 한다. 이후 한 참의 시간이 흐르고 여자는 열세 잔의 레몬차 가격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선다.

 

그 연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서술자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여자가 감당한 몫, 열세 잔의 레몬차를 보며 저마다의 생각으로 짐작할 뿐이다.

 

 

'줄곧 레몬이나 라임을 소재로 무언가를 쓰고 싶었습니다. 너무 시어서 괴로운데 동시에 맛있기도 하고, 그런 오묘함이 삶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 작가들의 대화 中

 

 

떠올리기만 해도 입 안에 침이 고이며 턱이 시큰해지는 묘한 매력의 과일, 레몬. 딱 레몬을 닮아 이 소설은 어딘가 씁쓸하고 마음 한편을 아릿하게 만든다.

 

더 다가가지도, 훨씬 멀어지지도 않은 딱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타인의 삶이란 다 먹고 남은 레몬 조각같이 느껴진다. 내가 볼 수 있는 것만으로는 그 존재의 온도를 알 수 없다. 다만 언젠가 같은 차를 맛보며 누구나 지나는 삶의 한 자락을 이해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짐작만 할 뿐이다.

 

서술자는 여자가 떠난 후 가게 주인아저씨로부터 레몬청 만드는 법을 배웠다. 레몬청을 만들다 조각난 레몬을 입 안에 넣고 날카로운 신맛을 음미한다. 그러면서 그때의 그 여자에게 레몬청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고 회상한다.

 

차마 다 알지는 못하지만, 또 가까이 다가갈 만큼의 용기도 없지만 인간은 때때로 나와 닮은 타인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 기묘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고작 열세 잔'일 수도, '무려 열세 잔'일 수도 있는 그날, 그 여자가 삼켜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서술자는 일을 그만두게 되어 그 여자를 만나기 어려워졌으니 레몬청 담그는 법을 알려줄 수 있는 기회는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다시 삶의 무언가를 레몬만큼 달고 신 것과 함께 목구멍으로 넘겨야 하는 날이 온다면 아마 그때는 직접 레몬을 조각 내고, 한 층 한 층 레몬 슬라이스와 설탕을 쌓아 그녀만의 레몬청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레몬청은 그렇게 우리들의 쓰고 날카로운 인생을 담아 달고 아릿하게 숙성된 모양을 닮아 있다.

 

 

'코를 막고 레몬 조각에 이를 깊이 박아 보았다. 강렬한 신맛에 입 안이 아렸다. 시큼한 향이 피부에서 스며 나오는 기분이었다. 레몬차를 마실 때에는 달달한 설탕이 레몬의 신맛을 가린다. 그렇지만 음미하다 보면 문득 날카로운 신맛이 혀를 찌른다.'

 

- <레몬청 만드는 법> 23p

 

 


핑거라임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약물 치료, 인지 치료, 미술 치료, 언어 치료, 음악 치료를 두루 거치고도 차도가 없어서 상담사의 권유로 핑거라임 요법 시술을 받으러 온다.'

 

- <핑거라임> 49p

 

 

서술자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의뢰인에게 핑거라임을 통한 시술을 해준다. 시술에 사용되는 핑거라임은 신맛과 쓴맛이 매우 강한 개량종으로 이를 맛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는 비명을 지른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시술을 진행할 때는 헬멧과 턱 보조기를 착용하게 하여 몸을 비틀며 다치거나, 핑거라임을 뱉을 수 없도록 만든다.

 

이렇게 말로만 들어도 고통스러울 것 같은 치료는 1년에 5회만 받을 수 있는데, 이 최대치를 넘기고도 핑거라임을 원하는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서술자를 찾아온다. 남자는 삼십 대 중반의 실어증 환자로 두 손을 현란하게 휘저으며 서술자에게 자신의 사연을 쏟아낸다.

 

남자의 사연을 축약하면 이렇다. 청각이 무척 예민했던 남자가 우연히 귀마개를 발견하게 되고 그것을 착용한 후로부터 남자의 삶이 나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 년쯤 지나자 귀마개를 착용했음에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는 귀마개를 뺄 수 없었다. 귀마개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핑거라임을 먹을 때에만 귀마개를 끼고 있어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는 이 남자는 말 그대로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잊으려 하는 것이었다.

 

남자는 결국 서술자에게 여분의 귀마개를 주고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핑거라임을 얻게 된다.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었다. 남자는 핑거라임 알맹이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다른 의뢰인들처럼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사무실을 걸어 나간다. 핑거라임이 주는 고통에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아직까지도 핑거라임이 주는 고통보다 귀마개에서 멈추지 않는 소리가 주는 고통이 더 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남자는 서술자가 건넨 핑거라임 농장 명함을 보고 앞으로도 핑거라임을 끝없이 찾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고통을 고통으로 덮는 것도 방법일까. 세상에는 너무나도 많은 아픔이 있고, 모두들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길 바라겠지만 때로는 남자처럼, 오히려 버리지 않고 견디고 싶은 아픔도 역설적이겠지만 있을 수 있다. 고통은 우리를 흔들리게만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

 

<레몬청 만드는 법>과 <핑거라임>은 오묘하게 닮은 두 과일의 시고 쓴맛처럼 엇비슷한 우리들의 삶과 사연을 보여준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사이 어디쯤을 넘나드는 온도의 문장을 통해 나 자신과 타인의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어떤 맛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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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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