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감을 모으는 사람들, '영감계정 챌린지' [문화 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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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고갈, 영감이 고갈된다는 건 이제 예술가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감은 이제 내 방식대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라면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되었다. 유튜버가 콘텐츠를 제작할 때도 필요하고, 개발자가 코드를 짤 때도 좀 더 깨끗한 코드를 짜기 위해 필요하고, 과학자가 논문을 쓸 때도 영감이 필요하다.
특히 나 같은 경우엔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새로움'과 '영감'을 늘 필요로 하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평소보다도 더 바쁜 나날을 보낼 때면 유독 영감이 없어 고갈된 느낌을 받곤 한다.
평소보다 더 빨리 영감을 소진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바쁜 와중에 내가 경험하는 많은 순간들을 내 생각과 느낌대로 충분히 소화해내지 못하거나, 충분히 생각하고 느낄 수 없이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탓에 영감이 쌓이기 어려웠던 게 컸다.
그래서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기록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바빠서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진다는 건 내 방식대로 생각하기를 미룬다는 뜻이고, 그만큼 나 다운 경험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느새 뻔한 생각을 하고, 타인의 감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는지 신기한 정도로 신박한 표현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만의 기록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아티스트 아이유도 본인이 작사한 곡 대부분은 일기에서 영감을 받았고, 봉준호, 박찬욱 감독도 자신만의 창작노트가 수백 권이 될 정도로 기록광에 속한다.
내 걸 좀 한다 하며 자기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자신만의 기록 노트를 꾸준히 써온 경우가 많다. 그러나 보통은 일기조차 해야 할 일로 받아들여 귀찮아 쓰다마는 경우가 많다.
출처 : 아이유 일기
하지만 최근 SNS를 중심으로 영감과 관련된 기록을 즐기며 기록하고 공유하는 '영감계정' 챌린지가 인기를 끌고 있다.
챌린지보다는 하나의 계정 '스타일' 로 바라보는 게 더 맞을 듯하지만, 이 영감계정 챌린지는 일상 곳곳에서 발견한 영감의 장면들을 잊지 않고 자신의 영감 계정에 기록하는 것이다.
출처 : 숭(이승희) SNS 인스타 스토리에 소개된 영감계정들
핵심은 자신의 본 계정 이외에 새로운 영감계정을 만들어 기록하고 공유하는 것인데, N개의 SNS 계정을 만들어 여러 개의 자아를 구분하는 사회 트렌드처럼 오로지 '나다운 영감'이라는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이는 영감 이외에 넘쳐나는 다른 정보들과 업데이트되는 게시글에서 벗어나 오로지 내 생각과 감상에 집중하기 위함일 것이다. 다만 혼자 하는 기록이지만, 혼자만의 기록이 아닌 디지털 플랫폼의 특성이 오히려 기록을 즐거운 일로 인식하게 한다.
이 '영감계정' 챌린지의 중심에는 전 배민 마케터이자, 현재 '두낫띵클럽(Do Nothing Club)'의 클럽장이자, 최근 발간된 책 '기록의 쓸모' 저자인 '숭(이승희)' 이 있다.
MoTV에 소개된 마케터 '숭'
인스타그램으로 활발히 영감을 만들어가는 그녀의 계정에는 누군가의 인터뷰가 실리기도 하고, 그녀가 일상 속 나눴던 대화 일부가 담길 때도 있고, 아날로그 노트에 흘기듯 급하게 쓴 기록 일부가 사진으로 담길 때도 있다. 급하게 쓴 기록은 그만큼 짧은 순간 지나가는 불확실한 경험의 순간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보여서인지 왠지 또박또박 쓴 글자보다 더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출처 : 숭(이승희) SNS
언젠가부터 TV 프로그램 '알쓸신잡' 같이, 패널들이 나와 인문학을 주제로 담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 점점 많아짐을 느낀다. 이는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의 철학이 담긴 담화를 들으며, 시청자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패널들의 의견에 더해 자기 생각을 확장해가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출처 : tvN 알쓸신잡
'알쓸신잡'이 패널들의 '대화'를 통해 영감을 받을 수 있다면, SNS 속 '영감계정'은 타인이 올린 '기록'을 통해 영감을 받을 수 있기에, 사람들의 인문학적 관심이 커지는 요즘 더욱 주목을 받는 게 아닐까.
나 역시 마케터 숭(이승희)의 영감계정을 통해 그녀의 시선을 빌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씩 확장해가고 있다. 물론 그녀의 영감 계정 이외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영감을 참고하는데, 나와 생각의 결이 맞는 사람들의 시선은 또 다른 배움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그녀가 일상 속 스쳐 가는 수많은 영감을 조금의 부지런함으로 차곡차곡 쌓아 스스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영감을 저장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이미 많은 사람이 자신의 영감 계정을 직접 인증하고 공유하는 등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학습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주장하는 덕분에, 과거보다 개선의 방향으로 가고는 있지만, 이미 한국식 주입 교육을 12년간 받고 자란 어른들은 오랜 시간 학습된 사고체계를 단박에 바꿔 창의적인 사고를 해내기란 쉽지 않다. 또, 스스로 영감을 만드는 것 자체에 서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감 계정이나 그 이외에 수많은 플랫폼으로 공유하며 내 영감을 기록하고, 타인의 영감을 내 것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동시에 경험한 현대인들이 가장 편하고 재밌게 할 수 있는 나에 대한 학습이자 영감의 기록 방식이 아닐까 싶다.
앞서 소개한, 기록의 낱장들을 모아 책을 쓴 숭(이승희)의 블로그엔 '기록의 쓸모'를 제작한 배경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을 위한 기록 책을 만들고 그 책의 제작과정 기록이라니, 저자는 정말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출처: 숭(이승희) 블로그, 책<기록의 쓸모> 제작과정
그리고 그 기록의 마지막엔 이런 글이 있다.
사실 누군가에게는 내 책이 엄청나게 쓸데없을 수 있지만 여전히 나는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믿는다. 이 책이 많은 사람에게 부디 쓸모있는 책이 되기를 바라본다.
- 이승희
그리고 그녀의 말 대로라면 우리는 매 순간 보고 느끼는 것들을 기록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다. 가장 나다운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잊지 말자.
[고유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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