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상처가 만드는 이야기, '트라우마 사전'

글 입력 2020.06.10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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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사전_표지 입체.jpg

 

 

등장인물 없는 이야기는 없다. 소설의 삼 요소인 배경, 인물,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이야기를 이끌어 갈 만한 인물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인물에게 충분한 개연성과 힘이 있으면 나머지 배경과 사건은 어렵잖게 따라온다.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인물을 만들까? 백지를 앞에 두고 몇 백페이지 분량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물을 탄생시켜야 한다니, 지난한 고뇌가 딸려온다. 이 고민을 도와주기 위해 새로운 가이드북이 출간됐다. 윌북 출판사의 <트라우마 사전>. 부제는 '작가를 위한 캐릭터 창조 가이드'다. 원제는 'The Emotional Wound Thesaurus'로 직역하면 '감정적 상처에 대한 유의어 사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감정적 상처의 힘


 

이 책은 일반적인 작법서에서 살짝 벗어나 특정한 주제에 집중한다. 바로 인물이 가질 수 있는 '감정적 상처'들이다. 저자는 왜 여기에 주목했을까? 이야기가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현실 세계의 심연에 대해 말하려면 다른 무엇보다 이 주제에 천착해야 하기 때문이다.

 

 

"욕망, 욕구, 신념, 감정 등 인간의 삶을 반영하는 가치 있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바로 캐릭터가 가진 '감정적 상처'이다." p.22

 

 

감정적 상처란 삶의 예기치 못한 불행과 고통이다. 이 상처들은 인물에게 크거나 작은 영향을 미치고, 성격을 변화시킨다. 육체적 상처와 마찬가지로 인물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 흔적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구현하느냐에 인물의 설득력과 존재감이 결정된다. 그러려면 '트라우마'라고도 불리는 이 고통에 파고들어 분석하고 탐구해야 한다. <트라우마 사전>의 저자는 창작자들이 이 과정을 수월하게 해나갈 수 있도록 인물이 겪을 수 있는 감정적 상처를 총정리했다. 단순히 상처의 종류를 나열하는 게 아니라, 글쓰기에 있어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항목들로 정리했다.

 

상당히 우울한 내용을 담고 있는만큼 저자는 일단 작가들의 마음을 달래고 시작할 것을 권장한다. '마음이 편한 장소에서 이 책을 볼 것', '글을 쓴 다음에는 휴식을, 필요한 만큼', '믿을만한 사람을 곁에 둘 것'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인물일지라도,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감정 소모가 심하다. 나 역시 뒷장으로 넘어갈수록 흥미보다는 세상에 넘쳐나는 불행에 걱정과 두려움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럴 때는 첫장으로 돌아와 이건 어디까지나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한 훈련임을 되새겨야 한다.

 

 

 

2. 고통은 깊게 흐른다: 상처의 스토리텔링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서문은 100페이지 가량으로 트라우마를 다루기 위한 스토리텔링 기법의 핵심을 설명한다. 감정적 상처가 초래할 수 있는 성격적 결함, 후유증, 자아관, 도덕관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만약 한 인물이 트라우마를 겪고나면 어떤 깊이와 모양을 갖게 되는지 세심하게 알려준다. 저자는 '인물호'라는 창작 기법을 소개하는데, 인물호란 이야기가 진행되며 인물, 특히 주인공이 겪는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다. 상처에서 시작한 인물의 여정이 개연성을 갖춘 꼴이 될 수 있도록 저자는 다양하게 조명한다. 인물의 상처를 심화해 악당으로 설정할 수도 있고, 치유할 계기를 주어 주인공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선이건, 악이건 입체적이고 진정성 있는 인물을 만들려는 노력이 완성도 있는 이야기를 창조한다.

 


"사람이란 결국 과거의 산물이다. 캐릭터를 진정성 있고, 믿을 만한 인물로 만들고 싶다면, 작가는 캐릭터의 배경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 감정적 상처라는 캐릭터의 배경은 특히 강력해서 캐릭터의 성격과 신념은 물론 그들이 가진 두려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완벽한 형태를 갖춘, 설득력 있는 인물을 만들려면 이들이 경험한 고통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p.24

 

인물의 상처를 브레인스토밍하는 방법과, 상처에 영향을 주는 요소, 작품 내에서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기법과 조심해야 할 것들을 꼼꼼히 짚어준 뒤 저자는 본론으로 넘어간다. 이제 인물을 괴롭히는 수많은 상처의 선택지들에 대해 알 차례다.

 

 

 

3. 상처 작법의 일곱 가지 요소


 

사전 형식인 본론은 총 7가지 목차로 나뉘어 400페이지 가량 갖가지 트라우마를 소개한다. 배신-범죄 피해-사회적 부정의와 개인적 고난-실패와 실수-어린 시절의 특정한 상처-예기치 못한 불상사-장애와 미관 손상 순이다. 각 목차 사이 연관성은 딱히 없으며 자,모음 순으로 나열해 원하는 부분만 찾아보기 용이하다. 첫 시작은 '가정폭력'이고 마지막은 '학습 장애'다. 각 단어를 작법에 필요한 일곱 가지 요소로 나누어 설명한다.

 


1. 훼손당하는 욕구 2. 생길 수 있는 잘못된 믿음 3. 가질 수 있는 두려움 4. 가능한 반응과 결과들 5. 형성될 수 있는 성격 특성 6. 상처가 악화될 수 있는 계기 7. 상처를 직면하고 극복할 기회
 

 

책에 등장하는 각 감정적 상처들은 모두 이 일곱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근친 상간'처럼 심각한 트라우마나 '가난'처럼 지속적으로 인물을 괴롭히는 상처, 혹은 '아이디어, 성과를 도난당하다'처럼 상대적으로 경미해 보이는 트라우마까지 빠짐 없이 다룬다. 물론 이 상처들이 경미한지 위중한지는 작가가 이야기를 창조하기 나름일 것이다. 이 책에서 상처에 차등은 없다. 아동기의 폭력부터 성인이 되고 난 뒤 겪는 고난까지 모든 상처는 그 흉터를 통해 삶의 깊이을 드러낼 수 있다.

 

트라우마를 단편적으로 설명하기만 하면 실제 플롯에 적용하기가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저자는 마지막에 유명 영화로 트라우마 사용의 예시를 들어준다. <어 퓨 굿맨>, <니모를 찾아서>, <굿 윌 헌팅>, <샤이닝> 속 주인공들이 어떻게 상처로 빚어진 인물이 되었는지 읽으면 영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보게 된다.

 

논외로, 나는 트라우마의 심리적 기제를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작가가 피하라고 한 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책이 작법 가이드가 아니라 현실의 트라우마 사전인 것처럼 몰입해 버린 것이다. 세상의 무자비함을 떠올려 보면 책 속 감정적 상처를 한번도 겪지 않은 사람은 드물텐데, 이 때 이들이 '훼손당하는 욕구', '형성될 수 있는 성격 특성', '상처가 악화할 수 있는 계기' 등을 읽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다. 현실에서 인물이 같은 일을 겪을 때도 비슷한 변화가 일어나기에, 그 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꼭 나라는 건 아니다) 해부대에 오른 느낌이라 언짢은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작법 실용서에 자아를 투영한 내 탓이고, 책을 끝까지 읽으면 어쩐지 희망찬 여운이 남는다. 이는 상처 작법의 일곱 번째 요소 '상처를 직면하고 극복할 기회' 때문이다. 모든 감정적 상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요소는 모든 인물에게 기회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상처는 악화될 수도 치유될 수도 있으며, 어떤 상처도 사람을 극복할 기회조차 없을만큼 망가뜨릴 수는 없다고 말하는 이 마지막 요소가 내게는 이 책을 계속 읽게 하는 동력이었다.

 

그러면 그 기회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읽다 보면 알겠지만, 공통적인 건 다른 사람은 나와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자신의 상처를 인정하고, 변화하고 싶다는 의지로 도움을 청하는 일이다. 혼자서 껍질을 깨듯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인물은 없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내면의 힘과 가능성을 믿어야 가능한 일이다. 잘 만든 한 편의 이야기는 이 지난한 여정을 통해 독자들의 상처에 내려앉는다. 창작에 고뇌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길잡이 삼아 삶의 심연을 더 깊게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

 

 


 

 

트라우마 사전

-작가를 위한 캐릭터 창조 가이드-

 

 

지은이

안젤라 애커만, 베카 푸글리시

 

옮긴이

임상훈

 

출판사

윌북

 

분야

글쓰기, 창작 작법

 

규격

152*220mm

 

쪽수

508쪽

 

발행일

2020년 4월 20일

 

정가 

22,000원

 

ISBN

979-11-5581-266-2 (03600)

 

 

[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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