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파도'라는 시 - 파도를 걷는 소년

글 입력 2020.05.1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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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걷는 소년

The Boy From Nowhere, 2020

 

감독 : 최창환

배우 : 곽민규, 김현목, 민동호, 김해나, 강길우

 

제주에서 외국인 불법 취업 브로커로 일하는 이주노동자 22세 김수. 폭력 전과로 사회봉사 명령을 받은 수는 해안을 청소하다가 바다에서 서핑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빠진다. 그는 쓰레기통에서 우연히 주운 보드를 가지고 무작정 바다에 뛰어들고, 그런 그에게 해나가 다가와 위험하다며 태클을 건다. 그날 이후, 수는 해나와 서프 숍을 운영하는 똥꼬에게 서핑을 배운다. 한편 갑보 사장은 수에게 그가 필요한 일이 있다며 배를 타줄 것을 제안하는데.

 

***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 바다에서는 서퍼들이 파도를 타고 있다. 남자는 그런 그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동경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부러움이라고 해야 할까. 복잡한 감정들이 마치 파도처럼 그의 얼굴 위에서 일렁거린다. 그의 이름은 김수. 중국인 어머니를 둔 불법 이민자 2세다. 갑보 사장 밑에서 외국인 불법 취업 브로커로 일하고 있다. 얼마 전, 그는 폭력 전과로 출소한 뒤 법원으로부터 사회봉사를 명령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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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안에는 파도가 들어있다. 맹렬하고 거친 듯하면서도 해변을 쓸어주는 손길이 부드럽고 반짝인다. 짜디짠 소금기 속에서도 시원한 물결이 존재하고, 물속은 얼음장처럼 차갑지만 물 위로 비추는 햇빛만큼은 따스하다. 그렇게 파도 안에서는 모두가 공존한다.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에서 ‘파도’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모티브다. <파도를 걷는 소년>의 카메라는 대부분의 경우 풀샷(Full Shot)을 지향한다. 카메라의 각도 역시 정면, 90도, 45도 등으로 정직하다. 클로즈업은 거의 쓰지 않는다. 미디엄 샷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보니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다. 인물들의 동선 역시 연극과 닮아 있다. <파도를 걷는 소년>의 모든 장면은 누군가가 카메라 안으로 프레임인 하면서 시작한다. 반대로 끝날 때는 누군가가 프레임 아웃 하면서 끝이 난다.

 

이를테면 영화의 초반부, 수가 쓰레기 더미에서 버려진 보드를 발견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수는 쓰레기 더미를 비추는 화면의 왼쪽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와 오른쪽으로 빠져나간다. 잠시 후, 그는 다시 오른쪽에서 프레임인 하더니 버려진 보드를 주워들곤 왼쪽으로 프레임 아웃한다. 그리곤 다시 화면의 왼쪽에서 들어와 오른쪽으로 빠져나간다.


해나와 똥꼬가 수에게 보드를 빌려주기 위해 수의 집으로 찾아오는 장면은 수의 마당을 비추는 화면 안으로 해나와 똥꼬가 들어오면서 시작한다. 이윽고 수와 대화를 나눈 두 사람이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장면은 끝이 난다. 움직이는 건 인물만이 아니다. 외국인들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는 수를 길 건너에서 바라보는 해나와 똥꼬를 비출 땐 두 사람 앞으로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간다.

 

장면을 이렇게 찍으면 관객들이 피사체에 온전히 집중하기가 어려워진다. 대신에 이러한 움직임들은 영화 속에서 리듬을 만들어낸다. 뭍과 바다 사이를 오가는 파도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파도를 걷는 소년>의 모든 장면에는 저마다 파도가 하나씩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도를 걷는 소년>은 운율로 가득 찬 한 편의 ‘시’와 같다. 바다라는 시, 인간이라는 시, 삶이라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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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이 ‘제주도’라는 점도 눈길을 잡아 끈다. 2018년에 제주도는 내전을 피해 무비자 입국한 예멘인 500여 명이 난민 지위를 신청한 것이 알려지면서 몸살을 앓았다. 원래 개발도상국의 국민들이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비자가 필요하지만, 제주도는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별도의 조건 없이 대부분의 외국인들을 30일 동안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게 해줬던 것이다. 결국 갑작스러운 난민들의 유입에 제주도와 국가인권위원회는 지원을 요청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한바탕 떠들썩해졌다.

 

따라서 제주도를 배경으로 삼고, 불법 이민자 2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파도를 걷는 소년>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영화의 시작에서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관한 뉴스 보도를 들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파도를 걷는 소년> 초반에 심어준 기대처럼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등장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숫자도 적을 뿐더러 그들이 어떤 현실에 처해 있고,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진 않는다. 모든 건 불법 이민자 2세인 ‘수’를 통해서만 대신 다뤄질 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수에겐 중국인 어머니가 있다’, ‘수는 돈을 모아 어머니에게 가려고 한다’ 정도를 제외하면 수가 어떤 사정이 있는지, 한국에서 살면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이 영화가 자기모순에 갇혀버린다는 점이다. <파도를 걷는 소년>의 악역은 조선족 출신인 갑보 사장이다. 한편 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한국인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사려가 깊다. 비싼 서핑 보드를 빌려주는가 하면, 수와 필성에게 공짜로 서핑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적당한 충고도 던져준다. 심지어 먼저 자리를 떠난 수가 걱정된다는 이유로 차를 타고 밤새 제주 시내를 돌아다니는 살뜰함까지 갖췄다. 영화 속에서 불법 이민지를 대하는 한국인들의 적대적인 모습은 오로지 갑보 사장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될 뿐이다(심지어 그마저도 수를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게 하려는 술수처럼 보인다). 결국 ‘한국인=선한 캐릭터, 조선족=악한 캐릭터’라는 기존 한국 영화의 신화와도 같은 공식을 <파도를 걷는 소년>도 끝내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온몸이 은은한 감동으로 푹 젖어든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왜 하필이면 ‘서핑’을 소재로 삼았을까. 생각해보면 서핑만큼 이상한 스포츠가 또 없다. 기껏 힘들게 팔을 저어서 파도를 이기고 바다로 나아가면, 다시 그 파도를 타고 다시 뭍으로 돌아오는 스포츠가 아니던가. 햄스터의 쳇바퀴도 아니고서야 뻘짓도 그런 뻘짓이 없다. 그런데 그런 무의미한 스포츠에 수는 매료되었더랬다.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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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는 불법 이민자 2세다. 아버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어머니는 중국인인 것으로 나온다(아마도 그녀는 추방당했을 것이다). 일단 수에게는 여권이 있는 걸 보니 그의 국적은 대한민국이지만, ‘필성이야 한국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치지만, 너는 여기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니?’라는 갑보 사장의 말을 통해 그의 삶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알 수가 있다. 한국인이지만 어머니가 불법 이민자라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중국인 어머니를 뒀지만 국적이 한국이고, 평생을 한국에서 살아온 수는 중국인들에게 그저 외국인일 뿐이다.

 

따라서 수는 어디에도 속해 있지 못한다. 아마도 이는 오늘날 많은 불법 이민자 2세들이 겪고 있는 공통의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뭍과 바다 사이에서 양쪽을 쉼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마치 서퍼들처럼.

 

하지만 서핑을 배우며 수는 그러한 방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서핑의 가장 큰 재미는 파도를 타고 뭍으로 돌아오는 데에 있다. 얼마만큼 바다로 나가는지가 중요한 스포츠가 아니다. 얼마나 멋지게 뭍으로 돌아오느냐가 더 중요한, 멋지게 실패하는 방법을 배우는 스포츠였던 것이다.

 

TV에 나오는 전문 서퍼들처럼 타려면 얼마나 타야 하냐고 묻는 수에게 해나와 똥꼬는 ‘얼마나 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맨날 타야지’라고 대답한다. 모든 게 능숙해지는 언젠가를 기다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처음부터 모든 게 능숙한 사람은 세상에 없다. 서툴러도 된다. 실수해도 된다. 우리 모두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니까. 그냥 꾸준히 하면 된다. 하다 보면 알게 되는 법이다. 위태위태한 순간이 오더라도, 그래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지라도 삶의 밸런스를 부여잡고 끝끝내 버틴다면 당신은 다시 나아갈 수 있다. 해나도 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파도를 잡겠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깐 어느 순간 길이 보이더라. 그리고 그걸 나랑 같이 보는 사람들도 보이고.” 해나의 그 말로 인해 수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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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꼬에게 그날의 일을 사과하러 온 수는 다시 한번 파도가 타고 싶다고 울면서 말한다. 똥꼬는 그런 그를 데리고 바다로 나아간다. 카메라는 그런 두 사람을 멀리서 담는다. 아마도 독립영화의 여건 상 수중촬영은 어려웠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연출이 오히려 묵묵히 뒤에서 지켜보는 어른의 시선처럼 느껴져 더할 나위 없이 뭉클해진다.


파도를 타면서 자꾸만 넘어지는 수를 보며 서핑 동호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아쉬운 소리를 내뱉는다. 그러자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기대하지 말고 타러 가자.” 어쩌면 이건 우리에게도 필요한 말이 아니었을까. 무작정 기대와 응원을 하는 것보다 실패해도 괜찮으니 뒤에서 바라봐 주는 것. 그리하여 모두가 파도 속에서 저마다의 길을 찾는 것.

 

다시 파도를 타러 나가는 수를 비춰주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리고 영화의 첫 장면에서 보여준 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얼굴을 발견한다. 영화관을 빠져나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분주히 돌아다니는 사람들과 자동차를 보며 우린 저마다의 파도를 떠올린다. 이제 ‘파도’라는 시의 다음 구절은 무엇으로 채워지게 될까. 그 몫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

 





파도를 걷는 소년
- The Boy From Nowhere -


각본/감독 : 최창환
 

출연

곽민규, 김현목

김해나, 강길우, 민동호

 

장르 : 드라마

개봉
2020년 05월 14일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상영시간 : 97분



 
 
[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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