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금, 여기 있을 쇼팽을 상상하며 - 소설처럼 아름다운 클래식 이야기 [도서]

글 입력 2020.04.2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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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클래식이란 자장가 또는 허전함을 채워주기 위한 잔잔한 배경 음악 그뿐이었다. 의미 그 자체로 고전적인 음악, 그래서 쉽게 마음으로 와 닿지 않던 감성, 모든 곡이 비슷하게 들렸던 클래식 연주회, 나는 그동안 클래식을 피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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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책을 펼치니 학창시절부터 익히 들어왔던 낯익은 이름들이 있었고, 첨부된 QR코드로 음악을 재생했을 땐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편안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전달되는 익숙한 감각과 기억들은 어느새 경직되어있던 몸과 마음을 자연스럽게 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없는 줄만 알았던 나와 클래식 간의 역사가 차례로 나열되자, 클래식을 듣다 잠들 일은 없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새로운 취향을 갖게 되는 일이란, 하나의 커다란 우주를 안게 되는 일이기도 하니까. 무엇이, 어떻게 또 얼마나 넓어질 수 있을지 막연한 기대가 부풀었다.



<녹턴 E♭장조 Op.9-2>


피아노에서 손을 뗀 지는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돌이켜보면 피아노를 배우던 기억이 지금의 크고 작은 나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피아노에 대한 기억은 꽤 소중했다. 이유인즉, 그즈음에 음악과 관련된 최초의 감각들이 자리하고 있을 거라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쇼팽의 <녹턴 E♭장조 Op.9-2>를 재생하면 한 번에 너무 많은 기억이 밀려오고 나가기를 반복한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첫 번째 역사였다. 난생 처음 나갔던 피아노 콩쿠르 대회, 한 옥타브 위의 건반을 짚지 못해 땀을 삐질대던 짧은 손가락, ‘트릴(trill)’이라는 기교를 간절히 해내고 싶어 건반이며 책상이며 손을 얹는 곳마다 피아노를 쳐보이던 나, 그리고 마지막엔 수없이 연주하고 또 들었던 이 곡을 지금 다시 연주하는 상상을 했다.

그렇게 <녹턴>과 쇼팽을 읽어내려갔다.
 
 

언제나, 폴란드를 연주하며


쇼팽은 39살이라는 짧은 생애의 전반은 폴란드에서 그리고 후반은 프랑스에서 보냈다. 폴란드인으로서 강한 정체성을 지녔던 쇼팽은 프랑스에 살았지만 내내 고국을 그리워했다. 끝내 폴란드에서 생을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폴란드로부터 오는 물건이라면 아주 작은 물건이라도 각별히 아꼈다는 그의 음악엔 언제나 폴란드를 그리워하던 사무치는 마음이 담겨 있다.

 
<화려한 대왈츠 E♭장조 Op.18>


특히 19세기 전반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뒤 정치와 혁명에 염증을 느낀 빈 사람들은 향락으로 스트레스를 풀고자 했다. 그래서 그시절 빈에서는 남녀가 부둥켜 안고 빙빙 도는 형태의 왈츠가 유행했다.

하지만 쇼팽은 빈에 머무는 동안 “빈의 왈츠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고, 곧이어 그가 사랑하는 풍경을 왈츠를 작곡했다. 동갑내기 작곡가였던 슈만이 ‘몸과 마음이 춤추는 음악’이라 평한 <화려한 대왈츠 E♭장조 Op.18>를 들으면, 그리하여 나는 여기에는 없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폴란드 시골 춤곡인 마르주카에 가깝다는 그만의 왈츠곡은 가본 적 없는 국가의 풍경과 사람들을, 그들의 춤사위를 상상하게 한다. 쇼팽이 사랑하는 폴란드에 언젠가 가보고 싶다.
 
 

'그대는 나의 루바토(Rubato)'

* 위 소제목은 다린의 Rubato의 가사 일부를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녹턴>으로 시작해 연이어 들은 음악 하나하나가 ‘쇼팽’으로 귀결되어 마음 깊숙이 남은 건, 다름아닌 쇼팽의 삶에 있었다. 그의 삶과 서사를 읽어 내려가던 나는 어느새 책은 덮어두고 쇼팽의 노래를 검색하여 듣는 중이었다. 쇼팽 관련의 또다른 책을 펼치는 중이었다.
 


쇼팽은 요란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야심을 두지 않았고 자기 생각을 온전히 상아 건반으로 옮기는 데 만족했다. 합창이나 합주의 효과, 무대미술가의 수완을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힘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본인의 목표에 도달했다.


- 로베르트 슈만, 「음악과 음악가」

 


‘허세를 싫어했고, 과장된 칭찬을 고마워하지 않았으며 다른 피아니스트를 입에 발린 말로 추켜세우지 않았다’는 쇼팽. 자신에게 충실했던 삶에 대한 서술과, 그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음악을 함께 듣는다는 건 무한한 해석과 영감이 솟구치는 일이었다.

 
<녹턴 G단조 Op.37-1>


<화려한 대왈츠 E♭장조 Op.18>는 쇼팽이 사랑하는 폴란드의 어느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면, 이 곡은 고국을 그리워하는 쇼팽의 쓸쓸한 뒷모습을 상상하도록 한다. '향수'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곡 <녹턴 G단조 Op.37-1>다.

이탈리아어로 ‘도둑맞다’, ‘잃어버리다’라는 의미를 지닌, '루바토(Rubato)'라는 연주기호가 있다. 이 기호가 표시된 부분에서는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에 따라 획일적인 템포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쇼팽은 루바토를 널리 사용한 작곡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루바토는 바람에 나무의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나뭇잎만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라 말한 적 있다.

주변사람에게 따뜻했지만, 내면을 뒤흔드는 격동이나 진한 마음은 밖으로 터놓는 일이 드물었다던 쇼팽. 그는 자신의 안으로 소중히 품어왔던 고뇌와 감정을 음악으로써 자유롭게 표현했다. 오래 아껴둬었던 만큼 음악으로 표현되었을 때의 명확함과 섬세함은 설명하기 어려웠을 정도라고 한다. 루바토로 하여금 풀어놓는 그의 자유로운 감정은 음악에 한정되어 있었기에 더욱 아껴듣고 싶다. <녹턴 G단조 Op.37-1>의 첫음에서의 루바토에선 두 손을 꼭 쥐게 된다.

*

쇼팽은 ‘녹턴’을 녹턴이라 부르지 않았다. 악보에 ‘느리게, 짙은 표정으로(Lento con gran espressione)’라고만 써넣은 게 전부였다고 한다. 하지만 제목이 녹턴이어야 악보가 잘 팔린다는 출판업자의 설득으로  악보는 ‘녹턴’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릴 적 피아노를 연주할 때 매번 받아온 지적은, 감정을 담아 연주하라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의 나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피아노를 배우던 마지막날까지도 연주에 감정을 담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녹턴>을 다시 듣는 요즘, 악보 위의 여러 지시에 허둥대며 음을 눌러가기보다 악기와 연주, 그리고 멜로디의 감정선을 따라가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한다. 쇼팽의 삶을 들여다본, 또 200년 전의 음악이 지금의 나를 관통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중인 요즘, 내가 <녹턴>을 다시 연주한다면 그때와는 다르게 연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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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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