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많던 시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문화 전반]

'잠시 멈춤'의 지혜
글 입력 2020.04.16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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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시간이 너무 빨리 갑니다만..."

"얘야, 이제부터 더 빨리 갈 거란다."


 

언제부터인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에 가속도가 붙는 것만 같다. 이번 달의 한 달이 지난달의 한 달보다, 이번 주의 한 주가 저번 주의 한 주보다 더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가끔은 시간이 나를 상대로 장난을 치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의 나를 더 혼란에 빠트리는 것은 아주 오랜만의 만난 상대방의 인사말이다. "너는 항상 그대로구나."라는 말을 듣자면 어쩐지 좀 억울해진다. 시간이 그토록 빠르게 나를 관통하는 와중에 딱히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과 함께, 그 말을 던지는 상대방조차도 그대로라는 사실에 또 한 번 의아해한다. 아, 어쩌면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으로 돌며 결국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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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urtis MacNewton

 

 

시간에 관해서라면 진절머리가 나던 때가 있었다. 바로 고3 수능 시험을 준비하던 때였는데 그때의 나는 지나칠 정도로 시간에 집착하고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누구보다도 빨리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하려는 마음에 친구들과 잠시 떠들고 인사하는 시간조차도 아깝게 느껴졌던 것이다. 길을 걸어 다니는 시간에는 항상 영단어 카드를 들고 다니면서 눈 뜨고 있는 시간은 조금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욕심을 부렸다. 그렇게 시간의 압박과 낭비에 대한 죄책감이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몰라서 괴로워했다. 잠깐 주어진 휴식 시간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대충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때우거나 그저 누워있는 게 다였다. 이도 저도 아닌 자유 시간을 보낸 후 항상 남는 피로감과 권태감은 나로 하여금 더욱 불안감과 불충분한 느낌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시간이 주는 압박감과 조급함에 시달리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바쁜 사람이어야만 했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시간에 쫓기고, 할 일이 쌓여서 언제나 바쁜 그런 성실한 사람으로 나를 포장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말해야 될 것이다. 이렇게 '바쁜 사람' 코스프레가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그 어떤 일도 깊이 있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애써서 아꼈던 그 많은 시간들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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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brizio Verrecchia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바쁜 시대를 보내고 있다. 정신없이 보내는 하루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칭송받아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때이기도 하다. 더구나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것은 대부분 산만하고 즉흥적으로 빠른 쾌락과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적은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요즘에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을 점점 기피하려고 한다.


깊이 있는 사색과 신중함, 여유, 고민의 시간을 우리도 모르게 빼앗겨 버리는 것이다. 모든 것들이 빠른 시간 속에서 완결되어야 하다 보니 그만큼 깊이는 얕아지고 많은 것들을 다뤄야 하는 피로감에 시달리게 된다.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결코 충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는 그렇게 짧아진 호흡과 집중력으로 시간의 빈곤함을 좀먹으며 살아가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불안감에 대해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다수의 사회적, 경제적, 제도적 제약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상황에 대해 더 조급하고 빠르게 대응하도록 부추기며 인간의 유한함을 최대한 묵살하려 한다. 하지만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주관할 수 없는 가장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이지 않은가.


모든 것은 시간 앞에서 무력하다. 그 어떤 존재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시간의 영원성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함을 창조해내는 것도 바로 인간의 역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과속의 시대를 거스르는 느림으로의 회귀가 필요하다. 우리는 더욱 자유롭게, 신중하게 방해받지 않는 하염없이 느린 시간을 되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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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isa CB



위대한 것들에는 그에 비견하는 오랜 기다림과 끈기, 인내, 노력의 과정이 수반된다.  토마스 기르스트의 『세상의 모든 시간』에서는 느리게 사는 지혜를 다루며 '천천히'의 미학을 즐기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압박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지름길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은 꽤나 큰 용기를 요구한다.


타인의 속도에 휩쓸려 가던 인생에서 잠시 멈춤으로써 자신에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이다. 사회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더 빠르고 더 성장하기를 부추긴다. 하지만 침묵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느린 시간들은 불안의 시대에서 단단한 중심을 잡아주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효율성, 최적화, 경제성의 논리 하에 게으름은 멸시의 대상이 된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으름 자체는 옹호할 만한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의도적인 게으름은 위대하다. 게으름, 느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오히려 순간에 더욱 몰입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는 태도가 진정한 게으름의 미덕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베짱이 같은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변명은 우리 모두 그만두도록 하자. 자신의 감정에 더욱 귀 기울이고 보다 본질적인 내면을 마주하기 시작할 때,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훨씬 더 매력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을 넘어서 영원이라는 관념을 일깨우는 보다 높은 가치를 향해서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시간을 좀 더 여유 있게 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균형과 평온함을 가져야 할 때, 지금이 바로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을 용기를 낼 때다.

 

 

서두르지 않고 현명하게 살면,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이며 사소한 두려움과

사소한 쾌락은 현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월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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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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