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를 읽다, '시'를 보다. [문학]

시를 읽다
글 입력 2020.03.31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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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 포스티노>



‘시’를 좋아하는가? 그 전에 ‘시’를 접하는가? 마지막으로 시를 읽은 것이 언제인지 떠올려보자.

꽤 많은 이들이 흐릿한 기억 속 학창시절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국어 교과서 속 빼곡히 나열되던 글자와 그것에 관한 분석들. 열심히 찾아 헤매던 시적 화자의 의도와 행간 사이 꾹 눌러 담긴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던 좌절은 어느 새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이제는 성인이라는 어설픈 타이틀을 달면 많은 것들이 바뀐다. 변화들은 반갑기도 아쉽기도 하다. 더 이상 미성년 학생이라는 제도의 울타리 속에 나를 감출 수 없고 필요한지조차 몰랐던 책임과 권리들이 줄줄이 나를 타고 오르며 옥죄어 온다.

필수 교육과정은 먼 이야기가 되었고 더 이상 아무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는다. 더 배울지 그만둘 것인지 그 어떤 선택도 나의 손아귀 속에 덩그러니 남겨질 뿐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우리들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들에 쏟을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것이 학창시절 질리도록 마주하던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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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죽은 시인의 사회>



교과서 속의 시는 늘 우리가 정복해야 할 무언가였다. 시인의 진짜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교과서에 나와있는 의미를 외워야 했고 적용해야 했다. 각각의 단어에는 이미 정해진 속뜻이 있었고 다른 해석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교과서와 수능에서 멀어 진지 오래고 시와 나 사이를 방해하는 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는 딸기를 그냥 딸기로 이해해도, 복숭아로 이해해도 상관이 없다.

시는 한국에서 한글로 즐길 수 있는 예술 중 독보적이다. 그것은 한글로서 한글의 형태로 존재할 때 우리들에게 가장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단어들과 부드럽게 반짝이는 운율의 의도는 모국어가 아니라면 쉽사리 알아차리기 힘들다.

운율, 비유, 심상과 같은 개념들이 이미 사라졌어도 괜찮다. 한국어를 쓰는 우리에게 그 시들은 어딘지 강단 있고 어딘지 부드러우며 어딘지 은밀하게 느껴질 테니 말이다. 종이 위가 아니라면 무의미할 활자들은 무력해 보이지만 일단 한번 읽어보자. 삶에서 마음에 들어오는 시 한 구절쯤은 품고 사는 사람은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내가 만났던 시들 중 나의 마음에 다가왔던 시 몇 편을 소개해본다.
 


소년-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 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 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ㅡ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ㅡ아름다운 순이의 얼굴은 어린다.



산문시로 마치 짧은 이야기를 본 듯한 느낌의 시다. 윤동주의 시 중 (상대적으로)덜 알려진 편이지만 그 아름다움과 순수함은 다른 시 못지않다. 흔히 파란물감은 눈물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얼굴과 손바닥엔 파란 물감이,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른다고 표현되어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표현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의 흐름을 따라 직관적으로 상상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하늘에 물들어버린 눈썹과 뺨의 파란 물감 그리고 손안에서 흐르는 강물 속의 순이. 이렇게 상상하다 보면 머릿속에서는 이미 명화가 한 폭 완성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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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동주>




교목-이육사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
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

낡은 거미집 휘두르고
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
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라.

검은 그림자 쓸쓸하면,
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대한민국에서 교과과정을 끝낸 이라면 모를래야 모르기가 힘든 시인 이육사의 시이다. 그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일제에 절대 굽히지 않는 선비의 정신으로 수 많은 시들을 썼다. 교목은 키가 8m 이상으로 크게 자라는 나무를 의미하며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주체성을 표현해낸다.

나에게도 이 시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너무나도 마음이 흔들리지만 흔들려서는 안 되는 시기,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이 시를 스터디플래너의 맨 앞장에 한 글자씩 정성 들여 옮겨놓고는 마음이 지칠 때마다 다시 읽곤 했다.

비록 이육사의 대의(?)에 비하면 소소한 목적이지만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찬 시를 읽다 보면 나에게도 다시 강인한 마음이 생겨 다시 한번 굳은 결심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겨울 일기-문정희

 

나는 이 겨울을 누워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려
염주처럼 윤나게 굴리던
독백도 끝이 나고
바람도 불지 않아
이 겨울 누워서 편히 지냈다.

저 들에선 벌거벗은 나무들이 
추워 울어도
서로 서로 기대어 숲이 되어도
나는 무관해서

문 한번 열지 않고
반추동물처럼 죽음만 꺼내 씹었다.
나는 누워서 편히 지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이 겨울.


세상에는 많고 많은 사랑과 이별의 시가 쓰여져 있지만 그 중 이별의 허무와 체념에 대해 이렇게나 외롭게 표현하고 있는 시는 그리 많지 않을 듯 하다. 시에 쓰인 모든 단어들은 모두 지독한 외로움을 품고 있어 입술로 소리 내어 읊을 때 마다 심장 한 켠에 시린 바람줄기가 불어오는 것을 느낀다.

본디 아픔은 드러내기보다 속으로 삭힐수록 더 절절한 법. 이별을 할 때마다 나는 반추동물처럼 이 시를 자꾸 꺼내 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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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한번은-오세영

 

우지마라 냇물이여,
언제인가 한번은 떠나는 것이란다.
우지마라 바람이여,
언제인가 한번은 버리는 것이란다.
계곡에 구르는 돌처럼,
마른가지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삶이란 이렇듯 꿈꾸는 것.
어차피 한번은 헤어지는 길인데
슬픔에 지치거든 나의 사람아,
청솔 푸른 그늘 아래 누워서
소리 없이 흐르는 흰구름을 보아라.
격정에 지쳐 우는 냇물도
어차피 한번은 떠나는 것이란다.
 

모든 만남에는 이별이 있다. 하물며 잠시 스치는 냇물과 바람조차 우리를 떠나간다. 과연 우리에게 만남이란 무엇일까? 어차피 이별을 한다면 과연 이러한 만남에 의미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만남의 허무에 사로잡힐 때면 이 시를 읽어본다. 그래, 어차피 한번은 떠나는 것, 슬픔과 허무에 지치기 전에 미리 흰구름을 마주한다. 아기가 잠들기 전 속삭이는 어머니의 노랫소리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시 구절은 지혜로운 조언으로 와 닿는다.


[김유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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