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진정한 순수의 언어 [문학]

루쉰, 『아Q정전』(열린책들, 2011)
글 입력 2023.11.1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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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순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인간의 내면을 향해 가라앉는 행위여야만 한다고.

 

화려한 자본의 유혹에도, 정치적 상황이 만드는 외압과 충동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인간을 향해 정직해야 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의미라고 생각했다. 자극과 쾌락을 위시한 자본의 논리를 충실하게 재생산하는, 혹은 역사적 판단을 내리고 정치적 주장을 내세우는 문학은 본질에서 빗겨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문학 역시 훌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의식적으로 약간의 거리감을 두며 읽어나가곤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오래된 소설들을 읽었다. 시대정신, 역사적 사명, 계몽의 주제의식을 내세운 작품들에 빠져들면서 문학의 순수성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내가 고집했던 문학의 순수성과는 분명 거리가 있을 소설들은 오히려 극단의 순수함으로 다가왔다. 문학을 순수하게 만나고 싶다는 나의 불순함이 오히려 어떤 문학의 순수함을 더럽히고 있었다는 생각. 편협했던 나의 믿음은 훌륭한 고전 문학의 정신 앞에서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루쉰의 소설집 『아Q정전』(열린책들, 2011)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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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해도 그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군중에 대한 본보기 희생물 아니면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다. 병으로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이제는 그것을 불행으로 여길 필요가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의 정신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에 나는 정신을 개혁하려면 문학예술이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 p.10

 


‘근현대 중문학의 아버지’이자 중화권 작가들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 받는 루쉰의 소설집 서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의 길로 걸어가게 된 이유를 루쉰 자신이 당당한 선언처럼 회고한 것인데, 힘 있게 써내려간 저 문장들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계몽’이다.

 

작가는 은밀할수록 위대하다. 위대한 작가의 작품에는 어떤 의식과 삶의 진실 한 단면이 은밀하게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작품을 통한 계몽을 공공연히 선언한 순간 작가는 문인이 아닌 지식인으로 변모한다. 스스로 지식인을 자처하는 루쉰의 선언은 달갑지 않지만, 그가 쓴 작품들은 그 불편함을 쉽게 해소한다.

 

 

그들이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 만큼, 나라고 잡아먹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 「광인 일기」 중에서

 

 

주변 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야만인이며, 결국 자신마저 잡아먹기 위해 노리고 있다는 편집증에 사로잡힌 한 인물의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쓴 「광인 일기」는 시대에 대한 루쉰의 우려를 드러내는 대표작이다.

 

식인이라는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물은 얼핏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만, 망상 속에서도 작동하는 이성은 섬뜩한 비유로 시대를 겨냥한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으며 “두려워 모두 의심 가득한 눈빛”(29쪽)을 할 필요가 없다면 삶은 얼마나 좋을 것인가.

 

루쉰은 자신의 여러 작품을 통해 낡은 봉건 제도에 매몰돼 사람이 사람을 죽이게 된 사회를 비판한다. 다만 그 비판의 방식은 우월한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처절한 문학적 절규에 가깝다.

 

 
당신들은 변할 수 있어. 자신의 진심부터 고쳐야 한다고! 앞으로는 사람을 잡아먹는 놈들이 용납되어 이 세상에서 사는 일이 더는 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당신들 자신도 잡아먹히고 말 거야. - p.33
 

 

루쉰의 작품에서 삶은 처절하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들고, 죽는다.

 

병에 걸린 아들을 제대로 치료조차 못하고 떠나보낸 후 형식적 장례에만 겨우 정성을 쏟거나(「내일」), 남편과 자식을 연이어 잃고 식모살이를 하다가 굶어 죽는다(「축복」). 사람들은 비이성적 미신에 의존하거나  오래된 비합리적 관습을 맹신한다. 소설집의 표제작이자 루쉰의 대표작인 「아Q정전」은 ‘아큐’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저항 없이 무지하고 무력하게, ‘서로를 잡아먹으며’ 살아가는 대중을 훈계한다.


그러나 대중에 대한 따끔한 회초리의 기저에는 사람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있다. ‘아Q’처럼 무지하게 삶을 영위하는 대중의 정신을 향해 총을 쏘지만, 때로는 사소한 충돌을 그냥 넘기지 않고 양심적으로 파출소를 찾아가던 인력거꾼의 모습에서 “용기와 희망”(76쪽)을 찾아내기도 한다.(「작은 일 한 가지」) 루쉰이 ‘작은 일’에서 지켜지는 인간의 존엄에 과묵한 애정을 표할 때 “현세에서 재미없게 살던 사람이 죽어 사라짐으로써 그를 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되는 것만으로도 남을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나쁠 것이 없었다”(191쪽)는 그의 냉소적 선언은 위악해진다.


루쉰은 지식인들에 대한 반성도 멈추지 않는다. 루쉰의 작품 속 서술자는 부조리에 적극 맞서는 개혁적 인물이 아니라, 소문을 듣거나 목격한 것을 기록하는 수준에서 멈춰선 냉소적 관찰자 시점의 인물이다.

 

이들은 대게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지식인 계급처럼 보이지만, 그들 역시 시대의 벽 앞에서 무력하다. (“우리가 미리 예상한 일들 가운데 마음먹은 대로 된 게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하나? 난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네. 내일 일도 모르겠고 바로 1분 뒤의 일도 모르겠어…….”「술집에서」)

 

그런 서술자를 앞에 내세우면서 루쉰은 한 시대의 비겁한 지식인의 표상을, 혹은 자기 자신마저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부분에서 문학의 순수성에 대한 나의 아집은 산산이 부서진다. (우리는 이미 시를 빌려 ‘부끄러움’을 말한 한 지식인을 ‘시인’으로서 사랑하고 있으니까.) 이 부끄러움이 계몽을 자처하는 문학의 순수성이다.


루쉰의 결론은 아마도 이렇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게 만드는 비참한 현실은 시대가 만들었으나, 그 시대는 결국 “마음을 고치치 않”(33쪽)는 사람이 만들어냈다는 것. 여전히 “진짜 사람”(35쪽)이 되지 못한 이들을 향해서(그리고 지식인인 자신을 향해서), 사람을 향한 애정에서 생겨난 그 순수한 안타까움을 참지 못한 루쉰은 제도의 밑바닥을 온몸으로 훑고, ‘광인’의 시선마저 빌려가며 펜으로 매질을 한다.

 

시대의 오물도 먼지도 기꺼이 함께 뒤집어쓴 채 “아이들을 구해야겠다”(35쪽) 스스로 채찍질하는 ‘사랑의 매’는, 어쩌면 작가가 쓸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문학적 언어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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