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산책길을 떠남에 함께 하고픈 노래 [음악]

글 입력 2020.03.27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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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학교 교정을 걸었습니다. 호수를 따라 능수 벚꽃과 겹벚꽃이 터지며 향긋한 단내를 풍기는 게 영락없는 봄이네요. 방 안에 틀어박힌 채로 창문을 통해서 해 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바람의 온도가 따뜻해지는 것을 구경만 하다 보니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느낄 새가 없었습니다. 자연은 무심하게도 혼돈한 사람들을 기다리기보다 가야 할 대로 흘러가길 택한 모양입니다.

 

비록 타의였지만 기왕 생겨버린 여유 시간에 할 만한 게 유달리 없는 일이 요즘 모두의 고민인 듯싶습니다. 늘 다짐만 했던 운동을 하기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약속을 잡기에도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SNS에서 본 뒤 가보고 싶던 작은 카페에 들어가는 것도 꽤나 무서운 일이 되어버렸죠. 그 덕에 400번 저어 만드는 달고나 커피가 유행할 수 있었겠죠?


이런 시기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모범적으로 수행하면서 찌뿌둥함을 해소할 수 있는 일, 바로 산책입니다. 고요 속에서 사색 섞인 혼자만의 시간 역시 소중하기는 하지만 때로는 적적할 때가 있습니다. 좀 더 다채로운 감각의 자극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그런 당신을 위해 ‘산책’을 테마로 한 노래 3곡을 소개하려 합니다.

 

 

 

가을방학 <속아도 꿈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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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방학 1집 EP [가을방학]


 

산책이라고 함은 정해진 목적 없이

얽매인 데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갈 것


누굴 만난다든지 어딜 들른다든지

별렀던 일 없이 줄을 끌러 놓고 가야만 하는 것


인생에 속은 채 인생을 속인 채 계절의 힘에 놀란 채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짝 안 맞는 양말로


산책길을 떠남에 으뜸 가는 순간은

멋진 책을 읽다 맨 끝장을 덮는 그 때

- 이를테면 <봉별기>의 마지막 장처럼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 굽이 뜨내기 世上

그늘진 心情에 불 질러 버려라”*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 이상의 1936년도 단편소설 봉별기逢別記의 마지막 부분 인용.


 

작가 이상의 자전적 소설인 단편 <봉별기>는 한 노래로 끝납니다. 각혈까지 하던 몸 약한 이상과 기생 금홍이 불안한 동거를 이어가던 끝에 금홍에게 결국 예전 생활에 대한 향수가 찾아옵니다. 가슴 아피 결별을 하고 몇 년이 지난 뒤 두 사람은 마지막 재회를 합니다. “이 생(生)의 영이별”일 그 자리에서 금홍은 은수저로 소반을 딱딱 치면서 구슬픈 창가를 부르기 시작하죠.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심정에 불 질러 버려라 운운(云云).” 금홍이 불렀을 이 가락을 상상하던 것이 이 곡의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시적인 가사를 곱씹다 보면 가사에 함축되어 있는 산책의 묘미를 발견할 수 있죠.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그저 마음이 끌리는 길로 가는 것은 언뜻 보면 체력을 소모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택이 연속인 일상에서, 우리가 ‘마음 끌리는 것’에 충실했던 경우는 몇이나 될까요? 식사 메뉴를 결정하는 시간? 그마저도 촉박한 시간에 쫓겨 간편히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습니다.


그렇다면 ‘줄을 끌러놓고’, ‘밤낮도 잊은 채 지갑도 잊은 채’ 오직 계절의 힘에 놀라며 산책하는 것은 밀도 높은 우리의 일상에서 유일하게 본능적인 욕구에 솔직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산책을 떠남에 으뜸가는 순간’이 바쁜 현실을 멈추고 멋진 책 속에 담길 때 그리고 그 책장을 덮으며 마음이 풍요로워질 때와 궤를 같이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산책하는 동안만은 ‘나’에게 충실할 수 있기 때문 아닐까요?

 

 


페퍼톤스 <공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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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톤스 3집 EP [Sounds Good!]

 

 

하낫! 둘! 셋! 넷! 씩씩하게 

더 밝게 더 경쾌하게

둘! 둘! 셋! 넷! 기운차게

아주 조금 더 기운차게

 

페퍼톤스 <공원 여행> 



많은 사람이 머리가 복잡할 때 하는 일 중 하나로 꼽는 것이 바로 산책입니다. 과학적인 원리는 잘 모르겠지만 왠지 걸음 하나하나를 뗄 때마다 머릿속에 뒤엉켜 있던 생각들이 한 겹씩 펼쳐지고 차례차례 반듯하게 접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 신통함에 매번 가슴이 뻐근해질 때면 두말하지않고 산책하러 나가곤 하죠. 살짝 젖어 있는 길, 휴일 아침 맑은 공기, 날 따라오는 시원한 바람, 길가에 가득한 아카시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작은 비밀의 공원. 찾고자 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자 장소이고, 사소하기 그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잠시 눈을 감고 가만히 이들을 상상해보길 바랍니다. 실제로 휴일 아침 맑은 공기 속에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탐스럽고 하얀 아카시아를 바라보는 일, 그러다가 문득 발견한 깨끗하고 작은 공원. 만약 우리가 실제 산책길에서 그런 경험을 조우한다면 무척 신선하고 산뜻한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또 그런 뜻밖의 발견이 삶을 조금 더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주죠. 그들이 우리에게 아무런 말을 건네지는 않지만 그냥 존재만으로도 복잡한 마음을 위로받고 자연스레 발걸음에 힘이 실립니다.

 

이 곡을 들으면서 가사 속 장면과 감각을 생생히 상상해보세요. 이 노래가 노골적인 위로의 가사 없이 아래처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물과 음악이라는 예술이 삶에 불어넣어 주는 원동력, 다시 말해 사람이 끊임없이 이들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어때 기분이 좋아졌지?

한결 맘이 후련해졌지?

여기 숨찬 내가 보이니?

너에게로 달려가고 있어

거봐 너 아직 그런 미소

지을 수 있잖아

 

페퍼톤스 <공원 여행> 

 

 

 

백예린 <산책> 커버곡


 

 

좁다란 길

향기를 채우는

가로등 빛 

물든 진달래 꽃

이 향기를 그와 함께 맡으면

참 좋겠네

 

소히 <산책> 

 

 

작년 가수 백예린의 사운드 클라우드에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두 곡의 커버가 업로드 되었습니다. “제가 위로받고싶을 때 듣는 노래들 커버에요. (...) 두번째 곡은 소히- 산책 이라는 노래에요. 2015년 여름 쯤에 이한철 선생님을 통해서 듣게 되었고 저에게는 더운 여름과 시원한 지하철을 생각나게 하는 곡이에요. 다들 출근길, 공부, 멋진 많은 일들 힘드시겠지만 같이 힘내보아요.”

 

‘산책’이라는 직관적인 제목에 선정했지만 사실 이 곡의 가사 내용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용입니다. 가수 소히가 2010년 발매한 앨범 에 실린 곡을 가수 백예린이 커버한 것입니다.

 

 

따뜻한 손 그리고 그 감촉

내가 쏙 들어 앉아있던 그 눈동자

그 마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주던 그가 보고싶어 지네


보고싶어라 그리운 그 얼굴

물로 그린 그림처럼 사라지네 

보고싶어라 

오늘도 그사람을 떠올리려 산책을 하네.

 

소히 <산책>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아직 저는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산책을 하다가 떠오르는 여러 얼굴들을 실제로 보고 싶어 하고 함께 온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쉬이 공감할 수 있죠. 특히나 요즘 같은 때에는. 같은 산책길을 매번 공유하던 사람이 있었다면 그 길목을 걸을 때마다 으레 그 사람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혼자 거닐던 길이라도 조용히 걷는 일에 집중하다 보면 유독 많은 것들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다가 사라집니다.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걸어가는 행위는 창조적인 방황이다.”라고 했듯이 말이죠.

 

이처럼 산책을 할 때마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 싸운 뒤로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얼굴, 좀 더 친해질 걸 아쉬운 인연 등등에 대하여 기쁨과 슬픔이 담긴 추억들이 피어오릅니다. 이 가사의 화자가 자꾸 산책하는 이유도 여타 방해물들 없이 온전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곱씹고 맘껏 그리워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쉽게 약속을 잡기 힘든, 그리고 잡아서도 안 되는 요즘 홀로 산책을 한다면 비록 상상에 그칠지는 몰라도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서울숲의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걷기는 사물들의 본래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일깨워주는 인식의 한 방식이며

세상만사의 제 맛을 되찾아 즐기기 위한

보람있는 우회적 수단이다

 

 

출처는 적혀 있지 않은 탓에 누가 한 말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죠. 그러나 출처를 굳이 밝히지 않은 것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걷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산책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 구절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지나가다 눈에 띈 들꽃이 달리 보였다든지, 촌스럽고 평범한 간판에서 유쾌한 지점을 발견했다든지 그저 익숙한 거리를 걷는 동안에도 우리는 세상만사의 제맛을 톡톡히 보아 왔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몸은 그다지 춥진 않았지만 길고 길었던 겨울의 생활 습관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 탓은 아니지만요. 하지만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봄이 도래했음을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공기가 달아지고 몸에 닿는 바람이 기분 좋게 시원해졌습니다. 혹시 집에서 답답한 생활을 하고 있다면, 봄의 기운을 느끼고 싶다면 산책하러 나가보는 게 어떨까요? 지지부진한 시간 속에서도 세상만사의 제맛을 조금이나마 되찾아 즐길 수 있지 않을까요? ‘산책’을 테마로 한 노래 세 곡과 함께 하며 그 시간을 더 풍부하게 향유하시길 바랍니다.

 

 

 

우제영.jpg

 

 




* 본문의 대표이미지의 출처는 백예린 사운드클라우드의 '선물' 트랙에 쓰인 사진입니다.

 


[우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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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헐대박
    • 기자님 오늘 내가 듣는 노래 다 듣고 계시네요 ㅋㅋ가을방학 근황도 추천이요 ㅋ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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