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 페미니즘은 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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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혐오가 놀라울 만큼 다양하고 산발적으로 표출되는 근래의 동향은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사회적 구분선이 얼마나 자의적이고 허구적인지 체감케 한다. 진짜 시민과 가짜 시민을 딱 잘라 나누고 진짜가 아닌 시민은 진짜 시민에 밀려 2순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더 나아가 받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겐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보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뤄져야 할 방역이라는 문제에 당면하면서도 사람들은 쪼개지고 또 쪼개진다. 어제 보호받았던 사람이 오늘 내쫓아진다.
정말 포스트모더니즘 따위의 이유로 진짜와 가짜의 구분선이 흐려진 것일까, 아니면 진짜가 정말 진짜가 아니었던 것일까.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 데 있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구분하는 것과 그 사람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다르다. 후자는 차별을 불러온다(전자가 후자로 쉽게 변질되기도 한다). 수많은 조건이 교차하는 인격이 아닌 그 자체로 가짜라서 존재조차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을 만들어버린다. 진정성이라는 자의적인 기준은 사람을 둘러싼 복잡한 논의를 간편하게 지워버린다. 사실 그 기준부터가 대부분 차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진짜 페미니스트를 찾는 움직임은 그래서 페미니즘과 배치된다.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잣대는 여성 해방의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고 의논하는 페미니즘 내부의 목소리가 아니라 페미니즘의 외부에서 페미니즘의 영역을 좁히는 방향으로 작동되는 기득권적 움직임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은 페미니즘의 발전이 아닌 페미니즘을 대체할 무언가를 향한다.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며 ‘이퀄리즘’이 등장한 것처럼 말이다. 실체조차 묘연한 진정한 페미니즘을 선별하는 프레임은 그 양태가 시시각각 변하는 현재의 페미니즘을 납작하게 눌러 언제나 틀린 것으로 만든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여성혐오와 그에 대항하는 페미니즘의 지형을 날카롭게 통찰하는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은 이 책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침범되고 파괴되는 여성의 공간에 대한 현실을 지적하며 공간의 외부에서 페미니스트의 진위를 가리는 움직임에 반대한다. 이 책은 여성과 페미니즘이 진짜 여성과 페미니즘에서 탈락되는 과정을 한국 사회의 면면을 비판적으로 들춰냄으로써 기술한다. 또한 예술사회학의 다층적 시각으로 여성의 몸, 여성의 장소, 같은 공간에서의 여성에게 주어지는 역할에 대해 다루며 ‘진정한 여성’이라는 기득권적 프레임에 국한되지 않는 여성의 다양한 가능성을 비춘다.
‘진짜’, 혹은 ‘진정한’에 대한 집착은 진짜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 반대다. 누구도 진짜가 아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5p)
'남혐'하는 페미니스트
페미니즘의 진정성을 위협하기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페미니스트는 ‘남혐’하는 페미니스트다. 그래서 ‘메갈’, ‘워마드’, ‘트페미’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한국 남자를 줄여 부르기만 해도 페미니스트로서 결격이다. 혐오의 정의를 단순히 ‘싫어하는 감정’으로 오독한 결과라고 해도 여성혐오와 ‘남혐’는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
저자가 든 예시처럼 남성을 비하하는 말로 쓰이는 ‘씹치’의 ‘씹’은 여성 성기를 비하하는 단어이며, 작은 성기를 이르는 ‘소추’는 성관계 경험만 있어도 ‘걸레’가 되는 여성과 달리 남성의 경험은 터부시되지 않고 그 기능부터 평가가 시작되는 차이를 드러내기만 한다. ‘남혐’을 할 때조차 작동되는 것이 여성혐오다. 두 개의 ‘혐오’가 같은 맥락에서 비교될 수 없는 이유다. ‘남혐’은 여성혐오에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고 ‘남혐’에 대한 비판은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이 될 수 없다. ‘남혐’은 페미니즘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여성혐오와 ‘남혐’이 같을 수 없는 무수한 이유 중 다른 하나는 국가와 민족이 여성의 편에 서 있지 않은 역사가 유구하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기록되지 않은 역사, 여성을 쏙 빼놓는 진보 정치, ‘미래가 창창한’ 남성들에게 관대한 사법 체계가 그것을 말해준다. 애국과 애족의 명분으로 여성을 착취하고 배제한다. 저자는 박근혜 정부 당시 제작된 가임 여성 지도가 중앙이 지방을 통제하듯 가부장제 국가가 여성을 통제하는 태도를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국가의 정상들이 회담을 가질 때 그 아내들을 분위기를 따뜻하게 풀어주는 역할로 한정하거나 그들의 외모와 패션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 역시 국가가 요구하는 여성의 고정적인 역할이 있음을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많은 경우 페미니스트는 국가와도 투쟁해야 한다. 국가의 얼굴을 한 여성혐오와 그에 맞서는 개인들의 ‘남혐’은 그래서 동일할 수 없다.
애국하지 않는 페미니스트
저자는 영화 ‘박열’에서 재현된 가네코 후미코의 실제 수기를 읽고 탈국가적인 시각에서 그의 인생을 짚어 내린다. 조국을 포기하고 연인을 선택한 것에서 그의 위대함의 전부를 찾는 것은 매우 한정적인 시각임을 지적하고 대신 여성혐오적 학대와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국가와 민족 중심의 사고를 끊어내어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데 힘쓴 한 여성의 분투에 집중한다. 또한 ‘우리에겐 아직 광복이 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와 일본 남자가 ‘우리’ 여자를 강간했다고 분노하는 한국 남성의 목소리를 대조한다. 국가는 해방되었으나 여성은 해방되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여성은 ‘진짜 페미니스트’에서 탈락된다.
가네코 후미코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라는 공간이 여성을 보호하지 않는다. 유리되는 여성의 공간은 그러나 끊임없이 침해받는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의 몸이다. 낙태의 자유를 외치는 여성은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몸은 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가 아닌 ‘내일의 주인공’을 위해 비워둬야 한다. 저자는 ‘진짜 페미니스트’를 가린다는 명목으로 침범받는 여성의 몸에 대한 담론을 여성의 목소리로 재구성한다.
여성은 남성의 밭이 아니다
남성을 ‘씨’로, 여성을 ‘밭’으로 규정하고 여성의 몸을 남성의 대를 잇기 위해 ‘경작’해야 할 공간으로 보는 가부장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이 인상적이다. 저자에 의하면 가부장제는 여성의 몸을 들어가야 할, 침범되어야 할 구멍으로 인식한다. 그 공간의 주인은 남성이다. 그래서 그 공간에 자신이 아닌 다른 남성이 들어가는 것에 격노한다. 그러나 잘못은 공간을 지키지 못한 여성에게 있다. 강간죄를 재판하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정조를 지키지 않았다고 힐난하는 한국의 법원은 작년까지만 해도 이러한 사고방식을 견지하고 재판에 반영했다. 그 피해자의 ‘피해자답지 않은 모습’을 물어뜯었던 여론을 아직도 기억한다.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작품 ‘설국열차’에 대한 인터뷰에서 터널을 질에, 기차를 남근에 비유하며 기차가 터널을 뚫고 질주하는 장면에서 성적 흥분을 느낀다고 했다. ‘마더’에 대한 인터뷰에서는 여성의 얼굴에 피가 튀는 장면에서 정액이 튀는 모습을 연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두 개의 발언이 비슷한 맥락으로 불쾌한 이유는 여성의 몸과 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적 시각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기로 뚫리고 돌파되며 남성의 성적 흥분이 투사되는 수동적인 대상물로서의 여성의 몸을 보는 시각 말이다. 여성의 몸은 남성이 깨야 할 퀘스트도, 남성의 욕구를 비춰야 할 거울도 아니다.
저자는 한국의 강간문화에 대해 언급하며 여성의 몸을 침탈의 대상으로 삼는 시각은 남성의 질서, 즉 공간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인용한 수전 브라운밀러의 말처럼 “모든 강간은 권력의 표현이다.” 재작년에 출간된 이 책은 소라넷이 폐쇄됐을 당시 무용한 결정이라고 인식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을 지적했으나 두 해가 지난 지금 들려오는 소식들은 더욱 충격적이다. 여성의 몸을 도구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남성적 시각은 밀폐된 공간에서 배양되었고, 태만한 공권력은 이들의 공간을 지켜주었다. 같은 시간 여성의 공간은 헐리고 무너져 위협받는다. 여기서 침범되지 않는 여성 고유의 공간을 주장하는 페미니스트의 등장은 당연하다. 가부장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공간을 지키려는 움직임은 가부장제와 여성의 균형을 주장하는 ‘이퀄리즘’에는 반할 수 있어도 페미니즘에는 상충할 수 없다.
페미니즘은 '가짜'들과 함께 간다
‘진짜 페미니스트’를 가리는 것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페미니즘의 진위 판정은 때때로 페미니즘 진영 내에서도 발생하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물론 더 나은 페미니즘을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는 외부의 잣대와는 목표하는 지점이 다르다. 그러나 완전무결한 페미니스트만을 바라는 것은 위험하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는 공공연한 명제에서, 그 인간에조차 속하지 못했던 여성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페미니즘은 태동했다. 완벽한 인간이 없듯이 완벽한 여성도, 완벽한 페미니스트도 없다.
저자가 지적하듯 남성연대 사회에서 한 남성의 실패는 개인의 실패가 되고 한 여성의 실패는 여성의 실패가 된다. 페미니즘이 맞서 싸우는 것은 이렇듯 여성에게 엄격하고 남성에게 관대한 사회다. 분명 완벽함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온다. 여성 해방을 목적으로 이뤄진 페미니스트들의 첨예한 토론과 기민한 비판은 지금 이 순간도 페미니즘의 발전을 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여성도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페미니즘이다. 불완전한 여성, 불완전한 페미니즘은 여성에게만 완벽을 요구하는 사회에 반대한다. 대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연대한다. 그렇게 여성은 앞으로 나아간다.
먼 훗날 무엇이 더 옳은 움직임이었는지 평가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덜 옳았다고 그것이 없었던 것이 될 순 없다. 페미니즘은 수많은 ‘가짜’들과 함께 간다. 완전함이라는 기준을 자의적으로 세워두고 거기에서 벗어나는 여성들을 가짜로 만들어버리는 가부장제 사회가 붕괴되고 여성이 인간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진, 진짜 페미니스트는 없다.
[조현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여자라는 이유로 고통받고 살인당하는데 익숙해져있으니 모를뿐이죠..
그쪽에게나 지옥이 아니겠죠
'편향된 시각을 가진 채 아무런 자아성찰 없이...' 이 말 자기소개는 아니신지?
피해받은 사람들이 피해받았다고 소리치는데 "아니야 너네 피해 안 받았어~ 이미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야~ 나쁘게 말하지 말고 착하게 말해~" 요러고 귀 막고 안 듣는 게 편향된 시각이겟죠^^
페미니즘은 정당이니 아름다움이니 그딴 수식어 붙일 사상 아니구요 그냥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외치는 비명입니다 ㅇㅋ?
결국 여자들은 연대합니다.
잘못된 걸 잘못됐다 말하는 것에는 어떠한 잘못도 없습니다.
남성에게 잘보여야 하는 페미니즘 따위는 없습니다. 흑인이 백인에게 잘보이려고 하지 않는 것처럼
5년전, 혜화역 광장에서 체제 전복을 부르짖고 현직 대통령에게 자살을 종용하며
경찰을 향해 ㅈ물을 뿌린다고 외치던 그 열띈 저항의 함성을 되돌아보며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성평등'한 사회를 얼마나 실현하였는가? 대중들에게 얼마나 많은 지지를 받았는가?
'소추 한남충'이라는 대상에서 얼마나 벗어났고, '갓치녀'의 주체성을 얼마나 확립하였는가?
여성인권의 향상, 차별받지 않는 평등한 사회라는 달콤한 꿀을 바른 이상 아래
도덕과 윤리가 결여된, 모순이 가득한 수많은 만행들로 인해
결국 반사회사상이자 준범죄집단으로 시민들에게 낙인찍혀
연대한다고 외치는 자신들 외에는 철저하게 배척당하기 시작하는 지금
페미니즘은 얼마나 성장하였는가? 페미니즘은 얼마나 성찰하였는가?
가부장제의 권력에 편승하여 부역자로 전락한 '명예한남'은 배제한다.
머리를 짧게 자르지 않고 긴머리를 유지하는 여성들은 배제한다.
한남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화장, 옷차림 등 스스로 코르셋을 찬 여성들은 배제한다.
차별과 혐 오에 침묵하지 않고, 오직 비연애 비혼 비출산을 외치며
한남 권력에 저항하는 생물학적 여성만이 페미니즘에 대한 평가를 정의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