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하지 못해 미안해

연애의 온도 (노덕 감독, 2013년作)
글 입력 2020.02.2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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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제 막 헤어진 커플이 있습니다. 참으로 길었던 연애였습니다. 사랑한 시간보다 싸웠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만 같은 기분은 왜일까요. 어쩌면 헤어짐이 그들에겐 더 나은 결말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도대체 뭐하는 거죠? 서로의 물건을 부숴 착불로 보내질 않나, 핸드폰 요금으로 폭탄을 만들어 서로에게 떠넘기질 않나. 취한 척 실수하는 것은 물론, 밑장 빼기부터 의자 바퀴 빼기 등등. 오, 이런....... 서로의 SNS까지 뒤지는군요. 헤어졌다면서, 새로운 애인이 생기는 건 꼴 보기 싫다 뭐 그런 건가요? 어째 하는 일들이 헤어지기 전이나 헤어진 이후나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두 사람 정말 헤어진 게 맞나요?


아아, 결국 남자가 먼저 판을 벌이려나 봅니다. 설마 여자가 있는 방으로 찾아가려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여긴 회사 워크숍 자리가 아니었나요? 저기요! 누가 말려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런, 아무래도 오늘 방송은 이쯤에서 중단해야 될 것 같은데요.


방송이 고르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쯤에서 노래 한 곡 들려드릴게요. UV가 부릅니다. ‘쿨하지 못해 미안해.......’


FM라디오 97.6MHz ‘우리 오늘 헤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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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연애 3년차 커플인 ‘동희’와 ‘영’. 누구보다 사랑했던 그들이지만 오늘, 헤어졌다. 다음날 이젠 그냥 직장동료로 만난 두 사람은 쿨하게 헤어졌다는 말과 달리 서로의 물건을 부숴 착불로 보내질 않나, 핸드폰 요금 폭탄을 떠넘기질 않나,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는 말에 서로의 SNS 계정을 감시하기까지 한다. 이쯤 되면 정말 우리가 헤어진 게 맞는 건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한편 '동희‘는 우연히 참석한 회사 워크숍에서 ’영‘이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겹게 싸우다가 헤어졌다.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인 줄 알았는데 헤어진 지금에도 그들은 싸운다. 서로의 물건 부숴 착불로 보내기, 커플 요금제 해약하기, 직장에서 망신 주기, 상대방의 SNS 감시하기까지. 어제 그녀는 그에게 기어코 300만원을 받아냈다. 이젠 헷갈릴 지경이다. 이별 전과 이별 후의 경계는 흐릿하기만 하다. 우린 정말 헤어진 걸까. 아니면 누가 먼저 화해를 청하길 기다리는 걸까. 도무지 끝을 모르는 전쟁 같은 (사랑이 아니라)이별에 남자는 질린다는 듯 이렇게 토로한다. “사랑했던 건 되게 아름다웠는데. 그 끝은 왜 이렇게 추해지는 걸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남자의 말대로 줬던 사랑이 아까워서 그러는 걸까. 그게 아니면 나만 혼자 고통당하기 싫다는....... 뭐 그런 심보 때문인 걸까.


이동진 작가의 <필름 속을 걷다>를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온다. “사랑의 종말을 선언하는 건 입이지만, 그 선언을 실천하는 것은 등이다.” 그러니까 ‘동희’와 ‘영’이가 다투는 이유도 여기 있는 셈이었다. 그들은 아직 서로에게 등을 내보여주지 않았다. 이별을 말했던 그곳에서 여전히 서로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누구와 대화를 하고, 감히 왜 기뻐하는 것인지. 그들은 아직 그 ‘놀이공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들의 시간은 여전히 과거 시점에 머무른다. 말하자면 그들의 이별은 현재 ‘유예 중’이다.


이별의 다음엔 무엇이 올까. 흔히들 생각하길, ‘너를 잊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그건 틀렸다. 감히 돌아설 용기도 없는 주제에 너를 잊는다는 건 착각이자 객기다. 동희와 영이는 그래서 서로에게 추해졌다. ‘너를 잊는 것’은 맨 마지막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막 이별한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그건 바로 ‘지난 사랑을 복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 사랑했을까. 사랑했다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헤어져야 했을까. 나는 그동안 너에게 무엇이었을까. 이제 나는 무엇으로 기억이 될까. 이 모든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때쯤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너’를 잊을 준비가 된다. 다시 말해서 동희와 영이가 ‘쿨’하지 못했던 건 자신들의 사랑을 복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왜 헤어졌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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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동희와 영이의 재회는 지나간 사랑을 붙잡아보려는 발버둥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왜 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상기의 기회다. 기차역에서 동희는 영이에게 우리가 헤어지던 그 날, 싸운 이유를 아느냐고 묻는다. 영이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매번 비슷한 이유로 싸우느라 기억이 나지 않는 거라 여길 뿐이다. 그래서 연애의 신은 그들에게 다시 만날 기회를 주었다.


다시 만나 사랑을 하며, 동희와 영이는 지난 사랑을 복기한다. 처음 잠자리를 가지던 설렘에서부터 동상이몽의 어색함까지. 그리고 다시 한 번 찾아간 놀이동산에서 동희와 영이는 다툰다. 영이는 상처 입었고, 동희는 말을 잃었다. 그곳에서 영이는 자신들이 과거에 헤어졌던 그 날,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를 기억한다. 그녀는 그에게 우리 진짜로 좋아서 만나는 거냐고 물었었다. 그 말에 동희는 현재에도 대답을 머뭇거린다. 이제 그들은 왜 헤어졌는지를 안다. 영이는 동희의 쩨쩨함과 눈치에 질려 그와 이별했더랬다. 동희는 영이의 침묵에, 꽁함에, 마음을 재단하는 심보가 두려워 그녀와 헤어졌더랬다. 그러니 이젠 ‘진짜로’ 헤어질 차례다.


함께 있어도 외롭다면, 그 사랑은 죽었다. 우리는 외롭기 위해서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니까. 최선을 다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똑같은 놀이공원에 서 있다. 먼저 돌아선 건 영이였다.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동희는 다가온 자신의 차례를 실감한다. 그녀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동희도 자신의 ‘등’을 내민다. 그들은 결국 3%의 사람들이 되지 못했다. 다시 찾아온 이별은 여전히 아프고 고통스럽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아픔만큼이나 그들은 열렬하게 서로를 사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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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끝을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뻔한 결말로 읽지는 말지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철저히 ‘메타(Metar) 영화적’이다. 어떤 영화는 극장 밖에서 비로소 시작된다고 말한 이는 누구였던가. 오랜만에 만난 동희와 영은 함께 극장 밖으로 나선다. 함께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익명성을 엿본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만난 영이를 붙잡으며 동희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영화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내용 뻔하지. 헤어졌다 만났다. 헤어졌다....... 그러다가 또 만나고.” 다시 말해 이것은 영화를 보는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길을 걸으며 영이는 동희에게 묻는다. “우리 로또나 살까.” 그런 걸 왜 사냐며 동희가 되묻자 영이는 새침하게 대답한다. “이번엔 될 수도 있어.” 다시 만난 그들은 또 다시 그 3%의 확률에 서로를 맡겨보려는 걸까. 속는 셈 치고? 이제 영화는 끝났고, 다음은 당신이 극장 밖을 나설 차례다. 아닌 척 하지만 이미 알고 있다. 실은 그/녀의 번호를 지우지 않았다는 걸. 지금부턴 당신의 영화를 보여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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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뭐해? 혹시 나랑 로또 사러 가지 않을래?"

 


[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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