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성인(聖人) 거부하는 사회 [영화]

글 입력 2020.02.0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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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착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는 소위 말하는 '호구'가 되지 않기 위해 바쁘게 머리를 굴리며 살아간다. 착취 당하는 쪽이기 보다는 착취하는 쪽이 되기 위해 무던히도 자신을 갈고 닦는다.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도 문득,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의 라짜로는 성인(聖人)이다. 성경 혹은 신화에서 건져올린 듯한 이 영화는 현 대의 성인은 어떤 모습인지 보여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대의 사람들이 성인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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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듯한 이탈리아의 산골 마을 '인비올라타(Inviolata)'. 이곳의 사람들은 알폰시나 데 루나(니콜레타 브라스키) 후작 부인의 담배밭을 가꾸며 소작농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1980년대의 이탈리아에 소작 제도는 폐지된 지 오래다. 후작 부인은 마을을 착취하고, 중간 관리자인 니콜라는 농부들을 더 가까이서 착취하고, 마을 사람들은 더없이 선하고 순수한 소년,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를 착취한다.

 

인비올라타의 정체는 휴양 차 마을을 들른 후작 부인의 아들 탄크레디의 납치 사기극을 통해 탄로나고 만다. 영화의 배경은 인비올라타를 떠나 도시로 옮겨가고, 라짜로 역시 시간과 죽음을 뛰어넘어 도시에 도착한다. 이십여 년이 지난 도시에서는 모습을 바꾼 착취가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신화적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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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까만 화면에 풀벌레 소리와 발자국 소리만이 들리다가 누군가 라짜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시작된다. 16mm필름의 자글자글한 질감과 둥근 네 귀퉁이가 마치 '이제 라짜로라는 인물의 신화를 들려줄게'라고 이야기 하는 듯 하다. 영화의 신비롭고 마술적인 요소는 배경인 '인비올라타'에서도 나타난다. 시대를 유추하기 어려운 목가적 풍경과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담뱃잎들 사이의 인물들은 신비롭고 이질적인 동시에 아름답다.

 

안토니아가 아들 피포에게 들려주는 늑대 이야기는 작품이 우화적 성격을 강조한다. 늙고 병든 늑대가 무리에서 쫓겨나자, 늑대는 마을에서 가축을 해친다. 이야기 속 성인은 동물과 말이 통한다 하여 굶주린 늑대를 설득하기 위해 보내진다. 늑대를 찾아 길을 떠난 성자는 춥고 지친 나머지 쓰러진다.

 


"그에게 다가간 늑대는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그를 잡아먹으려 하지만 처음 맡는 냄새에 주춤거리지. 늑대는 킁킁거려. 무슨 냄새일까? 그것은 선한 사람의 냄새였어"



이야기 속 성인의 곁을 서성거리듯 늑대는 절벽에서 떨어진 라짜로의 냄새를 맡는다. 라짜로는 안토니아의 내레이션과 함께 죽음에서 돌아온다. 죽음의 잠을 자는 자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가 없는 라짜로의 겉모습과 인비올라타의 풍경 때문에 관객은 뒤늦게야 그의 신성함을 알게 된다.

 

라짜로의 부활이 성경 속 나사로의 부활을 암시하듯 영화 곳곳에서 종교적인 상징을 찾을 수 있다. 인비올라타는 77년의 홍수 이래 외부와 단절되었다. 이는 대홍수를 암시하는 듯하지만 홍수 이후의 인비올라타는 끊임없는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으로 인비올라타를 벗어나 도시로 향할 때 강을 건너기 두려워 하자 경찰은 '왜 그래요? 물길이 갈라지길 기다려요?'라며 답답해 한다. 마치 성경 속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비웃는 것 같다.

 

작품 속에서 단연 마술적인 장면은 교회에서 내쳐진 라짜로를 음악이 따라오는 장면이다. 교회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성자를 음악만이 제 주인을 알아보듯 따라 붙는다. 교회는 문을 닫아 음악을 가두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라짜로가 누구보다 선하고 성스러운 존재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시퀀스다.

 

 

 

성인은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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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라짜로는, 이 선한 존재는 누군가를 구원했는가? 제목대로 행복했을까?라고 묻는다면 나는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라짜로는 절대적으로 선한 존재다. 마음 속에 미움과 분노 같은 감정은 찾아볼 수 없다. 라짜로는 누구의 부탁도 거절하지 않는다. 고된 노동을 할 때도 열병이 날 때도 얼굴에 힘듦을 드러내지 않는다.

 

라짜로는 있는 그대로를 본다. 거짓말이라고 믿을 법한 이야기도 그대로 믿고, 공터에 난 잡초의 본모습도 알아챈다. 라짜로는 추위와 배고픔을 뛰어넘은 존재이기에 그 자신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내어달라고 하면 내어주고, 도움이 필요해 보이면 '도와드릴까요?'라고 묻는다.

 

하지만 선의로 가득차 누군가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이 소년에게 어떤 신념을 지키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극중에서 라짜로를 움직이는 유일한 행동 동력은 '탄크레디'로 보인다. 마을의 착취로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던 탄크레디에게 보여주는 라짜로의 호의는 바보같음을 넘어서 우리에게 불편함을 준다. 라짜로는 탄크레디가 도시에서 어렵게 살고 있음을 알고 도와주려 하지만, 결국 탄크레디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봉건 계급제 사회에서 자본주의 세계로 뚝 떨어진 라짜로는 이 세계의 룰을 이해하지 못한다. 은행은 돈이 필요할 때 우리에게 돈을 주는 곳이 아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라짜로는 현대 사회에서 쓸모 있는 인물 군상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시대, 유령이라도 밥값은 해야 하는 시대에 라짜로는 농사를 짓던 봉건 시대보다 더욱 무용한 존재가 된다. 이제 우리는 인간을 쓸모와 효용가치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이단자


 

탄크레디는 은행에 의해 재산을 빼앗겼다. 정부도 사법 체계도 아닌 은행에. 은행은 사기꾼들인가? 인비올라타의 사람들에게 사기꾼은 니콜라와 딸 테레사, 알폰시나 후작 부인과 그 아들인 탄크레디 아닌가? 농부들은 그 거대한 사기극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라짜로에게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의 선(善)에 따라 탄크레디의 재산을 되찾아 주고자 한다.

 

은행으로 간 라짜로에게 경보음이 울린다. 자본주의 사회의 성전이나 다름없는 은행에서 라짜로는 이교도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경보기는 은행에 경고한다. 이 친구는 자본주의와 정반대에 위치한 존재라고.

 

은행원은 라짜로에게 "필요한 것 있으세요? 원하시는게 뭐죠?"라고 묻는다. 라짜로의 필요를 묻는 질문을 던지는 유일한 인물은 은행원이다. 라짜로가 무기를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탄크레디에게 하사받은 망가진 새총은 라짜로가 믿는 것이 현대 세계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고, 심지어 볼품없어 보이는지 보여준다. 충성스러운 자본주의의 신도들은 이 이교도를 가만두지 않는다.

 

 

 

성인은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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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짜로의 선한 냄새를 맡았던 늑대는 마지막에 다시 나타난다. 마지막 신에서 늑대는 도시를 등지고 어딘가로 떠나간다. 이번에도 늑대는 선한 사람의 냄새를 맡았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취를 감내하는 선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시스템의 정의를 필요로 하며, 변혁의 리더를 소망한다.

 

라짜로의 선함은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착취는 끊임없는 연쇄작용으로 이루어지고, 도시에서도 착취는 반복된다. 착취의 밑바닥에 누가 있든 크고, 복잡하고, 정교한 이 시스템은 서로를 착취하도록 만든다. 그렇기에 성인 라짜로는 현대인들에게 필요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우리들은 언제나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를 기다리지만, 사실 우리는 그런 존재를 알아챌 수조차 없다. 오히려 그를 짓밟고 만다. 어쩌면 성인은 우리에게 과분한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주변의 라짜로를 알아채지 못한 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형벌이다.


 

[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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