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이토록 기이한 사랑 이야기: 뮤지컬 "쓰릴미" [공연]

2019.12.10 ~ 2020.03.01 / 예스24스테이지 2관
글 입력 2019.12.29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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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년 전. 우연한 기회로 한 시인을 만났다. 그가 했던 여러 말 중 가슴을 강타한 한 문장이 있다.


“사랑은 사람에 따라서 다가오는 모양이 모두 다르다.”


사랑이라는 것은 뮤지컬 ‘쓰릴미’의 주인공, 네이슨과 리차드에게 너무나 애틋하면서도 잔인한 모양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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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수한 외모, 화려한 언변에 IQ 160이라는 뛰어난 머리를 타고난 청년 리차드. 니체의 ‘초인사상’에 빠져 다른 이들보다 월등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증명의 방법은, 바로 범죄. 자신과 마찬가지로 IQ 210이라는 뛰어난 지능을 가진 네이슨을 범죄에 가담시킨다. 순수하고 소심한 네이슨은 리차드에게 사랑을 느끼며 점점 커져가는 그의 범죄에 일조하고. 마침내 그들은 한 어린아이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데.

 


뮤지컬 ‘쓰릴미’는 2007년 초연을 시작으로 10년간 꾸준히 한국 관객에게 사랑받아왔다. 그간 김무열, 강하늘, 지창욱과 같은 배우들이 이 작품을 거쳐갔으며 마침내 2019년. 2년간의 휴식기를 넘어 올 뉴 캐스팅으로 돌아왔다.


이 뮤지컬을 처음 접했을 때부터 궁금했다. 초인사상과 살인, 동성애 코드까지. 대학로 뮤지컬에서 흔히 기대되는 웃음기 따위 하나 없이, 시종일관 섬세한 감정묘사와 ‘자극적인’ 코드들이 펼쳐지는 이 작품을 관객들은 대체 왜, 10년 넘게 사랑했을까?


지난 토요일. 예상했던 대로 나와 친구는 약간의 충격(?)을 안고 극장 문을 나섰다. 결말까지 치닫는 과정도 충분히 예측할 수 없었고 충격적이었지만, 결말 5분 전 밝혀지는 치명적인 반전은 극이 끝난 후에도 극 전체를 쥐고 흔들었다.


그래서일까. 계속해서 머리에 울림이 남았다. 그리고 생각났다. ‘사랑은 사람에게 다가오는 모양이 모두 다르다’는 시인의 그 말이.


***


며칠 전, 재밌는 책을 읽었다. ‘뉴서울파크 젤리 장수 대학살’이라는 장르소설이다. 행복한 웃음과 놀이기구만 가득한 뉴서울파크에 어느 날, 기이한 젤리 장수가 나타난다. 그는 ‘이걸 먹으면 절대 안 헤어진다’는 말과 함께 사람들에게 젤리를 무료로 나눠 주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젤리는 말 그대로 인간을 젤리로 녹여버리는 젤리였다. 젤리를 먹은 사람은 온몸의 피부와 장기와 뼈와 근육이 흘러내려 하나의 젤리로 녹아버리고, 이 젤리를 두 사람이 같이 먹으면 하나의 젤리로 녹아 영영 헤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소설에 등장하는 대다수 인물이 젤리가 가져올 파국을 눈으로 보고서도 애인에게, 가족에게 젤리를 먹인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다. 헤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상대를 소유하고 싶었던 개인들은 상대가 젤리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을지 뻔히 알면서도 그의 입에 젤리를 쏟아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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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쓰릴미’에서도 사랑은 기이한 모습으로 표출된다.


시종일관 리차드에게 끌려다니는 듯하던 네이슨은 마지막 순간, 리차드를 영원히 자신의 것으로 옭아맬 강력한 올가미를 던진다. 어린아이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안경’은 리차드와 네이슨이 결국 경찰에게 덜미를 잡힌 이유가 되었다. 그 안경이 시중에 몇 없는 특수한 안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네이슨은 고백한다. 사실 그 안경 내가 일부러 놓고 왔다고. 너랑 영원히 감옥에서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서 일부러 잡혔다고 말이다. 이로써 둘의 ‘사랑’은 영원해졌다. 비록 리차드에게는 어마어마한 고통이 남았을 지라도.


***


사랑과 이기심은 분명 그 뿌리가 같다. 영화 ‘겨울왕국’ 속 올라프는 사랑에 대해 ‘나보다 상대를 더 우선순위에 두는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현실 속에서 사랑은 그리 숭고한 모양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기대와 꿈을 투영한다.


연인들은 그 어떤 관계에서 행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상대의 가치관과 취향을 재단한다. 그리고 ‘나는 너의 애인이잖아’라는 말로 그에게 상처 줄 권리를 획득한다. 친구 관계 역시 사랑이 넘치는 관계이다. 하지만 친구가 잘됐을 때 100%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친구의 실패를 은근히 바라본 적, 다들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결국 순도 100%의 사랑은 없다. 사랑에는 필히 불순물이 담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때로는 사랑이 불순물 안에 담기기도 한다. 이 전복관계는 현실에서 흔히 발생하지만, 콘텐츠 속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과 너무 닮은 로봇을 보면 불쾌감을 느끼는 ‘언캐니 밸리’처럼 현실과 너무 닮은 콘텐츠는 대중의 외면을 받을 위험이 더욱 크기 때문이다.


해서 소설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그리고 뮤지컬 ‘쓰릴미’처럼 잔혹한 현실에 극적 긴장감을 더해 ‘재미있는’ 이야기로 탈바꿈시킨 콘텐츠는 더욱 귀하고, 박수받을 만하다.


***


생각해본 적 있는가. ‘사랑해’라는 말이 주는 무게를 말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수한 모양을 담고 있어서 그 무게가 무겁다.


뮤지컬 ‘쓰릴미’는 사랑 넘치는 연말 연초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연말 연초에 어울린다. ‘쓰릴미’에는 기분 좋은 사랑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사랑에 자신만의 의미를 입힐 여지가 있다.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이토록 진중하게 곱씹어볼 시간은 그 어디에서도 주지 않았던 희귀한 선물이다.


2019년. 뮤지컬 ‘쓰릴미’와 함께 ‘나만의 사랑’을 만든다면 연말 연초,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욱 꾹꾹 눌러 담긴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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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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