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사랑: 그렇게 될 일이 그렇게 되는 한 편의 “꿈” - 연극 "Memory in Dream"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될 거니까요.
글 입력 2019.12.03 16:4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KakaoTalk_20191202_214459876.jpg

무대와 너무 가까운 자리여서 조금 당황했다.

덕분에 아주 실감나게(?) 연극을 감상할 수 있었다.

 

 

 

1. 꿈의 모티브와 액자식 서사 구조


 

사랑 이야기다. 정확히는 한 쌍의 연인이 만나서 사랑을 확인하고 가정을 꾸려 나갔‘던’ 과거에 관한 이야기다. 보편적으로 비극적이라 여겨지는 서사를 차용하여 꿈의 모티브를 통해 액자식으로 풀어낸 연극이었다. 여주인공 ‘앨리스’는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이 내리치는 밤, 술을 마시고 집 안에서 잠이 든다. 그녀의 옆을 지키는, 그녀의 연인인 ‘이든’이 잠든 그녀 옆에 있다.

 

이든은 관객을 바라보며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조용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들을 향해 그는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천천히 읊조린다. 이따금 곁에서 잠들고 있는 앨리스를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던 와중 무대가 암전되려 하자, 여기서 말을 끝낼 순 없다는 듯이 다급해진다. 아무래도 앨리스에게 전하고 싶은 어떤 이야기가 있는 듯하다. 그는 끝내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관객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그렇게 극이 시작된다. 여기서부터 관객은 의문을 가질 것이다. 왜 그는 무대 바깥의, 제3자인 관객에게 자신의 말을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고자 했을까. 짧은 고민 끝에 결론이 내려진다. 그는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극중에 나타나는 이든의 모습은 유령의 일종이거나 ‘과거에’ 존재했던 그 자신이다. 전자인 상태로 극이 진행되기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많다. 일단 연인들 사이에 물리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이 연극은 이든과 앨리스가 과거에 사랑했던 이야기를 전개하는 작품이다. 그 매개체가 꿈인 것이다. 본격적으로 연극을 관람하기 전부터 마음이 살짝 무거워졌다. 분명 이런 형태의 작품은 후반부로 갈수록 ‘결국’ 행복했던 연인의 모습은 단지 과거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해주는, 홀로 남아 절망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후반부가 아니더라도 절망적인 앨리스의 모습은 무대에서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꾸준히 등장했다.

 

이든이 없는 현재와 이든이 있었던 과거가 교차편집되면서 서사가 전개되었다. 과거가 꿈의 형태로 극중에서 현재에 해당하는 시점과 번갈아 전개되었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Memento)’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교차편집 기술 자체가 주로 영화에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연극에서도 종종 쓰이는 사례가 있으나, 실제로 그 사례를 관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무대 편집 기법이 상당히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이 연극을 관람했던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꽤나 많이들 무대가 교차적으로 진행된다는 사실을 극이 조금 시작된 후에야 알아챘다고 말했다.) 개별 컷의 조합으로 교차편집 기술을 사용하는 영화와 달리 동일한 시공간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해야 하는 연극의 특성 상, 주로 공연장을 이용하여 시공간의 물리적인 대비를 기술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이 기술을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현재와 과거를 교차편집하여 보여준다고 할 때, 과거 시점의 이야기들은 비교적 밝은 조명들을 사용하여 풀어내는 반면 현재 시점의 이야기에서는 어두운 조명만을 사용한다든지. 혹은 현재 시점에서는 인물이 항상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공간에서 배회하는 것과 달리 과거 시점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의상을 입거나 다채로운 일화들을 구어로 읊조린다든지. 기술이 흥미로워서 이런 디테일을 캐치하는 것도 재밌었다. 그리고 단순히 현재와 과거라는 틀 안에서 대비적인 편집을 행하지 않고, 현재 안에서 진행되는 과거의 꿈이라는 액자형 구조로 편집을 진행했기에 서사가 보다 입체적으로 진행된다고 느꼈다. 연인 간의 사랑을 다루는 작품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양태들이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기에 자칫하면 진부하다는 느낌을 주기 쉬운데, 편집 기술에 차별화를 둠으로써 평면화의 위험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img.png

 

 

  

2. 네 사람의 이야기


 

네 명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시카고 출신의 미술관 큐레이터인 ‘앨리스’, 캘리포니아 출신이자 밴드 리더로 활동하고 있는 ‘이든’, 이든의 친구인 잡지사 직원 ‘앨런’, 이든의 또 다른 친구이자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등장하는 ‘유진.’ 처음에는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시간동안 네 명만의 이야기로 극을 채우기엔 조금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연극을 관람하면서 이 이상의 인물을 등장시켰어도, 이보다 덜한 인물들만으로 극을 이끌어나갔어도 안되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네 명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두 쌍의 연인들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네 명의 이야기는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보여주었듯이 서로가 얽히고설킨 상황에서 진행되어야만 했다.

 

네 사람의 관계성은 작품이 제시하는 사랑의 서사가 단지 연인 간의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국한되지 않고 우정의 차원으로도, 더 나아가 이제는 사람이 아닌 존재를 향한 범존재주의적 사랑으로도 나아가도록 했다. 물론 110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이렇게 깊은 차원의 이야기를 충분히 보여주기엔 짧았다. 하지만 암시 정도는 충분히 해 주었다. 이든이 극중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히 언급하는 말 중 하나인,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되는 거니까.”를 통해 이러한 범존재주의적 주제의식이 은은하게 나타난다. 모든 이야기는 먼저, 이든의 장례식이 있었던 날에 지친 모습으로 잠에 들었던 앨리스가 꾸는 꿈으로 시작된다. 때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얼마 전이었다.

 

이든과 앨리스는 말 그대로 운명적으로 뉴욕의 길가에서 마주친다. 앨리스는 자신이 꼭 관람하고 싶었던 미술관 전시 티켓을 잃어버려 상심이 큰 상황이었다. 그러다 이든과 우연히 부딪힌다. 우연하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든으로부터 그 전시를 함께 보러가자는 제안을 받는다. 이든에게는 똑같은 전시를 볼 수 있는 티켓 두 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제안에 응하여 함께 전시를 구경한다. 알고 보니 이든은 자신의 친구들인 앨런, 유진과 함께 전시를 관람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 전시를 같이 보자고 했을까.

 

관객들은 답을 알고 있다. 이든은 앨리스에게 첫눈에 반했다. 전시를 함께 보고 그 도시에서 유명한 강 근처에 구경을 가기도 한다. 이때 이든은 그녀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앨리스는 뉴욕에서 엄청난 규모의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대답한다. 이든은 대단하고 멋진 꿈이라 화답하며 그녀의 꿈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둘은 연인이 되어 간다. ‘우연’의 개입은 이렇듯 연극이나 영화, 문학, 뮤지컬 등 장르를 막론하고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비개연적인 서사를 개연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쓰이는 기제다.

 

얼마 뒤 이든은 앨런과 유진에게 앨리스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그녀에게 청혼을 할 것이라 말한다. 친구들은 당황한다. 그 당시 이든은 번듯한 직업도 갖지 못한 상태였기에 가정을 꾸려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든은 택시기사 일을 시작하며 앨리스와 가정을 꾸리려는 준비를 시작한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앨리스는 앨런과 유진과도 친분을 맺게 된다. (이 부분은 극중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이후에 자연스럽게 이든과 앨리스의 집에서 네 명이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넷 모두가 서로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이든과 앨리스의 사랑이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동안, 앨런과 유진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도 마치 햄버거에 콜라가 따라오듯(?) 흥미진진하게 진행되었다. 앨런을 짝사랑하는 유진과 그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애매하게 반응하며 알렉스라는 연인과의 재결합을 선언하는 앨런. 네 명의 이야기는 이렇게 복잡미묘한 방향으로, 단순하면서도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다.

 

 

1VQY6433F6_1.jpg

엄청난 열연을 해주신

'앨리스' 역의 서예화 배우님.

 

 

 

3. 이든과 앨리스의 사랑: 감정의 분출, 연인들의 “전형적인” 이야기


 

먼저 이든과 앨리스의 이야기를 조금 깊게 살펴보자면. 연극을 감상하면서 느낀 것은 둘의 이야기가 정말 연인들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모습의 전형이라고 느꼈다. 현실적인 문제로 둘 사이에 엄청난 갈등이 빚어질 때. 아주 사소한 계기가 꼬리의 꼬리를 물고 이어져 이전에 서로에게 쌓여 있었던 감정들까지 연쇄적으로 분출되는 순간. 속으로 ‘유레카!’라며 소리를 질렀다.

 

특히 결혼이라는 문제를 두고 싸우는 장면을 보며 정말이지 감탄했다. 대충 이런 이야기였다. 앨리스는 이든과 하루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든은 부모님들을 뵐 때마다 애매한 대답을 내놓을 뿐이다. 준비가 되면 그 때 결혼을 할 예정이라며, 아직은 둘 다 천천히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앨리스는 이렇게 애매모호한 이든의 태도에 열불이 난다. 준비는 무슨 준비냐며, 그렇게 말로만 준비를 한 지 지금 얼마나 되었냐며. 그냥 자신과 결혼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라며 윽박을 지른다. 이든은 그녀의 말에 반박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준비란 무엇인지 상세하게 설명하려고 한다. 누가 너랑 결혼을 하기 싫다고 말했느냐, 나는 너와 당연히 결혼을 할 거다. 그렇지만 집 문제를 비롯한 생계 문제에 관한 준비를 완전히 마친 후에 결혼을 할 것이라는 말이다, 라면서.

 

앨리스는 콧방귀를 뀌며 비꼰다. 그냥 용기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그냥 결혼에 확신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며 화를 낸다. 둘은 서로의 말로부터 꼬리를 계속 물며 각자의 화를 가중시킨다. 싸움을 시작하는 앨리스의 말도, “당신 아까 어머니한테 <어떻게 말 했어>다.” 말에서 말로 이어지는 완전히 비논리적이고 소모적인 싸움의 연속. 평소의 연인들이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봉착하는 문제가 아니던가. 평소에는 사랑이라는 감정 아래에 서로에게 서운했던 마음들을 가능한 묻어두려 노력하지만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올 때, 또는 어떤 식으로든 이 감정들을 분출할, 엄청나게 사소할 지라도 그런 계기가 찾아올 때. 깊어진 감정의 골은 폭발한다.

 

후반부에 금전적인 문제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일 때도 마찬가지다. 앨리스는 이든에게 또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었냐며, 이 청구서는 무엇이냐며 쏘아붙인다. 이든은 친구가 자신에게 돈을 곧 갚기로 했다며, 정말 다급한 상황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서로를 향한 불신과 서운함은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깊어져만 간다. 급기야 앨리스는 이든을 향해 당신과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지금의 상황을 보니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며, 남들만큼만 살고 싶다고 울부짖는다.

 

이든은 상처를 받는다. 그는 그녀와 함께 했던 모든 시간들이 행복했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지 않아도 서로가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냐고 반문한다. 가장 우유부단한 반응이긴 하나, 싸워 봤던(?) 사람의 입장에서 나는 둘 모두가 이해됐다. 관객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이든과 앨리스 모두가 잘 알 것이다. 서로의 말이 전부 일리가 있음을 말이다. 그렇지만 그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마음보단 자신의 마음이 더욱 중요한 법이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다. 실제로는 서로가 힘들 것이라는 걸 안다. 속으로는 알지만 겉으로는 나의 힘듦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연인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면, 역설적인 감정이 분출되는 상황을 막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골의 크기를 자발적으로 키우게 되는 거다. 이든과 앨리스의 사랑은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쩔 수 없는”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데에 주력했다.

 

 

1VQY7A9ZU5_1.jpg

 

 

 

4. 앨런과 유진의 이야기: 그래도 넌, 그래 나는.


 

재밌다. 사실 코믹한 장면들 대부분은 이 사람들이 만들어 냈다. 두 명 중에서도 특히 유진. 극중에서 유진은 인테리어와 조명설비 전문회사의 사장을 아버지로 둔 부유한 집안의 외동아들로 등장한다. 말 그대로 ‘온실 속 화초’다. 세상물정을 제대로 모르고 철부지 없어 보이는 면모를 자랑한다. 그는 자신의 친구인 앨런을 짝사랑한다. 앨런은 극의 초중반부에서 전 애인이었던 알렉스와 다시 만나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친구들에게 전달한다. 유진은 그 사실을 듣고 망연자실한다. 물론 겉으로는 쿨한 척 티를 내지 않으려 한다. 정말 척에 불과하다. 관중들을 포함해 이든이나 앨리스나, 그가 앨런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걸 모두들 눈치 채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앨런 본인까지도.

 

이든과 앨리스가 결혼한 후 2-3년 즈음 지난 후에, 앨런은 알렉스를 상대로 골치 아픈 이혼 소송을 건다. 앨런에게 굉장히 불리한 상황이어서 위자료를 포함해 막대한 금액을 앨런이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고충을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며 이든과 앨리스 부부에게 큰 돈을 빌린다. 이것을 목격한 유진은 왜 자신에겐 돈이 필요하다고 부탁하지 않느냐며 서운함을 드러낸다. 앨런은 그때, 유진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렇게 부탁을 하면 단지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화를 낸다. 많은 사람들이 눈치챘다시피 앨런은 유진이 자신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특히 금전적인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어주었던 유진을 보면서 이 사람만큼은 내가 벼랑 끝에 내몰렸을 때마다 찾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자기 자신을 굉장히 혐오한다.

 

하지만 유진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고 의지하는 데에는 다 각기의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앨런을 변호한다. 앨런이 자신의 부유함에 끌리듯이 자신도 앨런의 외모와 당돌함에 끌리는 것이라고. 적절한 변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유진이 앨런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녀에게 사랑을 원하고 있음이 간절히 드러난다. 부제목에서도 밝혔듯이 유진을 향한 앨런의 마음은 “그래도 너는 (나를 언제까지나 사랑해 주겠지.)”에, 앨런을 향한 유진의 마음은 “그래 나는 (언제까지나 널 사랑할 거야.)”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흥미롭다. 정말 친구인 듯 친구 같은 친구 아닌 사이의 절정이지 않는가. 결국 둘은 교제를 시작한다. 결혼에도 성공한다. 극중에서 이든이 죽은 현재의 시점에서도 둘은 굉장한 금슬을 자랑하는 부부로 묘사된다.

 

그래서 한편으로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점에서 이들의 사랑은 이든 없이 홀로 남은 앨리스의 절망을 자극하고 부각하기도 한다. 그들은 앨리스가 집 안에서 나오지 않는 것 같아 굉장히 걱정하며 매일 음성 사서함에 메시지를 남긴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함께 있다. 앨리스를 진심으로 걱정하면서도 이들과 앨리스의 관계가 결과적으로는 ‘남남’이라는 것이 뼈저리게 드러나는 장면이다. 심지어 앨리스의 집에 직접 찾아갔을 때도 말이다. 혼자 남은 앨리스는 더 이상 앨런이나 유진처럼, 애정을 확인하며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 그래서 후반부에 세 명이 한 집에서 함께 있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떤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분명 저 둘은 앨리스의 절친한 친구고, 앨리스가 이든을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와 다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도록. 그녀 자신의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이 세 사람 사이에, 정확히는 앨리스와 둘 사이에 어떤 벽이 존재한다. 선 비스무리 한 것이 그어져 있다. 나는 이 선이 상당히 거슬렸다. 아무리 우애가 깊은 친구일지라도 근본적으로는 각기 다른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회의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이 작품이 놀라웠던 또 다른 이유가 이것이다. 우정과 사랑으로 이어진 네 사람의 관계가 순수하고 숭고한, 이렇게 단편적인 감정으로 점철되지 않았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연출과 시나리오 담당자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도 같다는 걸 보여주고 싶던 게 아니었을까.

 

 

2019112615581413207_1574751493.jpg

극 후반부에서 이든과 앨리스가

꿈 속에서 재회하는 장면.

 

 

 

5. 결국에는 극복의 내러티브로


 

이렇게 입체적인 관계성을 구현하면서도 작품의 결말은, 결론적으로는 극복의 내러티브로 향한다. 결국 이야기의 주된 목적은, 다시 말해 기승전결 구조 가운데 ‘결’에 해당하는 이야기는 연인을 잃은 앨리스가 이든의 부재를 딛고 다시 일어선다는 이야기다. 앨리스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서기로 결심한다. 이든을 이제 보내주고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기로, 자신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이때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든은 작품의 극초반부에서 나타난 이든과 동일인물이다. 즉, 현재 시점에서는 죽은, 이든의 영혼에 해당하는 존재다. 앨리스는 이든의 영혼과 마주하면서 그와 함께 했었던 과거의 기억들을 꿈꿨다고 말한다. 그리고 작별인사를 나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앨리스는 연극의 첫 시작 장면과 똑같이 이든의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말 그대로 시 작품에서 수미삼관법이 구현된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방금까지 이든과 나누었던 작별인사까지도 하나의 꿈이었음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이때 이든은 맨 처음에 관객들을 향해 조용히 해달라는 제스처를 다시 취하면서, 연극의 맨 첫 부분을 그대로 재현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최종적으로 이 연극은 시작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연극 안에서의 “진짜 현재”에 해당하는 시공간이고, 그 사이에 진행되는 교차편집 형식으로 전개되는 현재와 과거가 실질적으로는 “진짜 현재”가 다가오기 전의, 진짜 현재의 시점에선 과거와—이 과거보다 훨씬 오래 전의 과거라는 액자식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게 드러난다.

 

작품의 최후반부에서 이든은 관객을 향해서 자신의 짧은 생애 동안 느꼈던 감정들을 토로하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잘 하라”는 정말 전형적인 교훈을 남기며 연극을 마무리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되기 마련”이라는 말을 입에서 떼놓지 않는다. 약간의 자의적인 해석을 첨가하자면, 결국 이렇게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진 연극도 그러한 구조 안에서 서술되어야만 했던 것이라는. 결국에 이런 아름다운 추억은 꿈에 불과하다는, 이렇게 꿈으로 끝날 일이었다는 게 드러남으로써, 연극은 작품 속 등장인물들과 관객 모두로 하여금 눈앞의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필연적인 결과로 이끌어갔던 것이 아닐지. 결국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결말은 지금의 우리가 마주보고 있는 현실 안에서 진행된다는 걸 각인시키고자 한 게 아닐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메모리인드림]최종포스터.jpg

 

 

 

실무진 명함.jpg

 

 

[이소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6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