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모든 건 ‘커서’가 자초한 일이다 [사람]

글 쓰는 건 난데, 그 후의 감정은 커서 너 때문인 줄 알아라.
글 입력 2019.11.16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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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 한글을 더블 클릭, 무언가가 반짝인다. 커서다. 커서의 크기는 가끔 달라지지만 대강 1cm 이하이다. 커서는 글을 ‘써내는 사람’의 말과 생각의 입구일까, 출구일까? 커서 뒤로 뱉어내는 걸 보니 출구인 듯하고, 자음과 모음이 들어가는 걸 보니 입구인 듯도 한데. 뭐지?


글이 써졌다. 글을 ‘읽어가는 사람’의 눈 또는 손가락 또는 입 또는 귀로 들어가는 거니까, 커서는 입구인가? 혹은 ‘그렇구나.’ 하고 넘기는 순간, 지름길로 순식간에 빠져나가게 하는 출구 역할을 커서가 자처하는 건 아닐까. 차라리 글 읽는 사람이 아닌 커서가 자처하는 거라 탓하고 싶다. 너 때문이야. 커서, 너 때문에. 시작은 너였다고.


반짝인다. 심장 박동 같기도 하다. 두근두근. 재촉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몇 십 분 동안 멍하니 커서를 보다가 글자를 쓴다. 타닥타닥. 감정 담긴 글을 꾹꾹 혹은 꾸역꾸역 적어 내려갔다. 많은 시간이 걸렸고, 하나가 완성되었다. 쓰는 사람에겐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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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진심, 그 전부인 글을 넘긴다. 흠…. 한숨에 스크롤을 저 끝까지. 때론, 숨도 쉬지 않고 단박에 엑스 표시 클릭. 손은 눈보다 빠르다며? 보지도 못한 걸 손은 미리 알기라도 하듯 저 혼자 선수를 친다. 가끔은 그에 지지 않으려는 눈이 먼저 선수를 친다. 엇. 하면 손은 왜? 하며 멈춘다. 흐음…. 낮은 웃음 후 다시 엑스표시 클릭.


좋아하는 글 찾으러 ‘나머지’로 치부된 글들을 술술 넘긴다. 댓글도 술술. 영상도 술술. 스크롤도 술술. 종료 버튼도 술술. 엑스 표시도 술술. 기어코 맘에 드는, 좋아하는 그것에는 하트 한번 발사. 또다시, 기업에 보낸 내 자기소개서도 술술. 직장 업무 PPT도 술술. 학생들의 진심을 술술. 직장인의 진심을 술술. 글쓴이의 진심을 술술. 동료의 진심을 술술.

 

엄청나게 넘기는구나. 네가 뭔데 날 평가해. 내가 뭔데 널 평가해. 수많은 책이 꽂힌 도서관에서  책 몇백 권의 진심을 나는 단 한 걸음 만에 집어삼켰다. 수많은 글과 댓글과 진심과 노동과 두뇌 회전의 꽃을,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단 한 번의 손가락 튕김으로 집어 넘겼다. 


내가 뭐라고 다른 이의 글에 첨언한담. 스크롤이 미안하고, 엑스 표시를 향한 내 손짓이 미안하다. 너무 겸손한 태도인가.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생각하며 사람마다 마음 닿는 순간이 다른 건데도 그냥 미안했다. 내가 뭔데 널 평가해. 내 발걸음 뒤로 양쪽에 꽂힌 수십 권의 책과 그의 원고들 속 수억 번 반짝거린 커서 뒤의 헤아릴 수 없는 고민을, 나 따위가 무섭도록 매도해버린 것만 같아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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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했던 그 감정은 진심을 단칼에 내리친 못된 나의 손버릇을, 반대로 누군가가 나에게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 역시 그들처럼 고민과 진심과 시간과 커서를 보고 멍하니 있는 후에, 커서 주변에 말을 흩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나머지’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보고 싶지 않아서, 끔찍한 그 상상이 나를 잠식할까 싶어서 일리 있는 변명을 해본다. “쓰는 건 난데, 그 후에 내게 오는 감정은, 커서 너 때문인 줄 알아.”


글쓰기가 순간 두려워졌다. 잠깐이었지만 아찔하다. 괜히 의무감이 주어진 것만 같다. 삶은 엄청 대단한 게 아닌데, 무언가 대단한 걸 써야 할 것만 같다. 방대하고, 넓고, 있어 보이고, ‘훗’하며 콧방귀 낄 정도로 당당한 글 같은 것 말이다.

 

점점 방어적으로 되어만 간다. 그깟 글이 무어라고 나를 예민한 고슴도치로 만드는 건가 싶다가도, 몇 자 적어 내려가다 보면 어떻게든 계속되긴 하더라.

 

 

 

# 다시


 

커서가, 반짝인다. 대강 1cm 남짓 되는, 출구인지 입구인지 모를 그 문을 지으러 오늘도 커서에 내 진심을 맡긴다. 글은 가만히 있는데, 나 혼자 수많은 감정에 사로잡혀있다. 언제나처럼 내린 종착지의 답은 ‘그냥 좋으니까’였다. (누군가에게는 의무일 수도 있다. 나도 몇 번 그랬지) 좋아한다는 감정이 마냥 흐뭇한 건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꽤 무서운 면을 가지고 있었네. 


…. 오늘도 술술 넘긴다. 너도 그랬듯, 나도 피차 마찬가지다. 나라고 다를 건 없는데, 그냥 그렇다고. 모르겠다. 이런 감정도 커서 때문이지 뭐. 누누이 강조하지만, 글을 쓰는 건 난데,  그 뒤의 공유, 무시, 칭찬, 판단, 평가, 감정, 혼남, 삼켜짐, 즐거움 이 모든 건 커서 너 때문이다. 넌 곧고 단단하니까 적어도 나보단 덜 흔들릴 거 같아서 탓 좀 돌릴게. 그래, 커서 때문이다. 그렇다 치자.

 

 



[서휘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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