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뮤지컬 "스위니토드"와 로컬라이징의 문제 (1) [공연예술]

글 입력 2019.11.09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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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작품의 직접적인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 샤롯데씨어터에서 뮤지컬 <스위니토드>(이하 <스위니토드>)가 막을 올렸다. <스위니토드>는 유명 작곡가이자 뮤지컬 기획자인 스티븐 손드하임의 대표작으로, 올해 브로드웨이 초연 40주년을 맞았다. 불과 몇 달 전 공연된 뮤지컬 <지킬앤하이드>에 주연으로 참여했던 조승우, 홍광호, 박은태 배우가 이번 프로덕션에서도 나란히 주인공 스위니 토드 역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은 관객들의 기대감을 높였다. 또한 옥주현 배우가 2016년에 이어 또 한 번 러빗 부인 역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은 소위 '티켓팅 전쟁'을 예고했다.

 

주지하다시피, 뮤지컬 <스위니토드>는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스위니토드>가 전면에 내세우는, 또 이번 프로덕션에서 특히 강화된 괴기한 무대 장치와 음악은 산업혁명 당시 영국이 그 위대한 업적 뒤에 숨기고 있었던 시대의 불안과 공포, 혼란스러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뮤지컬 <스위니토드>가 산업혁명의 수레바퀴 안에서 굴러가던 19세기, 즉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고 위선적인 귀족주의가 팽배했던 격동기의 사회를 묘사하므로, 작품의 여성 캐릭터 또한 19세기라는 시간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뮤지컬 <스위니토드>에는 19세기의 왜곡된 여성상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가령 <스위니토드>에는 19세기 사회의 결혼제도에 대한 인식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결혼이라는 관습 하에서 여성은 남성들의 거래물이었다. 결혼과 가족은 후대 생산과 사회 유지의 기능을 수행하는 단위였고, 여성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길들여졌다. 그러한 점에서 <스위니토드>에서 안소니가 조안나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밤낮을 모르고 지저귀도록 눈을 멀게 한 새를 사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눈이 먼 채 새장에 갇혀 지저귀는, 아니 우짖는 이 새, 이리저리 팔리고 던져지는 이 새는 당시 여성의 모습과 같다. 극의 초반부에서 묘사되는, 터핀 판사의 함정에 빠져 능욕을 당하는 루시와 판사에게 강제로 입양되어 감금 생활을 하는 조안나는 이 눈 먼 새의 모습에 귀착된다. 이것이 작품의 드라마틱한 맥락 속에서 다소 극단적으로 그려진 장면이라고 해도, 해당 장면이 당시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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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렇게 새장 속에 갇힌 여성에게는 ‘정숙함’이라는 시대의 미덕이 요구된다. 작품은 스위니의 아내 루시와 그의 딸 조안나가 모두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이었음을 단정한다. 그리고 그들의 이러한 특질은 선한 것으로 분류되고, 남성들에게 수용된다. 위와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러빗 부인이나 거지 등은 행동거지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평가 뿐 아니라 그들의 외양 자체도 마녀처럼 묘사된다. 이들의 정체성은 작품 속에서 남성을 당혹스럽게 하고, 그들에게 불편함을 끼친다는 특성으로 일부 결정된다.

 

그러나 뮤지컬 <스위니토드>의 매력은, 위처럼 19세기의 여성상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겉보기에는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을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에 가두고 있는 것 같지만,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 가령 양아버지인 터핀 판사에 의해 감금 생활을 하게 된 조안나는 자신에게 첫눈에 반한, 이름도 모르는 청년 안소니에게 자신의 삶을 내맡긴다. 안소니는 15년 넘게 감금 생활을 한 조안나에게 단 하나뿐인 구원자인 것처럼 그려진다. 마치 아름답고, 순종적이며, 순수한 마음을 가진 정숙한 여인 조안나를 쟁취할 기회가 남성 캐릭터 안소니에게 주어진 것처럼 묘사되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같은 장면에 대해 위와는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안나가 안소니와 손을 맞잡고 부르는 한 넘버는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교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 두 사람이 전혀 소통하지 않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며 나누는 대화가 전혀 유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노래를 부르는 동안 상대방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해당 넘버가 등장하기 한참 전에 안소니의 연인이 되었던 조안나는 이 넘버를 부를 때까지 안소니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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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안소니는 터핀 판사의 저택에서 조안나를 구출하고자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조안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예컨대 조안나가 스위니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안소니는 자리에 없었다. 또 극의 후반부에서 조안나와 안소니가 탈출에 성공하고자 총을 쏠 때, 안소니는 못내 총을 떨어뜨리고 만다. 그러자 조안나는 그 떨어진 총을 주워 자신이 직접 총을 발포한다.  그렇다면 조안나라는 인물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조안나는 이름도 모르는 청년의 치기어린 열정을 이용해 자신의 탈출 경로를 확보할 정도로 용감하고 영리하며, 스스로의 미래를 개척하는 진취적인 여성이라고 말이다.

 

여기에서 <스위니토드>를 관람한 적이 있는 독자 분들은 한 가지 오류를 포착하셨을 것이다. 바로 한국에서 관람한 공연에서 총을 쏜 사람은 조안나가 아닌 안소니라는 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는 뮤지컬 <스위니토드>의 로컬라이징 과정에서 총을 쏘는 인물이 조안나에서 안소니로 수정되었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프로덕션에서는 이 '총 쏘기'의 역할을 맡은 인물이 조안나였는데, 작품이 한국에 수입되면서 총을 실제로 쏘는 인물이 안소니로 바뀌고, 조안나는 안소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작품의 내용이 수정된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수정 작업이 불필요했다는 의견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작품의 본 의도, 즉 여성을 성녀와 창녀의 이분법에 가두려 하는 남성중심적 사회의 관습을 비꼬려 하는 작품의 기민한 뉘앙스를 지우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2편에서 계속.

 

 

[이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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