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운수 나쁜 날

어느 추운 겨울날의 '나'에게
글 입력 2019.11.0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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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교환학생의 자유를 누리고 있던 2019년 1월의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라 늦잠을 자려고 일부러 알람도 안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6시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창문의 작은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못 이겨낸 탓이었다. 온몸이 오들오들 떨리고 손끝, 발끝, 코끝이 아릴 정도로 시렸다. 몸을 일으켜 옷장에서 옷을 한 벌 더 껴입고 다시 누워 잠을 청하려 했지만, 추위에 의해 현실 세계로 와버린 의식은 꿈나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그 추운 겨울날, 나는 아직 밖이 어두컴컴한 새벽 6시에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그날의 계획은 11시 즈음 일어나서 여유롭게 브런치를 즐기고 기숙사에서 뒹굴뒹굴하는 것이었는데, 새벽 6시에 일어난 덕분에 기숙사에서 온종일 뒹굴뒹굴하기에는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따뜻한 차를 한 잔 끓여 마시면서 그날 뭘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그때 생각난 것이 내가 교환학기를 가기 전에 작성했던 교환학생 버킷리스트였다.

 

다이어리에서 교환학생 버킷리스트를 찾아 펴자마자 별표가 100개쯤 표시되어있는 1번 항목이 자연스럽게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혼자 뉴욕 여행 가기’. 내가 교환학생으로 파견 나갈 학교로 뉴저지 주립대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뉴욕 맨해튼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어 하루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하다는 점이었을 정도로 내게 뉴욕은 로망의 도시였다. ‘혼자서 뉴욕 여행 가기’ 버킷리스트를 보자마자 그날의 일정은 확정이 되었다. 한 손에는 베이글을,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뉴요커처럼 뉴욕 시내를 당당하게 걸어 다니고 있는 내가 상상되었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설렜다.

 

오전 8시, 나는 뉴저지-뉴욕 왕복 티켓을 손에 꽉 쥔 채 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8시 5분에도 서 있었다. 8시 10분에도, 15분에도, 20분에도 서 있었다. 분명히 시간표상으로는 5분에 왔어야 하는 버스가 15분 가까이 안 보이자 슬슬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왜 안 오지?’ ‘내가 정류장을 잘못 찾았나?’ ‘시간표를 잘못 알고 있었나?’ 그리고 영하 15도의 추위에 감각을 잃어가는 내 발가락들은 그 상황을 악화시켰다. 결국 버스는 예정된 시간에서 30분이 지난 8시 35분에 버스 정류장에 나타났다.

 

한 시간이 지나, 나는 뉴욕 맨해튼 땅을 밟았다. 늦게 온 버스 때문에 초조함과 짜증이 대체했던 설렘이란 감정이 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몇 년 동안 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그곳. 관련된 책만 다섯 권 넘게 읽었던 그곳. 결국 나를 미국 동부로 교환학생을 가게끔 했던 그곳. 그곳은 세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 뉴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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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Central Library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구글 맵에 가장 먼저 검색한 장소는 ‘New York Public Library’였다. 뉴욕에 오면 한 번쯤은 그 유명한 도서관의 열람실에 앉아 책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었고, 혼자 뉴욕에 오게 된 그 날이 바로 내 기회였다. 구글 맵이 지하철을 타고 소호 쪽으로 내려가서 13분을 걸으라고 했다. 생각보다 꽤 멀어서 당황했는데, 구글 맵에 표시되는 길을 따라 작고 파란 점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다시 한번 설렜다. 내가 로망의 도시 뉴욕에 와서 뉴욕 지하철도 경험해보고, 뉴욕 거리를 걷고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분명 구글 맵의 작고 파란 점은 도착지에 도착했는데, 내 눈앞에 있는 건물은 내가 책에서 보던 그 건물과는 많이 다르게 생겼었다. 영화 속에서 보던 건물과는 다른 곳인 것은 틀림없었는데, 소름 돋게도 ‘New York Public Library’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당황스러움에 5분 정도 도서관 앞을 서성거리다 일단 안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당연하게도, 그 도서관은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이 아니었다. 짧은 영어로 도서관 직원분께 영화에서 보던 도서관의 사진을 보여드리며 도움을 청했다. 친절한 직원분은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New York Public Library’가 아닌 ‘Grand Central Library’라고 설명해주셨다. 감사 인사를 하고 도서관에서 나와 Grand Central Library 위치를 찾아보니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야 했다. 수업 없는 날에 새벽 6시 기상과 30분이나 늦게 온 버스를 경험한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날은 운수가 나쁜 날이었다.

 

허탈한 마음에 그 근처에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주변에 맛집으로 검색해둔 음식점을 찾아갔다. 베이컨 샌드위치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서 스마트폰으로 웹툰을 읽으며 음식을 즐기던 중, 갑작스러운 물벼락을 맞았다. 내 옆 테이블을 치우던 종업원의 실수였다. 그 덕분에 사장님을 포함한 온 직원의 사과와 식당에 있던 모든 손님의 관심을 받았다. 그런 일을 겪으면 평소에는 화부터 났던 것 같은데, 그날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역시 운수가 나쁜 날이구나’ 생각했을 뿐.

 

물벼락을 맞아 미역처럼 된 앞머리를 숨기기 위해 모자를 뒤집어쓰고 음식점에서 나오는데, 비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별다른 계획 없이 기숙사에서 나오느라 우산을 챙겨 나오지 못한 나는 롱패딩의 모자를 우산 삼아 걸으면서 그냥 기숙사로 돌아갈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날씨도 안 좋았고, 여유롭게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을 기분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이런저런 운수 나쁜 일들에 지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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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내리던 날의 타임스퀘어

 

 

하지만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가면 그토록 꿈꾸었던 내 교환 버킷리스트 1번은 상처만 가득한 여행으로 남을 것 같았다. 운수가 나쁘다는 이유로 내가 몇 년 동안 기다려온 기회를 그렇게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다만 도서관에 앉아 여유롭게 책 읽는 것은 정말 불가능할 것 같아,사람들의 행복한 기운을 느낄 수 있는 타임스퀘어를 구경하기로 마음먹었다.

 

결과적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비인지 눈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추적추적 내렸지만, 타임스퀘어의 빛나는 전광판들과 그 아래 사람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방해하지는 못했다. 환한 웃음으로 가족, 친구들과 사진을 찍는 사람들, 신나는 표정으로 브로드웨이 공연 티켓을 사는 사람들, 길거리의 상점에서 수많은 쇼핑백을 들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나오는 사람들. 타임스퀘어는 행복과 열정의 공간이었다.

 

그 행복과 열정의 공간을 거닐면서, 나는 엄청난 치유를 받았다. 빛나는 전광판에 압도당하는 것도,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특이한 옷을 파는 옷 가게들과 다양한 브로드웨이 극장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로터리’ 응모가 진행되고 있는 뮤지컬 위키드(Wicked) 극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앞에 계신 진행자 분께 여쭤보니, 로터리란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10명 정도의 관객을 추첨하여 저렴한 가격으로 공연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제도이며, 뮤지컬 위키드를 위한 응모 시간은 딱 10분이 남아서 10분 뒤에는 바로 추첨을 진행할 거라고 하셨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3만 원에 볼 수 있다니,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내게는 혹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재빨리 이름을 써서 응모함에 넣었고, 5분 정도를 기다리자 로터리에 응모한 사람들이 추첨 결과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로터리 티켓의 행운이 주어지는 그 10명 중 한 명이 본인이길 두 손 모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응모하면서 기대를 하면 당첨되지 않았을 때 상심이 너무 클 것 같아 기대하지 않기로 다짐했는데, 그 다짐은 왜 했나 싶을 정도로 진행자가 추첨 상자에서 용지를 하나하나 뽑아 호명할 때마다 내 심장은 기대에 부풀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어느새 당첨자가 9명이 호명되고 마지막 행운의 주인공만이 남아있었다. 모두가 숨죽이고 기다리는 가운데, 마지막 행운의 주인공의 이름이 불렸다.

 

난 그 주인공이 아니었다. 기대를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마음은 아니었나보다. 쓰라리고 아팠다. 역시 운수가 나쁜 날이라며 자신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하며 집에 갈 준비를 하는데, 진행자가 마지막 주인공이 로터리 추첨을 보러 나타나지 않아 ‘진짜’ 마지막 주인공을 한 명 더 추첨하겠다고 했다. 10번의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던 터라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나는 자리를 뜨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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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나쁜 날'에 받은

"I Won the Wicked Lottery" 뱃지

 

 

“Our final lucky lottery winner is....... TAEJU KIM!!!!!”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고 그냥 멍해지는 경험을 했다. 기쁨과 충격, 놀람의 감정이 휘몰아쳤던 3초가 지나고, 진행자에게 달려가 불린 이름이 내 이름이 맞는지 확인했다. 확실했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쓰인 그 이름 ‘TAEJU KIM’을 확인하는 순간, 운수 나쁜 날인 줄 알았던 그날은 인생 최고의 날이 되었다.

  

단돈 3만 원에 극장에서 가장 좋은 자리 중 하나에 앉아 뮤지컬을 보며, 나는 눈물을 쏟았다. 아마 주변 사람들은 내가 뮤지컬에 감동해서 눈물을 보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물은 뮤지컬에 대한 감동 그 이상을 담고 있었다. ‘운수 나쁜 날’이라는 생각에 갇혀 기숙사에 돌아가려던 나약한 생각에 대한 반성, 나 자신을 잘 다독여 타임스퀘어에서 뉴욕의 밤을 즐겼다는 뿌듯함, 내 버킷리스트 1번을 무사히 해냈다는 안도감.

 

지금 생각해보면 로터리에 당첨된 일 말고도 그 '운수 나쁜 날'에는 좋은 일이 많았다. 6시에 눈이 떠진 덕분에 뉴욕에 갈 수 있었고, 도서관의 위치를 헷갈리는 바람에 뉴욕 지하철을 경험하며 여행의 설렘을 느낄 수 있었으며, 비가 오는 덕분에 젖은 앞머리를 가리려 모자를 눌러쓴 내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싶지 않은 기분 덕분에 타임스퀘어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고, 우연히 위키드 극장을 지나간 덕분에 로터리 당첨의 행운을 누릴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그날이 ‘운수 나쁜 날’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그날 일어났던 나쁜 일들에만 의미 부여를 하며 ‘운수 나쁜 날’로 규정을 해버렸기 때문이었다.

 

10개월이 지나서야 이를 깨달은 지금의 나는, 브로드웨이 극장에 앉아 서럽게 눈물을 쏟는 2019년 1월의 추운 겨울날의 나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남기고 싶다.

 

“태주야, 좋은 일만 일어나는 완벽하게 운수 좋은 날도, 나쁜 일만 일어나는 완벽하게 운수 나쁜 날도 없어. 하지만 좋은 일이 매일 하나씩은 있기에, 모든 날은 ‘운수 좋은 날’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어. 오늘도 운수 좋은 날을 보낸 것을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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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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