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정하게 포착된 시세계 – 문보영 "배틀그라운드" [도서]

한국현대시의 흐름 속에서
글 입력 2019.09.22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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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의 따끈따끈한 신간 『배틀그라운드』는 FPS게임 배틀그라운드를 배경으로 하는 시집이다.

문보영 시인은 시집 『책기둥』으로 2017년 제 36회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신인이다. 사실 김수영문학상이라고 하면 일류 시인을 배출하는 정통적인 루트로 유명하다. 1981년부터 민음사에서 운영되어온 김수영문학상은 2006년부터 운영방식을 바꾸어 신인 시인들만이 응모할 수 있는 문학상이 되었고, 당선자는 한국 문단에서 크게 인정받으며 시인으로서의 행보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명성의 시인이 『배틀그라운드』라는 시집을 발표한 것은 실로 충격적이다. 원로 시인들이 장난으로 여길만한 소재를 채택한 동시에 시문학과 FPS게임의 오묘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는 이 시집을 통해, 문보영이라는 시인이 시적 상황이 포착하는 방식과 오늘날 한국현대시의 특징적인 표현인 병치(竝置)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크기변환][포맷변환]배틀그라운드.jpg
 
131.jpg
FPS게임 배틀그라운드(위)와
시집 배틀그라운드(아래)




시적 상황의 ‘다정한’ 포착 - 문보영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게임 소개

「배틀그라운드」는 원에 관한 게임이다. 한 비행기에 탑승한 플레이어들은 약속된 섬으로 향한다. 낙하산과 함께 섬으로 뛰어내린다. 섬에 원이 생기는데, 어디에 생길지는 아무도 할 수 없다. 원은 점점 줄어들며, 원 바깥에 있으면 체력이 빨리 바닥나므로 유저들은 원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동시에 적과 싸워야 하며 단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운다. 섬 밖에서 아이템을 가져올 수 없으므로 바닥에서 총과 에너지드링크, 붕대, 스코프 등을 주워야 한다.

- p13


시집은 시를 보여주기 이전에 게임에 대해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시인은 배틀그라운드를 “원에 관한 게임”이라고 정의한다. 배틀그라운드를 통해 시인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원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인 것이다. 소위 자기장(닿으면 체력이 서서히 감소하는 유해한 지역)이라고 불리는 영역이 좁아질 때 발생하는 사건들, 그리고 그때 유저의 감정과 행동은 흥미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이러한 감정은 어떠한 모습을 보이는지, 그 행동들은 우리 현실의 어떤 모습들과 닮아있는지 시인은 재치있게 표현한다.


1
별들은 다른 존재의 주위를 돌면서 본인도 돈다

누군가의 주위를 잘 돌려면 본인도 돌아버려야 하기 때문에

헨델과 하이든 소사이어티 오케스트라의 모차르트 Masonic funeral Music 연주가 끝나자 고요한 정적 속에서 한 소년이 Wow! 하고 외쳤다 악단의 리더 David Snead는 그것이 자신의 40년 음악 인생에서 최고였다고 말했으며 Wow 소년을 만나려 했다

소년이 숨었고 세상은 수색을 시작했다

2
지구의 자전축은 23.44도 기울어져 있다 덕분에 똑바로 걸어도 내면과 정신은 23.44도 기울어져 있다 인간이 똑바로 걷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모든 존재가 동시에 23.44도 기울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미치고 다른 한 사람도 미치고 모든 사람이 미치면 아무도 미치지 않게 되니까

3
하나의 전자가 하나의 양성자 주위를 돌면서 둘은 각자 자전하고 있었다 소년은 그때 나는 잡음을 들었다

4
그게 어떻게 들리니

환상은 천막 같은 거예요
설원에서는 별이 잘 보여요

도망치는 소년이 뒤를 돌아본다

5
소년은 원 밖으로 뛴다

6
똑바로 걷고 싶다면 23.44도 기울어진 쪽과 반대편으로 23.44도 기울어서 걸으십쇼 그러나 타인의 시각에서 당신은 혼자 기울어진 사람이므로 소년이 나타나 wow! 하고 외친다

7
도망치는 소년을 극단으로 몰고 간 다음 절벽 앞에 세운다 원은 부조리하기 때문에 줄어들어 점이 되는 순간에는 모두가 만나게 된다.

- p56, 「배틀그라운드 - 극단의 원」 中


FPS게임 배틀그라운드에 등장하는 원은 유해한 자기장을 몰고 오기 때문에 사람들은 좁아지는 원을 피해 점점 원의 중심으로 모일 수밖에 없다.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유저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행동들은 문보영의 시 속에서 “극단의 원”이라는 모티프로 탄생한다. 배틀그라운드의 비켄디 설원맵에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배틀그라운드의 “설원”과 “극단의 원” 모티프, 오케스트라와 소년의 모티프, 별과 지구와 원자의 자전 모티프와 얽혀 하나의 시를 완성한다.

문보영 시인의 시에서는 다양한 차원의 세계들이 교차해서 등장하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어느 하나가 일방적으로 시를 견인하지 않고 각 모티프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계속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공전과 자전을 반복하는 우주와 원자의 이미지(1~3) 위에 어느 덧 도망치고 있는 (극단의 소년인 동시에 배틀그라운드의 설원맵 속을 달리는) 소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4). 소년은 도망가기 위해 원 밖으로 뛰지만(5) 그 위로 홀로 기울어진 사람과 극단에서 혼자 wow!를 외치는 모습이 다시금 중첩되고(6), 결국 원은 점점 좁아져 소년이 있는 곳으로 모든 것이 수렴하는 이미지가 된다(7).

시인은 배틀그라운드라는 콘셉트를 기본으로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덧입혀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는 시집 속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동시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주인공들은 심작박동 그래프를 배틀그라운드의 지형삼아 넘어다니기도 하며(「배틀그라운드 – 일어나는 일이 스스로에 관해 말하다」), 배틀그라운드의 유저들을 치아질환 환자 입속의 충치들로 치환시키기도 한다(「배틀그라운드 – 게으른 기억」). 시인은 특유의 재치있는 발상으로 현실의 장면과 게임의 장면을 중첩시키며 새로운 시적 상황을 발생시켜 독자에게 즐거움을 선사한다. 기존 게임의 세계관은 새로운 창작자에 의해 이질적인 대상들과 섞이게 되고, 결국 전혀 엉뚱한 분위기의 작품이 탄생하게 되어 독자들은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한편 이렇게 각 작품들을 둘러보면서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터득할 수도 있다. 일상은 이미 어떠한 모양으로 존재하고 게임 역시 개발자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각 대상을 개별적으로 상대했을 때 우리는 일상에 지칠 수도 있고, 게임의 비현실성에 환멸을 느끼게 될 수도 있어 그 자체는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문보영의 시 속에서는 각 세계의 잠재적인 위험은 사라지고 재치있는 방식으로 세계와 대면할 수 있어 우리는 세계를 다정하게 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문보영이 시적 상황을 포착하여 제시하는 방식은 가히 ‘시적 상황의 다정한 포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비유가 아닌 병치에 대하여 - 21세기 한국현대시 읽기



바닥을 기는 송경련의 머리는 떡 졌다. 왕밍밍과 송경련 남부로 향한다. 해변을 따라 기어서 간다. 총신이 긴 구식 총. 송경련. 엎드린 자세로 조준한다. 왕밍밍. 녹지 않는 땅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은 용기 있는 땅인가? 송경련은 머리가 떡 졌지만 조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듀오가 해안선을 따라 기어간다. 세상은 더듬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호수를 떠올린다. 호수의 동쪽 지대는 슬픔이 넓어서 발을 담그기에 좋지. 우리가 여기 끌려왔을 때를 기억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진실에 가까운가? 송경련의 심장에 작은 문제 발생한다. 심장 판막을 갈자. 너 죽어? 부추기지 마. 등에 찬 skorpion이 무겁다. 떡 진 머리가 감추고 있는 귀밑 상처. 상처에서 윤이 난다. 몇 마일은 남았어. 힘을 비축하고 발싸개를 갈자. 다시 조준했고 그동안 심장 판막은 흘러간 피가 되돌아오지 않도록 도왔다. 귀를 닦아줘. 송경련은 그런 말은 할 줄 모른다. 너는 용기 있는 땅인가? 돌아가지 않는 게 중요하지. 포복 자세로 더 간다. 그녀들은 위험하건 말건 적응해버렸다. 어제는 죽는 게 좋았지.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있다는 점에서. 왕밍밍은 말하는 대신 덤비고 싶었다. 죽는 건 익숙해져도 괜찮지만 죽기 직전이 익숙해지면 끝인 거다. 송경련. 조준하는 대신 덤비고 싶었다. 송경련의 심장이 떡 져 있다.

왕밍밍과 송경련을 조준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기어 다니는 인간들을 가리키며
저게 바닥에 있어야 하는 게 맞아요?
묻기도 한다.

- p82, 「배틀그라운드 - 떡 진 머리에 관한 슬픈 말장난」 中


「배틀그라운드 – 떡 진 머리에 관한 슬픈 말장난」에서 흥미롭게 다가오는 표현은 꼽자면 “송경련은 머리가 떡 졌지만 조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세상은 더듬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호수를 떠올린다”, “호수의 동쪽 지대는 슬픔이 넓어서 발을 담그기에 좋지” 등이 있다. 이 세 문장을 살펴보면, 각 문장에는 모두 독립적인 홑문장이 연결된 구조가 포함되어 있다. (머리가 떡 졌다-조준이 익숙치 않다, 더듬는 것에 가깝다 – 호수를 떠올린다, 슬픔이 넓다 – 발을 담그기 좋다) 이들이 연결된 구조를 보면 각각 역접(하지만)과 순접(때문에, 그래서)인데, 실제 내용은 역접도 순접도 아니다. 머리가 떡 진 것과 조준이 익숙지 않은 것은 어떠한 논리적 연관성이 없고, 나머지 문장들에서도 두 내용이 연결되는데 아무런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 표현이 독자의 눈길을 끌 수 있는 것은 결국 구조와 내용의 위화감에서부터 비롯된다.

90년대 이전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기법은 비유이다. 비유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개념을 수직적인 위계 속에서 연결하는 방식이다. (김동명의 시에서)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표현을 보면 내 마음(원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호수(보조관념)가 동원되고 있다. 이렇듯 비유를 사용하면 유사성을 바탕으로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에게 지배당하는 구조가 성사된다. 결국 위계의 모습이 비유 속에 반드시 포함될 수밖에 없고, 이는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나 (하다못해) 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다른 대상을 동원에 자신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21세기 시문학에 들어서면서는 (그리고 대부분의 현대예술에 있어서) 강렬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는 작품보다는 그 자체의 미학적인 이미지나 예술성이 훌륭한 작품이 환영받게 된다. 사회적인 메시지(ex. 80년대 민주화 운동)나 개인의 감정(ex. “내 마음은 호수요” 류의 전통서정시 계통)이 불러일으키는 마음의 울림은 다소 촌스러운 것들이 돼버린 것이다.

21세기 현대시에서 비유라는 표현의 자리는 병치(竝置)가 차지하게 된다. 병치는 비유와는 다르게 각 관념 사이에 위계질서를 도입하지 않는다. 각 관념은 동등한 위계에 놓이게 되고, 그냥 서로 가까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에서 예술성이 발생한다. 문보영의 표현들을 다시 보자. “송경련은 머리가 떡 졌지만 조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머리가 떡 진 것과 조준이 익숙치 않은 두 관념 사이에는 위계가 존재하지 않고, 한 관념이 다른 관념에 포함되거나 지배되지 않는다. 그 두 관념은 그냥 나란히 존재하기만 한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묘한 시적 분위기가 발생한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 (필자의 표현력이 부족한 탓이긴 하지만) 예술적인 가치가 이 문장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두 표현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유사하지 않는 두 관념을 다만 가까이 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예술적 분위기를 발생시키는 것, 병치라는 표현법이 우리의 세계를 표현해주고 있다.

비유가 아닌 병치가 오늘날 우리의 예술적 감각을 효과적으로 자극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어쩌면 더 이상 위계와 감정과 메시지성(message性)으로 삶을 전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대는 우리가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고, 치열하게 감정을 쏟아가며 매달린다고 해서 드라마가 탄생하는 세계도 아니다. 그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간단한 비유로서는 표현되지 못하는 어떠한 모양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향할 곳 없는 이런 현대인들의 모습은 병치로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문보영이라는 신인이 이런 모습들을 담백하게 표현하여 우리에게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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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

이제 갓 두 번째 시집을 발표하는 시인치고, 배틀그라운드라는 실험적인 소재로 한 시집을 통째로 끌고 가는 것은 신인으로서는 엄청난 패기라고 볼 수 있다. 문보영이 『배틀그라운드』에서 보여주고 있는 담백하지만 명랑한 시세계는 2010년대가 마무리되고 있는 이 시점에 문단에 하나의 충격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된다. 현실은 무겁고 가상세계는 허무맹랑하지만 예술을 통해 비로소 둘 사이 새로운 대안이 탄생할 수 있었다. 시문학을 통해 세계의 위기를 헤쳐나가고 있는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들에 관심을 가지길 바라며, 신작 『배틀그라운드』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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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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