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윈드밀", 막연한 마비와 청춘 [도서]

제16회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 수상작 '윈드밀'
글 입력 2019.09.1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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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생각해보자.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물질에서 벗어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우리는 거대 자본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우리의 삶의 소소한 의미들은 자본과 얼마나 멀어져있을까? 우리의 행복은 자본으로부터 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종종 물질성을 목표로 삼기도 한다. 수단으로서의 물질을 추구하다 막대한 부담감을 견디지 못해 현실적인 타협을 본다. 하지만 그 타협의 과정은 정신의 고통이 따른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과정은 고통으로부터 마비되는 과정이다. 혹자는 성장이라고 이야기하며, 또는 찌들어간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어쨌든, 우리는 아픔을 점점 잊는 방법을 배워간다. 하지만 그 방향을 돌아보면 우린 스스로 갉아먹는 행위를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작가 박서영의 단편소설 <윈드밀>은 주인공과 그의 연인 혼타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푸드트럭에서 컵밥장사를 하고 혼타는 비보이 활동을 하고있다. 소설은 둘의 만남으로 시작해 서로의 인생을 함께 감당하며 살아가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은 현대의 물질성 속의 젊은이들을 그린다. 자본을 위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과 물질성에 마비되어가는 상황으로 현실을 반영한다. 소설은 물질성의 굴레의 근원을 해명하거나 비난하려 하지 않는다. 인물들의 삶을 만들고 그들의 삶이 어디로 향하는지 신파스러운 비극으로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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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Ollypuro




윈드밀



소설의 제목인 '윈드밀'은 주인공의 연인 혼타의 비보잉 기술의 이름으로, 혼타가 고속도로 위에서 팔리지 않는 뻥튀기를 위해 돌던 비보잉이었다. 그가 무대가 아닌 고속도로에서 윈드밀을 돈 것은 단순히 뻥튀기를 사가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 이유로 혼타는 차가 매섭게 달리는 뜨거운 고속도로의 아스팔트에서 윈드밀을 돌았다.


생존의 위협을 받아 윈드밀을 돌았지만 윈드밀 마저 생존에 위협을 받는 곳에서 돌게 되었다. 윈드밀은 주인공과 혼타가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환경이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들을 대변한다. 결국 주인공은 죽음의 순간에서 자본과 자아 사이에서 극적인 곡예의 순간을 윈드밀이라고 깨닫는다.




이름



소설은 혼타를 만난 주인공의 모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이 서술하는 혼타는 예술가지만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은 자본에 의해 생겨난다. 그의 실질적인 데뷔 무대는 모터쇼이며, 그날의 무대를 계기로 물질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는다.


그가 지은 이름인 혼타는 Honda와 Hyundai 둘 중 어느 발음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자본에 대한 부정확하고 막연한 환상을 의미한다. 혼타의 본명은 소설 내내 나오지 않는다. 죽음의 순간 직전, 주인공이 그의 본명을 물었을 때에도 혼타는 자신의 이름을 혼타라고 대답한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혼타는 자본에 의해 잠식당한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다.




관계의 단절



혼타와 주인공의 관계는 명징하지 않았다. 혼타는 예술가였지만 주인공과 혼타는 예술적 계기로 만나지 않았다. 주인공은 혼타의 춤을 막연히 상상하며 그를 만난다.


혼타와 주인공은 각자의 삶으로 함께했지만, 각자의 삶에 의해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혼타가 춤을 추고 있는 와중에 주인공은 컵밥 장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단절되어있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혼타와의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춤 기술을 선명하게 상상하려 노력한다.


주인공이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윈드밀은 소설을 관통하는 관계의 숙제가 된다. 그들의 단절은 성관계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혼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주인공은 혼타와의 잠자리에서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한다. 주인공은 혼타를 전부 받아들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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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Pylypchuk25




자본과 마비



주인공은 자본에 이해 신체와 정신이 마비되어간다. 자본과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할 순간마다 주인공은 자본을 선택하며 자신을 소모시켜간다.


신체적 마비는 손가락의 부상으로 인해 나타난다. 푸드트럭에서 컵밥을 만들던 도중 손가락이 베여 피가 나는 상황에도 주인공은 생계를 위해 장사를 선택한다. 그 결과로 주인공은 손가락을 쓰지 못하게 된다. 혼타와의 잠자리에서도 주인공은 새벽에 도매상에 가야 한다는 걱정을 한다. 이는 자본이 만든 육체적 피로로 인해 혼타와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주인공뿐만 아닌 혼타 또한 자본에 의해 마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정신적 마비는 이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는 주인공의 영어 이름을 지어줄 때 자본의 상표를 늘어놓으며 연인에게 자본의 희망을 투영시킨다.


그들의 자본에 대한 희망은 코카콜라 트럭으로 인한 최후로 끝난다. 그들은 코카콜라 트럭을 막연한 희망으로 따라갔고, 그들이 처한 위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경찰차를 피해 속도를 높였다. 마비로 인한 비이성적인 폭주는 그들의 파멸로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피와 코카콜라를 구분하지 못하며 자신들의 파멸과 자본 사이에서 갈피를 잃는다.


마지막 문장까지도 혼타는 자본에 잠식된 주인공과의 관계 속에서 디즈니와 맥도날드를 번갈아 되뇐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야 정민이라는 연인의 이름을 부른다.




막연함



소설의 막연함은 관계의 막연함과 목표의 막연함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당면한 문제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에서 상황은 더욱 궁지로 몰린다. 혼타의 척추뼈가 부러지고, 트럭의 타이어에 구멍이 났을 때 그들은 미국으로 떠나길 결심한다.


그들은 일종의 도피를 위한 계획을 세운다. 정확한 계획이 아닌 막연한 충동이다. 미국이라는 물질적으로 완벽한 환상을 가진 장소에 도달하면 관계의 막연함과 목표의 막연함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곳에서 피곤할 일이 없다는 상상과 함께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을지 기대하며, 주인 없는 땅이 있어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막연한 환상은 미국을 향해 눈 앞의 코카콜라 트럭을 따라가도록 한다.


*


물질만능주의는 경제적 풍요보다 부족으로 인해 나타난다. 경제적 가치로 인한 인간소외는 타인에 대한 폭력이 아닌, 자신을 향한 소모적인 가학으로 나타난다. 물질만능주의가 파괴하는 대상은 타인을 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자신의 파멸로 나타난다.


물질적 마비는 탐욕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사회적 환경으로 인한 굴레와 동반된다. 소설은 물질적 마비를 과장되게 보여준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이고 절박한 환경의 인물들이 무너지는 과정을 비극으로 그려낸다.



[김용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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