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개인'이 없다. [도서]

글 입력 2019.09.08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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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68년 전후로 발생한 2차 페미니즘 운동의 구호다. 출산, 양육, 연애 같은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던 것들 역시 사회 구조의 영향 아래 있음을 말하는 언어다.

 

베티 프리단은 <여성의 신비>를 썼다. 중산층 여성 대부분이 앓던 원인 불명의 병을 진단하는 책이었다. 우울, 고독, 허무 같은 것들이 증상이었다. 그들은 사회가 제시한 경로를 충실히 이행했다. 빈곤과 거리가 먼 가정에서 성장해 고등교육까지 수행했다. 여성은 가정 내 역할을 담당함이 마땅하다는 사회 분위기를 아무도 거역하지 않았다. 그게 ‘정상’으로 간주됐다. 남성은 사회로 진출해 공적 영역을 일임하고 여성은 가정에 종속됨이 사회가 말하는 ‘정상성’이었다.


그 정상을 성취하지 못하면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같았다. <여성의 신비>는 정상성을 성취하고도 우울증에 시달리던 여성에 대한 보고다. 똑같이 교육받고도 남성은 선택할 수 있었다. 스스로 원하는 바에 따라 무엇에 가담하여 어떤 인간이 될 건지 고민할 수 있었다. 여성은 어떤 엄마가 될 건지 고민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여성의 신비>는 증상의 원인으로 구조를 지목한다. 성별 분담 의식을 ‘정상’으로 치부한 사회 분위기가 여성의 우울을 양산하는 것이라 말했다. 책은 당시 여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소환되며 2차 페미니즘 운동의 확장에 기여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란 문장은 이데올로기가 된다.


구병모는 인터뷰에서 ‘문학은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탄생하는 것 (박성빈, <문학은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탄생하는 것>, 강대신문 1217호 4면 공감면, 16. 5. 17)이라 했다. 그의 소설은 늘 냉소가 작동한다. 희망은 기만이고 우회할 겨를 없이 현상 유지하기도 벅찬 인간들이 즐비한 세계. 그의 소설 속 세계는 늘 그런 식이었지만 그래서 특별했다. 현실과 밀착돼 있다. 당신이 대면했던 혹은 대면할 절망의 구체적 성분을 묘사한다. 대안을 모색하는 시도는 없지만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진단한다. <네 이웃의 식탁>도 그 흐름에 있는 소설이다. 2차 페미니즘 운동이 발발하고 50여년이 지났다. <네 이웃의 식탁>은 그 때와 지금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에 요진 가족이 입주한다. 경관이 보이는 수도권 외곽에 위치한 주택에 푼돈을 지불하고 입주한다. 정부와 계약을 맺고 경쟁을 통과해야 입주가 가능한 곳이다. 40세 미만의, 한 자녀 이상을 양육하는 핵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은 사회활동 없이 가정에 충실해야 하며 입주 후 3명 이상의 자녀를 출산해야 한다는 각서를 작성하면 입주 자격을 획득했다. 은오와 요진을 비롯해 세 가정이 더 있었다. 도심과 괴리된 공간에 주택을 세운 건 의도적으로 보인다. 그런 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은 그들밖에 없으니 서로가 서로의 삶에 관여할 거란 맥락이다. 공동체 구성을 권장한 셈이다. 좋은 환경, 좋은 공동체가 마련된 터전이라면 자녀를 양육하기도 용이할 거란 의식의 발로다.


비슷한 처지의 개인을 한 공간에 모아 놓으면 공동체의 미덕이 발휘될 거란 의식은 착각이다. 홍단희와 효내는 서로의 처지를 헤아릴 수 없다. 그러니 이해는 요원하다. 공동주택에 모인 이들 중 비교적 나은 형편인 홍단희는 줄곧 집에 머무르는 효내 역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일 거라 지레짐작한다. 홍단희는 효내가 좀 더 이 주택이 설립된 의도에 부합하기를 바란다. 회의에 참석하기를 바라고 공동 양육 같은 주택 내 안건에 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으면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좀 더 살가워졌으면 좋겠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같은 인사라도 첨부했다면. 홍단희는 효내를 엄마 같지 않다고 여긴다.


홍단희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규범을 충실히 따르려는 이다. 이성애자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하고, 한 명이상의 자녀를 출산하고, 남자는 사회로 나가 공적 영역에 있고, 여성은 가정 내 영역을 담당하는 가정이 ‘정상’이고 주류라고 여기는 이다. 그리고 거기에 본인이 포함되며 무수한 다수의 가정이 그럴 거라고 전제한다. 그는 엄마라면, 엄마니까, 란 의식을 달고 산다.


효내는 그럴 수 없다. 남편인 상낙의 수입만으로 경제활동을 영위하는 건 벅차다. 디자인 의뢰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프리랜서 업무를 지속해야 겨우 입에 풀칠할 형편이 된다. 집에서 업무를 보기에 돌봄 노동은 대부분 효내의 몫이고 남편인 상낙과 시댁, 친정 식구들 역시 그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힘들다고 성토하면 위로의 언어가 돌아오는 게 아니라 관두면 그만이라는 무시가 왔다. 그녀는 이미 충분히 삶이 버겁다. 엄마라면 자기 사위를 챙겨야 함이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주변인들의 인식을 충족시키는 작업도 이미 고역이다. 그러면서 자기 작업을 수행하는 것도 고작 하고 있다. 그런데 공동양육을 수행하자거나 지속적으로 모여야 한다는 홍단희의 요구는 부담을 넘어 불가능한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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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


요진의 가정 역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다. 남편은 준비하던 영화가 좌초되며 집에서 놀고 있다. 요진은 친척의 약국에서 카운터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한다. 집에서 노는 남편이 가정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지만 “남자라서, 남자는 명령을 하달해야 겨우 알아듣는 개” 따위의 언어를 발화하며 요진이 가정 내 일을 분담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요진은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돌봄 노동을 수행한다. 요진은 그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면서 이데올로기의 자장 아래 있다. 가사는 여성의 몫이라는 거대한 사회적 흐름을 그럭저럭 따르려 한다. 그게 정상인 것처럼 보이고 남들 역시 그렇게 사니까.


꿈미래실험공동주택 정책이 추진된 의도는 저출산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생계비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주거 공간이 마련된다면 출산, 양육 문제의 가속도가 줄어들 거란 기대다. 생존의 비용이 지불된다면 출산율 그래프가 상승의 모양을 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소설에서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출산 장려를 외치는 구호는 현실에서도 들린다. 인구는 국력이라는 외침, 이대로 가면 2750년에 한국에서 사는 인간이 전무할 거란 목소리도 발화된다. 그래서 정부는 양육비의 일부를 지급하는 정책을 펼친다. 정부가 공급하는 국민임대주택 또한 소설과 유사하게 신혼부부나 예비부부에게 우선 할당된다.


그러나 그것들엔 ‘개인’이 없다. 출산과 양육이 지금의 행복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왜 출산하고 길러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가 제대로 언급되지 못한다. 막연하다. 그게 당연하니까, 란 식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누군가와 관계 맺어 부부가 되고, 그러면 당연히 애를 길러야 한다는 의식의 산물이다. 혹은 세금 낼 사람이 없고, 일할 사람이 없어지니 미래의 자손을 위하여 출산하기를 종용하는 셈이다. 우리는 거기서 국가 정비를 위한 수단이 된다. 출산은 사회적 책임이 아니다. 개인의 선택이다. 출산 여부를 떠나서 일단 개인이 행복한 게 먼저 아닌가. 부모가 될지 말지는 선택하면 될 일이라는 구호를 듣고 싶다. (장강명, <저출산 대책을 넘어서>, 한국일보, 18.01.04)


개인의 처지가 배제된 정책은 유효하게 작동되지 못한다. 공동체는 와해된다. 그 중심에 요진이 있다. 요진이 거기 입주하고 난 후의 일들은 어쩌면 보통의 여자라면 으레 겪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시시각각 추파 던지는 이웃, 엄마로서의 지위에 충실하길 바라는 시댁과 친정, 가계와 육아가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 굴다가 이 사달이 난 건 순전히 네 선택 때문이라며 책임 주체에서 회피하려는 남편. 그것들이 누적되며 종국에 요진은 대답하기를 거부하는 식으로 문제에서 이탈한다. 여자 혹은 엄마니까 당연히 네 책임이라는 분위기를 더 이상 요진은 용납할 수 없다. 지쳐있다. 요진이 문제를 해소하는 방식은 요진 남편이 취하던 태도와 유사하다. 자신과 무관하다는 듯이. 공적 영역에의 진출을 도모하느라 생활의 문제에 무감각한 건 어쩔 수 없다는 태도. 요진은 그래서 설명하지 않고 떠난다. 그래 그럼 나도 무관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이를 낳아봐야 진짜 어른이 돼. 처음 요진은 그 말들이 저마다 스스로를 향한 격려인 줄 았았다. 출산과 함께 인생의 궤도가 틀어졌고 개성이나 욕망을 삶의 가장자리로 밀어 두는 데 익숙해졌지만 적어도 세상에 값진 생명을 내놓은 생산적인 인간이라는 성취감을 느끼고자 이를 악무는 위안의 제스처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상 그 말들은 자기변호에 가까웠다....(중략)...산부인과의 검사대에 올라가는 여자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몸이 어떤 자극이나 모욕에도 반응하지 않는, 동요나 서글픔 따위를 제거한 무생물에 가까운 오브제라는 사실을 철저히 인식하지 않고 지나갈 수 없었다. 그 과정을 흔히 정상 내지는 보편이라고 간주되는 경로를 거쳐 통과한 이는, 타인과의 어지간한 신체적 접촉 정도로는 눈을 부라리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 구병모, <네 이웃의 식탁>, 민음사, 2018, p82


 

수많은 여성의 삶이 모성 혹은 엄마 정도의 낱말로 쉬이 뭉뚱그려진다. 그리고 그렇게 뭉뚱그려지는 배경엔 구조적 분위기가 있다. <네 이웃의 식탁>은 성별 분담 의식이 잔존한 우리 사회를 보여준다. 특정 성별이 겪는 불공평한 처사가 엄마, 가족, 공동체 보존 따위의 명목으로 정당화된다. 국가는 그 불평등에 시달리는 개인의 일상을 고려하지 않은 채 출산장려정책을 집행한다. <네 이웃의 식탁>은 ‘개인’ 없는 정책의 구체적 양상을 드러낸다.

 

 



[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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