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뿌리 깊은 한글이 지나온 자리 [전통예술]

국립한글박물관에 다녀오다
글 입력 2019.08.3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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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에 호기심을 품다


평소에 시간이 날 때면 책을 읽는다. 시, 소설, 수필, 희곡 등 장르 불문하고 좋은 작품은 ‘한글의 힘’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고, 문장을 배열해서 작가의 정신을 글자에 담아내는 일련의 과정을 상상해본다. 그 시간의 끝에 잉태된 작품을 독자들은 책으로 만나게 된다. 글자에 녹아든 삶의 희로애락에 공감하기도, 위로를 받기도 하면서 천천히 읽어 내려간다. 이는 우리의 모국어, 즉 한글이 없었다면 누리지 못할 기쁨이지 않을까.

동시에 한글에 대한 질문을 무수히 품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품을 이루는 글자의 뿌리는 어디일까?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어떤 변천사를 거쳐 현재와 같은 형태를 띠게 되었을까? 한글이 창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언어적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먼 옛날에도 베스트셀러가 존재했을까? 그 책은 어떤 유통 과정을 통해 대중화되었을까? 한글은 어떤 계기로 널리 퍼져서 정보화까지 이르게 된 것일까?” 평소 품고 있었던 궁금증을 나열해보니 한 페이지를 넘겨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국립한글박물관을 찾았고, 그곳에서 한글의 변천사를 따라 걸어보는 시간을 보냈다.



한글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국립한글박물관 상설전시관에 들어서자 한쪽 벽에 적혀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이 눈에 띄었다. 당시 집현전 학자 정인지가 쓴 서문이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한글은 세종대왕이 백성의 문자 생활이 불편함을 딱하게 여겨 만든 ‘애민정신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이 서문을 읽자마자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한글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어떨까?”

한글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의미를 유추할 수조차 없었던 언어 실력의 한계와 답답함을 떠올리면 됐다. 재작년에 프랑스로 여행을 떠났을 때, 나는 불어를 제대로 읽거나 알아듣지 못했다. ‘Bonjour’, ‘Merci’와 같은 간단한 인사 외에는 아는 말이 없으니 마치 까막눈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 들려오는 특유의 강한 억양과 따라 할 수 없는 발음을 미워하기도 했다. 겨우 찾아낸 한인 마트에서 한글을 보고 어찌나 반가웠던지. 언어가 일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체감하게 되었다.

이처럼 일상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 한글이 인류 문화로 전승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눈앞이 캄캄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1443년 한글 창제 이후, 한글은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었다고 한다. 예컨대 양반들은 한글이 여성들이나 쓰는 문자라는 뜻의 ‘암글’이라고 부르며 비하했고, 연산군은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자 한글로 쓰인 책을 모두 불사르라는 명과 함께 ‘한글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숙종이 한글로 된 유지(有旨)를 승정원에 내려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게 하자, 도승지 유명견이 반대 상소를 올려 결국 ‘한글 유지’를 삭제하라고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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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순탄치 않은 과정을 탓하며 제자리에 머물렀다면, 한자를 차용해서 읽고 쓰는 삶이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한민족의 언어적 정체성을 규정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말맛을 살린 문학이나 노래가 주는 기쁨처럼 문자가 주는 혜택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신경준의 최초 한글 연구서인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 주시경의 『국어문법(國語文法)』,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선포한 '가갸날’, 『조선말큰사전』 편찬에 힘을 쏟았던 조선어 학회까지. 우리 조상들의 자국어에 대한 애정과 연구가 없었더라면 이토록 정교하고 아름다운 한글을 사용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한글이라는 문자의 혜택을 받고 살아가는 한국인으로서 감사함을 느꼈던 순간이었다.



과거의 베스트셀러


가끔은 책 속의 인물이 실제로 살아있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어떤 생김새일지, 어떤 톤의 목소리일지, 나의 상상과 다른 모습일지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궁금했던 소설이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어지면 챙겨보기도 한다. 인물의 호흡과 눈빛, 표정 등이 살아있어 이야기에 재미를 더하기 때문이다. 국립한글박물관에서 김만중의 『구운몽』, 김동리의 『감자』 등 교과서에 실린 소설의 초판본을 보며 당시에는 어떻게 읽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던 중 한글 필사본 소설의 전파와 한글 보급에 앞장서며 조선 초기에 대유행했던 책 대여점 ‘세책점’에 얽힌 일화를 알게 되었다. 까막눈이 많은 하층민 사이에서 소설을 전문적으로 읽어주던 ‘전기수’가 있었다. 실감 나게 연기한 탓에 이야기 속 영웅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에서 화난 관중이 전기수를 칼로 찔러서 죽이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전기수의 역할은 희곡 낭독회와 비슷한 형태인 것 같다. 역할을 맡은 배우가 실감 나게 연기함으로써 인물에 숨을 불어넣고, 관객들이 작품을 입체적으로 경험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문화가 날 것의 느낌이 들고, 투박하지만 흥미롭게 느껴졌다. 만일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문화를 체험해볼 수 있다면 세책점으로 달려가 전기수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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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는 필사본만이 존재했다. 춘향전, 장화홍련전처럼 한글로쓰인 고소설이 유행했다고 한다. 이후 방각본의 출현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고, 1910년대활판인쇄가 시작되면서 딱지본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베스트셀러였던 알록달록한 딱지본들이 눈길을 끌었다. 박물관 한쪽에 놓인 딱지본 중 『깔깔우슴주머니』를 펼쳐보았다. 근대에 나온 출판물이라 훨씬 읽기 수월했으며, 소위 아재개그 느낌의 유머가 많았다. 또한 순우리말로 구성되어 있고, 중간에 삽화를 넣어 재미를 더해 문맹률을 낮추고 한글을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놀 거리와 볼거리가 변변치 않았던 시절, 딱지본을 통해 현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새로운 세상을 마음속에 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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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한글박물관을 다녀와서


현대 사회에서 한글은 읽고 쓰는 것뿐만 아니라 보고 느끼며, 더 나아가 체험할 수 있는 문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문학을 통해 읽고 상상하면서 우리말의 고유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느끼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곱씹기도 하고, 매일같이 노출되는 한글 광고 속에서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다양한 우리말 표현과 한글 캘리그래피 등을 만날 수 있다. 이제 한글은 단순히 문자나 기록의 수단을 넘어 산업, 디자인, 예술 분야 등에서도 대표적인 문화 콘텐츠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한글은 문화 전반으로 생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을 통해 1443년 한글 창제 이후 오늘날까지 한글이 걸어온 길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실물 자료 중심으로 재조명하는 큐레이션 덕분에 한글의 역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동시에 앞으로 언어가 어떤 분야로 확장되고, 어떤 역할로써 수행될지 기대되기도 했다. 한글문화의 다양성과 문자로서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찰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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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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