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2004년 7월 29일 발굴기 [사람]

2004년의 여름을 찾아낸 2019년의 여름
글 입력 2019.08.11 0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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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3일부터

2019년 8월 6일까지의

2004년 7월 29일 발굴기



아빠에게 내가 쓰는 필름카메라를 소개했다. 시대가 거꾸로 간다는 말이 제일 먼저 돌아왔다. 아빠는 카메라를 향한 칭찬이나 새로운 취미에 대한 격려 대신, 본인이 썼던 니콘 카메라에 대한 얘기를 해줬다. 큰 돈 들여 산 카메라였다고, 아마 집 어딘가에 숨어 있을 거라고. 나는 보여 달라고 청했다. 결국 아빠는 그 날 저녁 옷장 깊숙한 곳에서 당신의 커다란 카메라 가방을 찾았다.


고향집에 오자마자 사진으로만 본 카메라부터 찾았다. 카메라 가방에는, 비어있는 빈티지 필름 상자 몇 개와 무거운 플래시 등이 어지럽게 들어있었다. 먼지를 털어가며 삼각대에 설치까지 했건만 니콘 카메라는 배터리가 없어 작동되지 않았다. 모두가 금방 맥쩍어져, 그 상태 그대로 카메라와 아빠의 카메라 가방은 아무도 쓰지 않는 방에서 다시 긴 잠을 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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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오랜만에 고향에서 푹 머물게 되었다. 카메라가 방치되어 있는 그 방에서 당분간 잠을 자야 했다. 이부자리를 피기 위해 아빠의 도움을 받아 카메라를 정리했다. 가방에 집어넣으려는데, 그 복잡한 카메라 가방 안에 다 벗겨진 레자 케이스 하나가 들어있는걸 발견했다. 얼마나 골동인지 조금만 손을 대도 껍질이 뚝뚝 떨어졌다. 한 손으로 꺼내들었다. 묵직했다.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열어보니 마찬가지로 필름카메라였다.


케녹스 FX-4. 아빠는 이 카메라의 주인을 언니로 기억했다. 어디까지나 기억이라서 정확하진 않았다. 도움을 받아 배터리실을 열어보니 부식은 없었다. 어쩌면 작동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로 바로 배터리를 주문했다. 이런 면에서는 추진력 있었다. 가족들에게 새로운 카메라의 등장을 알렸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아빠의 기억과는 달리, 언니들은 카메라를 낯설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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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배송은 무슨 문제인지 차일피일 미뤄졌고, 결국 내가 고향집을 비웠을 때 도착했다. 작동이 될까 안 될까. 너무 궁금해 집에 돌아오자마자 카메라에 배터리를 채워 넣었다. 뛰노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on버튼을 눌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의 허탈감이 밀려왔다. 시무룩한 마음에 배터리를 빼서 다시 카메라 가방에 넣었다. 잠시 누워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카메라를 다시 꺼내서 배터리 방향을 바꿔 넣었다. 일말의 기대를 품고 on버튼을 다시 눌렀다. 맙소사, 누르자마자 윙윙 소리를 내며 카메라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쉽게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15년 만에 카메라는 잠에서 깨어났다.


오토로 설정해두고 한 장, 셔터를 눌러 찍어보았다. 플래시가 번쩍하고 터져 나왔다. 곧이어 필름 감기는 소리가 나더니 연달아 윙윙 소리가 났다. 필름 장수를 다 채운 것이다. 고작 한 장이 부족해서, 필름은 무려 15년을 카메라 안에서 묵었다. 필름실을 열어보니 코닥 골드 필름이 들어있었다. 15년만의 외출이었다.


마침 귀가한 아빠에게 카메라 상탤 비치니, 아빠는 신기해하며 전번의 니콘 카메라에도 배터리를 끼워보라는 말을 넌지시 던졌다.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필름에는 영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사진이 나오면 주인도 명확해지겠다, 무슨 사진일까. 가족들 중 유일하게 작은 언니만 연이은 카메라 소식에 관심을 가졌다. 오히려 친구들이 빨리 현상을 맡기라고 성화를 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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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만에 세상 밖을 나온 필름이었건만 그러고도 한참을 통에만 갇혀있었다. 몇몇 조급한 성미의 사람들이 언제쯤 사진이 나오는지 물었다. 한 롤만 맡기기에는 택배비가 아까워서, 또 그만큼 내가 게을러서, 이제저제 미루고만 있었다. 그러던 중 SNS에서 ‘망우삼림’이라는 현상소를 알게 되었다. 피드를 내리는데, 웬 색 바랜 사진이 유표히 눈에 띄었다. 30년 전 아프리카에서 찍은 사진을 현상해드렸다는 글과 함께였다. 30년 전 아프리카가 다시금 되살아나는 필름의 기적. 그 길로 다음날 망우삼림에 방문해 필름을 맡겼다.


친구와 맥주 한 잔을 하며 깔깔 수다를 떨고 있었다. 가까운 과거의 일들을 이야기하며 마음껏 너덜댔다. 그러다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맙소사, 필름 스캔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친구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사진들을 차근차근 다운로드 받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첫 파일을 열자, 예상치 못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바로 나였다. 2004년 7월 29일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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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97, 98, ……, 02, 03, 04. 9살 때의 모습이었다. 머리를 양갈래로 높이 땋아 묶고, 흰색 썬 캡을 썼다. 작은 프릴과 리본이 달린 흰색 민소매 원피스에는 꽃무늬 양말과 분홍색 샌들을 신었다. 작고 끈이 긴 크로스백도 함께였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브이를 하고, 과감하게 팔짱도 꼈다. 배경은 여러 곳이었으나 옷과 날짜는 모두 같았다. 사진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보아 카메라의 주인은 언니가 아닌 아빠였다. 정말, 어디까지나 기억이라 정확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기했다. 언젠가, 난 참 변함없고 그대로란 생각을 했다. 그 생각대로, 사진 속 내 모습은 지금의 내 모습과 퍽 닮아있었다. 이 것 봐, 이때도 브이를 할 때 손가락이 휘었어. 친구에게 사진을 확대해 보여주며 말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친구를 향해 브이자를 해보이자, 친구는 사진과 내 손을 번갈아 보며 정말이네, 하고 웃었다. 머리숱 많은 것도 그대로야, 어쩜 양갈래 머리숱이 이렇게 많을 수가 있어? 이번에는 머리를 확대해 보여주며 말했다. 친구는 원하던 호응 대신 예리한 대답을 내놓았다. 머리숱이 많은 건 똑같지만, 사진 속 아이와 너는 전혀 달라 보여.


2004년 7월 29일의 나는 지금의 나와 퍽 다르기도 했다. 사진 속 아이는 계곡에서 온 몸을 담그고 즐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지금의 나는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발이 닿지 않으면 무섭기까지 하다. 사진 속 아이는 동물원을 신나게 구경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동물원을 가지 않는다. 동물원의 존속을 반대한다. 사진 속 아이는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지금의 나는 사진 찍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 찍는 것이 더 취향이다. 늘 제자리걸음 같았던 매일 매일도, 이렇게 보니 제법 달라졌다. 벚꽃, 장마, 폭염, 단풍, 눈. 비슷한 15년의 루틴을 도는 동안 많이도 자랐다. 참 이상하다. 난 참 그대로라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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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사진을 보냈다. 언니들은 어린 시절의 내가 너무 귀엽다고 극성을 부렸다. 아빠는 당신의 사진 솜씨가 대단하다며 자화자찬했다. 아빠는 이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서 찍은 사진들인지 장소를 줄줄 읊었다. 이렇게 키웠는데 지금은 조금 아닌 것 같다, 농담 반 진담 반 던지던 아빠는 끝으로 잠에 들기 전, 가치 있는 보석 같은 자료를 찾았다며 나를 칭찬했다. 편안한 밤이네, 잘 자. 겉으로는 밤 인사만이 오갔지만 모두들 04년도를 회상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필름 한 통 덕이었다.


2004년 7월 29일은 목요일이었다. 날이 맑았다. 어린 나는 흰 원피스를 입고 청주, 괴산 등지를 누볐다. 그 날을 마지막으로 찍어낸 이 카메라는 곧 작은 언니의 것이 될 예정이다. 카메라는 새 주인과 함께 곳곳을 누비며 또 언젠가의 추억을 보관해 줄 테다. 어쩌면 그러다 또 몇 년을 벽장 속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영영 잊히다가 누군가의 호기심에 묵혀있던 오늘의 기억이 깨어날 수도. 2004년의 여름을 찾아낸 2019년의 여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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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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