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내일의 비너스에게 바치는 연극 : 비너스 인 퍼 [공연]

글 입력 2019.08.0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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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너스 인 퍼』는 소재와 포스터 모두 도발적이다. 보수적인 성관념이 짙은 한국에선 도발을 넘어 모욕적일 수도 있다. 마조히즘이라니, 양지에선 거의 들어볼 수도 없고 자칫 잘못하면 정치적으로도 공격받을 수 있다. 시놉시스를 보면 여성의 순종성을 옹호하는 쪽은 아닌 것 같지만 그 과정까지 어떻게 설득력 있게 풀어나갈지 궁금했다. (지난 프리뷰 참고)

이 우려는 극이 끝났을 때 같이 끝장났다. 이보다 더 유쾌할 수 있을까싶을 정도로 역전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신의 고귀함 대신 성적 대상으로만 소비되고 있는 오늘날의 비너스가 보았다면 얼마나 흡족했을까.



성(gender) 그리고 성(sexuality)


이 연극에서 말하는 성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젠더의 경우 한 사회에서 특정되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말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이 가장 활발하게 공격하고 있는 성의 영역이기도 하다.

“무엇이 여성이고, 무엇이 남성인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개인이 가장 먼저 내면화하기를 요청받는 정체성은 성별이다. 신체적으로 확연하게 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에 흔들리는 우리 인간은 성별을 그 사람이라고 무심코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가 말하는 젠더가 가진 힘은 크다. 무엇을 여성으로, 남성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사고에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오늘날 페미니즘의 저항은 이 정의에 이의를 제기하고 ‘무엇’의 자리에 그동안 품을 수 없었던 욕망을 집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에는 다양한 표상들이 있지만 정말 대표적인 여성성과 남성성의 이미지를 뽑아보자면 여성의 경우는 아름답게 화장하고 웃고 있는 모습, 남성의 경우는 정장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일 것이다. 여기서 각자 생각하는 형태가 다를 수는 있지만 요지는 동일하다.

여성은 외모, 남성은 권력. 각자에게 요구되어 왔고 요구하고 있는 성의 특성이다. 외모는 곧이어 상냥함, 모성, 배려심 등으로 이어지고 권력은 경쟁심, 적극성, 도전정신 등으로 이어진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에서 파생된 성격이 이렇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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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다와 토마스


『비너스 인 퍼』의 벤다는 이 경직된 젠더 관념을 이중적으로 뒤집어버린다. 그녀는 사회가 좋아할만한 모습이다. 잘 꾸몄고, 마르고, 섹시한 옷차림에, 극의 전반에선 애교도 많고, 어딘가 남성을 잘 이해해주고, 꽤나 순종적이다. 그러나 연출가 토마스에게 애원하고 매달리며 오디션 기회를 따낸 그 순간부터 그녀는 끊임없이 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시나리오 뒤에 숨어 있는 남성의 욕망에 대해 지적하고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여성에 대해 따져 묻는다.

이 연극 속 또다른 연극 ‘비너스 인 퍼’에서 벤다라는 등장인물은 쿠셈스키 박사를 만나며 마치 자신의 욕망이 개화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시작은 박사의 요청이었지만 점점 지배하는 것에서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벤다는 말한다. ‘이것이 왜 여성의 욕망이냐고, 너의 욕망을 포장하지 말라고.’

이 지점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만난다. 쿠셈스키는 자신의 성적욕망-마조히즘-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성을 사디스트로 만들고자 한다. 그 여성이 원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네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 입장에서의 여성성 규정이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억압으로 이어진다.

‘까진 여자, 밝히는 여자가 되지 마. 사회는(남성은) 너를 싸고 천박하게 불거야. 무섭지?’

어린 시절부터 남성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탐구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주위에서도 적극적으로 호응해준다. 그들은 포르노든 자위든, 쌓인 욕구를 풀어나간다. 여성은 그 모든 것이 금지당한다. 사회(남성)라는 거대한 시선 앞에서 자신의 욕구를 부끄러워하고 어디를 만져야 하는지, 피임과 임신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잘 모른다.

어쩌다 접하게 되는 성인물도 모두 남성관점의 성애를 다루는 것이 대다수라 여성 입장의 욕구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는 대중문화에도 잘 녹아있어 성애에 적극적인 남성과 그를 ‘수줍게 받아들이는’ 여성의 이미지가 곳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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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구도가 가장 극단적으로 진화한 형태가 아닐까?
아무런 말도, 저항도 할 수 없는 섹스 인형/로봇


극의 중반, 비너스의 등장이 인상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익숙한 여성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던 인간 여성 벤다는 본연의 모습, 비너스로 돌아가 말한다. “야, 솔직해져봐.”

이전의 순종적인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발바닥으로 토마스를 밀어내기까지 하며 자신의 힘을 즐긴다. 이 여신으로의 변신은 사회가 정의한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탈을 벗어던지며 여성 자신의 모습을 되찾는 행위였다. 갑자기 신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여성 안에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는 남성의 모습과 다르다. 힘있지만 유쾌하다. 유혹적이지만 지배적이다. 여신은 그저 강하고 지배적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웃을 줄 알고 유혹할 줄 알며 동시에 지배자이다. 사회(남성)의 베일을 벗겨냈을 때 보이는 여성이, 이렇게 멋있다.



자유 그리고 권력


비너스의 등장 이후 주도권은 벤다에게 넘어갔다. 인간 남성이 어찌 신에게 거스를 수 있을까. 그의 광채를 보고난 이후 토마스는 벤다에게 끌려다닌다. 그녀의 말,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심지어 연출가 자신의 권위인 연출행위마저 벤다의 지도 아래 해낸다.

극 초반의 모습과 완전히 달라졌다. 배우로서의 의견제시를 자신이 연출가라는 말로 묵살해버렸던 그가 파격적인 극의 변화에도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는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벤다와 그녀가 바꿔나가는 자기자신이다.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는 복종하고자 한다.”

여성을 복종시키고자 했던 쿠셈스키였던 토마스는 벤다가 그를 ‘토마스’로 명명하고 뒤이어 ‘벤다’의 자리를 넘겨주면서 복종의 쾌감을 알아갔다. 극 속의 극 ‘비너스 인 퍼’는 엄연히 오디션 중이기 때문에 연기와 현실이 자유롭게 교차하는 공간이다. 현실의 토마스는 벤다의 지도 아래 극 속의 이름 쿠셈스키-‘토마스’를 받고, ‘토마스’는 다시 ‘벤다’가 된다.

‘토마스’와 ‘벤다’는 모두 극 중 피학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쿠셈스키-‘토마스’는 스스로 극 속 인물 ‘벤다’에게 복종하고자 한 인물이고 ‘벤다’는 그 목줄을 넘겨받았으나 사실 쿠셈스키를 사랑하여 억지로 그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었다. 지배의 쾌감을 알아가는 척 했으나 사실 쿠셈스키를 속이고 있었던 것이다. ‘비너스 인 퍼’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된 쿠셈스키는 ‘벤다’를 버리고 떠나지만 우리의 연극 『비너스 인 퍼』는 달랐다. ‘벤다’의 역할을 쿠셈스키-‘토마스’에게 넘기며 너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남을 굴복시키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이 복종하고 싶은 욕망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같은 욕망의 서로 다른 모습이다. 두 관계는 상호적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변모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을 지배하려했던 차가운 토마스는 숨은 내면의 모습 ‘벤다’를 만나며 열정적으로 변해간다. 벤다보다 더 적극적으로 연기하며 피학성향이 개화한다. 여기에 벤다가 한 것은 그저 연출이었다. 여성의 욕망을 덮으려했던, 여성의 욕망에 자신의 것을 씌우려했던 그가 자신을 직면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들었을 뿐이다.

극 속에서 벤다와 토마스의 권력관계가 역전되었듯이 유쾌하고 유혹자인 연출가로서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남성의 모습을 새롭게 연출할 수 있을까? 이는 자유와 권력의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가, 사회의 베일을 걷어내고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힘을 얻을 것인가.

여성성이 모성이라는 말이 있다면, 먼저 그 모성은 어떤 말인지 질문한다. 자상한 어머니가 있다면 무서운 어머니도 있다. 심리학에서 자상한 아버지와 엄격한 아버지를 나누듯 어머니역시 마찬가지이다. 결점을 포용하는 따뜻함과 동시에 변화를 촉구하고 잘못을 질타하는 무서움도 있다. 그동안 사회(남성)의 입맛에 맞추어 편집되었던 여성성을 이제 다시 연출할 때가 왔다.

내가 여성이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는다. 우리는 수많은 자아 정체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다면적인 존재이다. 성별은 그 중 신체적이며 가시적인 특징일 뿐이다. 여성이라는 것은 나에게 종속된 특징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여성이 되고자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가-남성이-쿠셈스키가-토마스가 나에게 씌우고자 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민감하게 느끼고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거부해야 한다. 내 안의 비너스를 깨울 시간이다.

벤다가 힘을 얻기까지 완벽하진 않지만 도식화해보면 순종-> 저항-> 변신-> 지배의 단계가 있었다. 극 속에서 의자 뒤에 서있던 그녀는 의자에 앉았고 마지막엔 그 위로 올라갔다. 집요하게 욕망의 근원을 캐낸 끝에 토마스로부터 “만세, 아프로디테”라는 항복 선언을 받아내며 비너스의 광채를 흩뿌렸다. 이는 연극이기 때문에 권력변화가 드라마틱했지만 현실에서도 느리지만 꾸준히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일상에서, 방송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그동안 수많은 토마스들이 ‘벤다’를 만들었고 그녀를 비참하게 했지만 ‘비너스 인 퍼’는 끝났다. 이제 여성들은 사회가 만들어낸 욕망과 덮어씌운 베일을 걷어내고 자신의 현실에 대해 질문하며 싸우고 있다. 여전히 연출가 토마스는 살아있어 그 목소리를 짓누르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다.

비너스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변신할 것이다. 다만 이는 지금까지와는 또다른 방식으로, 보다 유쾌하고 보다 유혹적이다. 토마스의 복종이 벤다의 명령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도래할 비너스는 억압이 아닌 매혹으로 다가올 것이다.

내일의 비너스에게, 오늘의 벤다에게 전한다.

“만세! 아프로디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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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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