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난 갈매기예요 [공연예술]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와 산울림 소극장의 연극 <외 갈매기>
글 입력 2019.07.2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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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갈매기예요.

아니에요.

난 배우예요."


- 안톤 체호프, <갈매기>, 4막 중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볼 때마다 가장 기다리게 되는 것은 니나의 바로 이 대사이다. <갈매기>는 어떻게 보면 시골을 배경으로 일상을 담은 로맨스이고, 한편으로는 도대체 이걸 어떻게 건드려야 할지 난감한 작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갈매기>는 연극을 위해 쓰인 희곡이라는 사실이다. 즉, <갈매기>는 연극으로 봐야 한다.

올해 산울림 소극장에서는 러시아 문학을 연극으로 올리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푸시킨의 <스페이드의 여왕>,  고리키의 <밑바닥에서>에 이어 최근 공연창작소 공간에서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공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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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특히 체호프의 글을 좋아하는 나는 <갈매기>를 공연한다는 사실에 보러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갈매기>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산울림 소극장의 공연은 내가 갖고 있던 <갈매기>의 이미지와 무대 위에서 만난 <갈매기>를 비교해보는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갈매기>는 연극을 목적으로 한 희곡이기에 이 작품의 진가는 무대 위에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무대 위에서 표현된 연극 <갈매기>는 과연 어땠을까?



1. 희곡 <갈매기>

희곡 <갈매기>의 첫 장면은 마샤와 메드베젠꼬의 대화이다. 메드베젠꼬는 가난한 교사이다. 그는 마샤를 사랑한다. 그러나 마샤는 작가 지망생 뜨레쁠레프를 사랑한다. 마샤는 왜 항상 검은 옷을 입고 다니냐는 메드베젠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내 인생의 상복이니까요."


- 안톤 체호프, <갈매기>, 1막 중



두 사람의 엇갈리는 사랑은 <갈매기>의 수많은 관계 중 일부에 불과하다. 마샤가 사랑하는 뜨레쁠레프는 니나를 사랑한다. 니나 역시 뜨레쁠레프를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시골에 뜨레쁠레프의 어머니이자 유명한 배우 아르까지나와 그의 애인이자 성공한 작가인 뜨리고린이 도착한다. 여기에 뜨레쁠레프의 삼촌 쏘린, 마샤의 부모님, 의사 도린까지 합하면 <갈매기>의 인물 간 관계는 굉장히 복잡하다.

<갈매기>는 뜨레쁠레프가 자신의 연극을 올리는 극중극을 준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호숫가에 마련한 무대에서 진행되는 연극의 배우는 니나이다. 그러나 20만 년 뒤 지구의 모습을 다룬 뜨레쁠레프의 연극에 관객들은 집중하지 못하고 한 마디씩 말을 보탠다. 결국 뜨레쁠레프는 폭발하고, 연극은 중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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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한국에서 개봉한 마이클 메이어 감독의
영화 <갈매기> 속 연극 장면


아르까지나는 자신의 아들이 뜨리고린을 질투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보태어 니나는 유명 작가 뜨리고린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뜨리고린에 대한 니나의 관심이 커질수록, 니나는 점점 더 뜨레쁠레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러한 모습은  뜨레쁠레프가 죽은 갈매기를 니나 앞에 내려놓는 장면에서 시각화된다.


뜨레쁠레프 : 오늘 비겁하게 이 갈매기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당신 발치에 놓겠습니다.

니나 : 무슨 일이죠? (갈매기를 들고 들여다본다)

뜨레쁠레프 : (사이를 두고) 조만간 나는 이런 식으로 자살할 겁니다.

니나 : 당신을 이해할 수가 없군요.

- 안톤 체호프, 김규종 역, <체호프 희곡 전집>,  425쪽


이 모든 것이 쌓이고 쌓여 결국 뜨레쁠레프는 권총 자살을 시도한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고, 아르까지나는 서둘러 뜨리고린과 함께 시골을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 니나와 뜨리고린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니나는 뜨리고린의 뒤를 따라 모스크바로 떠난다.
 
그러나 니나의 가출은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 니나는 뜨리고린과의 사랑에서도, 배우로도 성공하지 못한다. 2년 뒤, 뜨레쁠레프는 작가가 되지만 망가진 모습의 니나를 만난 뒤 자살한다. 자살한 뜨레쁠레프의 건너편 방에서는 아르까지나와 뜨리고린, 마샤, 마샤의 부모님, 의사 도린이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2. 포르테로 시작해서 피아니시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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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안톤 체호프


1895년 11월, 체호프는 희곡 <갈매기>를 완성하고 편지에서 이렇게 언급한다.


"연극 예술의 원칙에 맞는 점은 하나도 없는 작품입니다. 포르테로 시작해서 피아니시모로 끝나거든요."


- 출처 : 오종우(2017), 체호프 <갈매기>의 복합 매커니즘, 노어노문학, 29(3)



편지에서 언급되는 것처럼 <갈매기>는 체호프가 의도적으로 기존 연극 예술의 원칙을 거스르며 쓴 작품이다. 연극은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 간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예술이다. 따라서 갈등과 사건은 연극을 진행시키는 핵심요소이다. 그러나 <갈매기>는 그렇지 않다.

<갈매기> 서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뜨레쁠레프의 자살시도, 니나의 가출, 뜨레쁠레프의 자살 세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세 사건 중 어느 것도 무대 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관객은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오직 배우의 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뜨레쁠레프의 자살시도는 아르까지나의 말을 통해서, 니나가 가출한 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뜨레플레프의 설명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심지어 뜨레쁠레프가 자살할 때 무대 위에서 인물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

뭔가 터질 것처럼 갈등 요소가 가득한데, 결국 무대 위에서는 아무것도 터지지 않는다. 이것이 <갈매기>의 특이점이다. 도대체 체호프는 왜 이런 희곡을 썼을까? 그 이유는 역시 체호프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항상 서로를 쏘거나 목매달아 자살하거나 사랑을 고백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분명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대부분 그들은 먹고 마시고 배회하고 무의미한 말들을 한다. 무대는 이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 위의 출처



즉 체호프는 일상의 모습을 무대 위로 옯겨 놓은 것이다. 이는 체호프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단편소설 <공포>는 시골에 사는 친구의 집에 간 화자가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친구 아내와의 불륜이 이 작품의 핵심 갈등이 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공포>를 끝까지 읽어보면 결국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모든 갈등 요소를 해결하며 살아가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며, 결국 삶은 삶대로 계속되며 그 속에서 남는 회한과 멜랑꼴리가 체호프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정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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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공포>등이 수록된
<체호프 단편선>, 민음사
 

따라서 무언가 갈등이 일어날 것처럼 시작한 <갈매기>는 작은 탄식이 나올 정도의 허탈감으로 끝난다. 만약 이 작품이 포르테로 시작해 포르티시모로 끝났다면 이런 감정은 결코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3. 산울림 소극장의 연극 <외 갈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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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소극장의 연극 <외 갈매기>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인물의 개성이었다. 희곡 <갈매기>는 무대 위에서 극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물의 개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작가 지망생 뜨레쁠레프, 순수하고 아름다운 니나, 성공한 여배우 아르까지나, 그의 애인이자 유명 작가 뜨리고린, 한때 인기 있던 시골 의사 도린, 그를 좋아했던 뽈리나, 뽈리나의 남편 샤므라예프, 두 사람의 딸 마샤, 마샤를 짝사랑하는 가난한 교사 메드베젠꼬, 그리고 은퇴한 뒤 시골 영지에서 사는 쏘린까지. <갈매기>에는 다양한 인물이 나오고 인물의 애정 관계와 인생관, 예술관을 둘러싼 갈등이 촘촘히 겹쳐있다. 자칫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연극 <외 갈매기>에서는 능숙한 배우들의 연기로 인물의 개성이 확연히 구분되며 연극만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할만한 점은 갈매기의 등장이었다. 연극 <외 갈매기>에서는 극중 인물들이 갈매기를 바라보는 장면이 몇 번 등장했다. 관객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매기를 어떻게 표현할지가 중요했는데 연극 <외 갈매기>는 두 가지 방법으로 이를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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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갈매기를 형상화한 배우의 등장이었다. 갈매기가 나오는 장면마다 무대 뒤편에서는 갈매기를 형상화한 흰옷을 입은 배우가 나타나 관객이 갈매기라는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했다. 두 번째는 역시 배우들의 연기였다.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대상인 갈매기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서만 그 존재가 살아날 수 있다. 특히 모든 배우들이 등장한 장면에서 갈매기가 나타나자 각자 역할의 개성을 살려 갈매기를 대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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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 소극장 연극 <외 갈매기> 무대


<갈매기> 속 수많은 등장인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람은 바로 마샤였다. 사실 마샤는 이전에 봤던 책이나 영화에서도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낀 인물이다. 왜 항상 검은 옷을 입냐는 물음에 "내 인생의 상복이니까요."라는 대답부터, 이룰 수 없는 사랑에서 나오는 고통을 잊기 위해 보드카를 마시는 행동까지. 현실에서 있을 법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마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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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메이어 감독의
<갈매기> 속 마샤, 엘리자베스 모스


연극 <외 갈매기>에서도 먀사의 활약이 돋보였다. 특히 이번 연극에서 추가된 맨 앞과 뒤 장면에서는 마샤의 역할이 중요했다. 연극의 첫 시작에서 마샤는 뜨레쁠레프에게 자신의 사명을 알고 사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얼마나 되겠느냐고 묻는다. 연극이 끝난 뒤, 마샤는 관객들에게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대답을 외친다.

그러나 연극 <외 갈매기>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 역시 이 장면이다. 특히 극이 끝나고 나오는 마샤의 긴 독백은 굳이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체호프는 <갈매기>가 "포르테로 시작해서 피아니시모로" 끝나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갈매기>의 끝은 피아니시모다. 모든 갈등이 겹치고 겹쳐 결국 한 사람이 자살하지만, 그 자살은 일상의 잡다한 일들에 묻힌다.

한 사람의 죽음이 포르티시모(매우 세게)가 아니라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로 끝난다는 점에서 비극성은 역으로 극대화된다. 관객은 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배우가 자신의 감정을 극대화하며 독백을 한다면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여운이 배우의 감정에 의해 차단된다. 배우 자신이 만들어내는 감정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체호프와 다소 맞지 않는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체호프의 <갈매기>는 그의 다른 희곡과 함께 현대 연극 레퍼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다. <갈매기>는 갈등과 사건 중심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 일상 속 한 장면을 무대 위로 올린 것 같은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은 연극을 위한 희곡이다. <갈매기>의 핵심적인 요소는 무대라는 장소에서 배우의 연기와 연출을 통해 완성된다.

산울림 소극장의 연극 <외 갈매기>에서는 체호프 소설 속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배우가 관객에게 감정과 메시지를 호소하는 것이 아닌, 끝까지 관객 각자가 이 작품에서 무언가를 얻어 갈 수 있게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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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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