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영화’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동문학’이라는 말은 한 분야로써 인정되어 널리 쓰이는 말인 데에 비해 ‘아동 영화’는 한 장르로 규정되기는 조금 모호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용한 ‘아동 영화’라는 말은 ‘어렸을 때 봤던 영화’, 혹은 ‘어린이 관객이 많은 영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어렸을 때 영화를 보고 나서 나에게는 ‘어린이스러운’ 감상만이 남아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찰리가 얻게 된 ‘황금 티켓’을 갖고 싶다거나, 온갖 먹음직스러운 간식들로 채워진 공장에 가보고 싶다거나, 호두를 까는 다람쥐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등의 1차원적인 생각들에만 머물러 있었고, 그 결과 영화를 다 본 뒤에어느 것도 남지 않았다. 당연한 얘기다. 본래 어린 아이의 영화 감상이란 단순 명쾌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영화를 잊고 있었다가 나는 우연히 대학생이 되고나서 동아리 사람들과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초콜릿 공장장 윌리 웡카의 초대로 황금 티켓을 얻은 아이들이 공장 체험을 한다‘라는 대략적인 줄거리만 기억하고 있던 나는 영화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영화가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였나?”
내 머릿속에 떠오른 첫 문장이었다.
영화의 대주제
– 물질숭배와 기계주의
동심이 깃든 영화에 '물질'이니 '기계주의'니 하는 용어가 웬 거란 말이냐! 그러나 영화 내내 화면에서 보이는 게 온통 그런 것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아마 이런 사회 비판적인 시각에서 영화를 분석하는 것이 새로운 해석도 아닐 것이다. 성인 때 처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여기 공장에 얽힌 두 남자가 있다. 찰리의 할아버지인 조는 무려 윌리 웡카의 공장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윌리 웡카의 초콜릿을 향한 순수한 탐구심을 존경했고, 그런 사람의 공장에서 일하는 것을 명예롭게 여기며 자신의 일에 긍지를 갖고 있던 사람이었다.

조의 실직으로 시작된 가난은 그대로 아들에게 대물림된다. 찰리의 아버지이자 조의 아들 버켓은 치약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치약 뚜껑을 닫는 작업이 그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 작업’은 곧 기계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공장이 요구하는 ‘효율성’ 기준에서 사람 손보다 정확하고 빠른 기계에게 가볍게 밀려버린 버켓은 그 뒤로 공장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 기계로 인건비를 줄이고 생산력이 증대된 공장은 더 많은 돈을 끌어모으고, 그곳에서 나가떨어진 도시 빈민은 빈곤의 굴레 속에 빠져버리는,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영화가 사회 풍자의 의도를 담고 있다 하여도 그 속에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만 읽어내는 것은 영 흥미롭지 못한 일이다. 하물며 114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아래 오직 하나의 메시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감독은 없을 것이다. 영화라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의도’로 탄생한 것인만큼 그 안에는 수많은, 소위 ‘떡밥’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존재한다.
제목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니만큼 ‘초콜릿’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에서 과연 ‘초콜릿’이 어떤 위상을 지니고 있을지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의 관찰에 의하면, ‘초콜릿’은 일관된 위치를 지키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영화 내에는 ‘초콜릿 긍정파’와 ‘초콜릿 부정파’가 존재했다.

마이클 티비(사진-우)는 초콜릿 공장을 몸소 체험하러 온 아이임에도 불과하고 막상 초콜릿에는 큰 관심이 없다. 마이클은 수학적 재능이 타고난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타고난 재능을 해킹에 악용하는 등 윤리적인 면은 많이 결여되어 있다.
그의 관심은 온통 폭력적인 성향의 게임에 편향되어 있으며, 그것이 그의 성격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이다. 그래서인지 마이클은 찰리를 ‘패배자’로 부르는 등 게임의 룰에 입각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런 마이클의 시각 속에서 세상은 온통 ‘시시한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가득 찬 것으로 정의된다. 위 사진(사진-우)은 마이클이 유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동하면서 공장에 대해 평가하는 장면이다.

“여기 있는 것들은 왜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들 뿐이지?”
“꼭 쓸모가 있어야 캔디는 아니지.
그래서 캔디잖아.”
윌리웡카의 아버지나 마이클 티비와 같이 단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캔디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단 걸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캔디가 ‘쓸모 없는 것’인 것이 맞다. 그러나 '쓸모 없다고 느끼는 것'과 “쓸모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쓸모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엔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존중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초콜릿’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이라도 자신이 그 가치를 이해할 수 없다면 강하게 배척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