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다시 쓸 때까지] 08. 되는 대로 사랑하기

글 입력 2019.07.13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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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다시 쓸 때까지]

08. 되는 대로 사랑하기

글. 김해서



‘이러나저러나 사랑이 많은 것은 아름답지만 불쾌한 일입니다.’

최근,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는 저런 문장을 적었다. ‘불리한’ 혹은 ‘불편한’이라 쓴다는 것을 잘못 적은 게 아니다. 사랑은 내게 아름답고도 ‘불쾌’한 무언가가 맞다. 자꾸 실수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고 관계에 과한 의미 부여를 하며 애쓰게 된다. 그뿐인 줄 아는가? 사랑은 사소한 일로도 내게 깊게 속죄하도록 종용하고, 하잘것없는 말 한마디에 가슴이 사무쳐 몇 날 며칠을 그저 앓도록 한다. 이 횡포, 거센 마음의 소용돌이가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찌 그저 반가울 수 있겠나.

너무나도 소중한 ‘사랑’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마음은 땀으로 가득 찬 ‘딱 맞는 운동화’를 신었을 때의 갑갑함과 비슷하다. 문제는, 그 ‘딱 맞음’에 있다. 하필 나는 이제 ‘그 딱 맞는 신발’이 아니면 안 되는 몸인 것이다.

잘 맞지 않은 신발을 신고 하루 온종일 생고생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너무 헐렁해 발가락 끝까지 엄청난 힘을 주고 다녀야 하거나, 발목이 사정없이 꺾이거나, 신발 속에서 물집이 터져 극악의 쓰라림을 맛봐야 하거나. 연고를 바르며 비참한 심정으로 망가진 발을 노려봐도 다른 수가 없다. 이제부턴 딴 생각 말고 제일 편한 신발만 신겠노라 마음을 고쳐먹곤 한다. 결국 내일을 위해 꺼내 놓는 운동화. 그런 게 내겐 사랑이다. 이것이 아니면 도저히 안 되는 처지가 좀 서글퍼도, 결국 날 안심하게 하는 유일한 것.

언젠가 애인이 뭔가를 잘못 먹고 꽤나 심하게 체한 적 있다. 헐레벌떡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가 소화제를 사 먹이고, 열심히 등을 두드려줬다. 그날, 곤히 잠든 그의 얼굴을 보며 나는 짐짓 심각해졌다. 짜증 날 정도로 걱정이 된 게 시발점이었다. 누군가의 탈 난 위장을 걱정하며 어서 낫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를 위한 것이 아닌 어쩌면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번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왜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까. 그 말이 의미가 있긴 한 걸까.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할 것 같던 지고지순한 사랑이 초라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 구원이나 다름없던 사랑이 불안으로 둔갑하는 건 시간문제다.

불안은 해맑게 밀려들어 억수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이내, 그 무시무시한 강을 위태로운 나무 판자들을 다리 삼아 건너야한다고, 그래야만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통보한다. 잔뜩 주눅이 든 나. 사랑이 비웃는다. ‘그를 진정 사랑한다면, 두려워 말고 의심도 품지 말고 냉큼 건너야지! 어서!’ 꾸지람을 받는 것 마냥 철렁 내려앉는 가슴.

잠에서 깨 다소 나아진 표정으로 앉아있는 연인을 보자 심통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심정인 지도 모르고 까무룩 잠이나 자다니. 심지어(?) 푹 자고 훨씬 개운해 보이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연인이 입을 뗀다.

‘아까보다는 좀 낫다. 진짜 고마워. 아파서 미안해.’

‘……’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복잡한 마음을 감추며 어물쩍 ‘다행이네’ 대답했다. 그러자 어이없게도, 순식간에 마음이 계란 노른자 마냥 톡 터져 풀어진다. 놀랐다. 잔인할 만큼 비아냥거리는 사랑이더니, 어쨌거나 그것도 사랑이라고, 연인의 몇 마디 말이 통한 것인가. 모르는 새, 나는 불안의 강을 건너 뭍에 안전하게 도달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왔던 그대로 다시 편히 걸어가라고 한다. 갑자기 가벼워진 마음이 얼떨떨해서 언짢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활짝 가슴을 펴고 나는 새초롬하게 길을 이어간다. 어느새 인터넷 검색 창에 ‘소화에 도움이 되는 자세’ 따위를 이리저리 검색해 보고 있는 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 때면, 튼튼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것만 같이 든든하다. 선녀의 옷도 부럽지 않다. 몸을 지탱하는 뼈에서부터 밝은 빛이 나 그 뼈를 덮고 있는 근육들까지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굳이 알고 싶어져서 불행해질 때, (상대방의 표정과 말투, 행동 혹은 보이지 않는 너머의 행위들까지 샅샅이 살피는 동안) 나는 근사한 옷을 뺏기고 알몸이 되고 만다.

이미 사랑하고 있는 마음에 제동을 걸고 ‘뭔가 더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어진다는 것’은 호기심인 동시에 의구심이기도 하다. 절대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기 때문에 상대로부터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어내야만 끝이 나는 것이다. 더 확실해지고 싶은 욕망. 진심이기 때문에 버거운 욕망.

그래서 이제, 나는 불안해질 때마다 ‘오늘 또 사랑하겠다’고 마음먹기로 했다. 그것만큼 확실한 방안이 없다. 사랑이 부족하면 더 사랑하면 되고, 사랑이 너무 과해 문제라면 적절히 나를 지키며 애정을 나눴던 연애 초기처럼 새롭게 마인드를 세팅하면 된다. 불쑥 흐르다 멎는 코피처럼 괜찮아질 것이다. 복잡한 고민에 비해 늘 단순한 결론. 하지만 어쩐다. 이게 나만의 신발이다. 사랑 앞에서 나는,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그 신발’을 신겠다며 떼를 쓰는 아이다. 바닷물에든 대리석 바닥 위로든 반드시 ‘그 운동화’를 신고 들어가야만 맘 편히 노는 아이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애초에 이해받기 위해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게 자연스러울 것 같으니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것 밖에는. 그러니 가능할 때까지 사랑하면 된다. 되는 대로.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소소한 걸로 툭 넘어져 데굴데굴 굴렀다가 벌떡 떨쳐내며 말이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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