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앎의 힘은 무지의 약을 능가하는가

글 입력 2024.03.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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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질서라는 미명


 

인간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개념을 만들고, 이름을 붙이고, 산발적인 사건들을 인과라는 이름으로 엮어온 모든 역사가 이를 방증한다. 무언가는 반드시 무언가를 원인으로 발생하며, 무언가는 반드시 무언가의 결과라는 시간선의 법칙은 인간이 불안에 대처해 온 유구한 방식이다. 그것이 주는 통제감만큼이나 불안에 잘 듣는 약도 없는 것이다.


이것이 구체적인 형태로 굳은 것이 ‘미신(迷信)’이다. 미신은 물질적 증거가 없는 비합리적인 믿음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대개 우연에 의해 발생한, 혹은 발생할 일들 사이에 어떤 의도적인 행위를 끼워 넣어 인과를 만드는 형식을 취한다. 징크스를 예로 들어보자. 특정 양말을 신어야만 경기가 잘 풀린다는 운동선수나 특정 연필을 사용해야 시험 결과가 좋다는 학생의 사례는 낯설지만은 않다. 우연을 가상의 필연으로 만든 우리는 스스로 통제를 행사했다고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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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공유하는 대표적인 미신, 빨간색으로 이름을 적으면 안 된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 가능하다. 이는 꽤 철저히 지켜지는 미신 중 하나이다. 안 그래도 불안한 세상에 굳이 사서 불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또다시 미신은 인간이 불안에 대응하는 유구한 방식이라는 설명이 성립한다. 애인의 변심은 신발 선물 때문이고, 아이의 요란한 행동은 귀신 씌였기 때문이고, 갑작스러운 죽음은 까마귀가 울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여전히 미신은 만연하지만, 조금 다른 방식의 질서 부여하기가 유행하는 듯싶다. 애인의 변심은 상이한 성격 유형 때문이고, 아이의 요란한 행동은 ADHD 때문이고, 갑작스러운 죽음은 우울증 때문이다. 미신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한 근거를 지닌 이들은 오늘날 우리가 불안을 다루는 방식 중 하나인듯 싶다. 혹은 그렇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불안이 정말 잘 다뤄지고 있는지, 애초에 이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불안을 주입한 주체는 누구일지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이다. 언젠가부터 젊은 층을 필두로 심리학 붐이 일기 시작했다. 나와 타인을 이해하게 하는 이들은 과학적 근거와 설득력을 갖췄다는 점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자랑한다. 심리 검사와 해석을 즐기며 혼돈 그 자체인 나와 타인을 질서 지으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왜 많은 이들이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지 톺아볼 시점이다. 해당 글은 사회 전반이 정신의학·심리학적 개념과 관련해 강조하고 있는 불안을 밝히고, 동시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1) ‘너는 너를 모른다’는 불안


 

한동안 ‘Love yourself’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유행했다. 언제나 타인을 위하라고만 했지, 자신을 사랑하자는 풍토가 만연한 적은 드물어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것은 아주 긍정적인 신호이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는 여타 심리적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또한 타인을 제대로 사랑하고, 사랑받을 방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나를 사랑하는 것의 조건으로 제시된 것 중 하나가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잘 모르니까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자기애 유행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혹은 과정일지도 모르겠지만― 미디어에서 ‘너는 너를 모른다’는 불안을 필요 이상으로 주입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한 사실이다. 그리고 심리학은 그런 나에 대해 놀라울 만큼 명쾌한 정의를 내려주기도 한다. 하지만 넘쳐나는 심리·정신의학 관련 프로그램, 서점에 널린 너는 너만 챙기고 사랑하라는 내용의 수필들, SNS 피드를 수놓은 출처를 알 수 없는 각종 테스트가 나에 대한 무지를 해소해주는가 하면, 쉽게 긍정하기 어렵다. 프로그램들은 나의 비정상성을 강조하고, 서점의 책들은 내가 나를 위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력감을 키우며, 각양각색의 테스트 결과들은 갈 길을 잃게 한다.


이들이 던지는 ‘어때? 보니까 너를 제일 모르는 게 너였지?’라는 질문은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한다. 내가 지닌 모든 문제가 나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시작된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 같은 불안은 누가 해소해 줄 수 있을까. 어떤 문제의 해결책은 오히려 자의식에서 벗어나 시야를 넓힐 때 보이는 법이다. 자잘한 심리학적 지식이 쌓여갈수록 아주 작았던 구멍을 구태여 후벼 파서 자신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큰 구멍으로 만드는 경우가 잦아진다.


오랜 부부는 사랑이 아닌 정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반짝이는 사랑의 필수 조건 중 하나인 무지가 사라졌기 때문일 테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때로 외면할 뿐이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꿰고 있다. 사랑하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기에 요지는 수용에 있다. 자기애는 결국 내가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일단 수용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다. 온갖 테스트 결과들이 일치하지 않음에 의심하고, 내 특성이 부정적으로만 정의되는 특정 심리학 개념에 매몰되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2) ‘너는 너를/그를 안다’는 불안


 

처음 만난 사람에게 MBTI를 묻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요즘은 애착유형까지 묻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나도 같은 질문을 받고 해당 검사의 존재를 알았는데, 결과로 혼돈형이 나왔다. 이는 회피형과 불안형이 합쳐진 유형으로, 부족한 자아를 바탕으로 대인관계에서 극심한 정서 불안에 시달린다고 한다. 다소 의아해졌다. 나는 외로움에 강한 편이며 대부분의 인간관계도 안정기에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명을 읽다 보니 기억 저편의 작은 사건들이 연이어 떠올라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했다. 결국 혼돈형 애착유형의 정의를 어느 정도 수용하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작하는 나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내가 혼돈형인 걸 안다, 즉 나를 안다는 생각이 내가 언제 혼돈형의 행동값을 낼지 모른다는 불안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앞선 논제와 반대로 앎에 대한 불안에 가깝다. 정확히 말하면 어설픈 앎에 대한 불안이다. 몰랐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별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 문제시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또 다른 양상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도구의 사용법을 하나 알게 되면 그것만으로 필요 이상의 많은 문제를 해결하려 들기도 한다. 최근 인간관계의 실패를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하기보다 성격유형 등의 차이로 일단락하는 경우가 많은 듯싶다. 그렇게 따지자면 일명 상성, 궁합이 좋다고 일컬어지는 이들과만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특정 지식을 기반으로 나를 알고 타인을 안다고 정의했을 때, 오히려 그 앎 자체가 여러 가능성을 한계 짓는다.


이와 관련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혹은 오프라인 모임 등에서 다소 의아한 사태를 목격하곤 한다. 정신적 피해를 본 이들만 난무하고 그들에게 피해를 가한 이들은 보이지 않는 상황으로 일축할 수 있다. 그들의 피해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고, 굳이 전자의 일을 꺼내 말하는 이들은 많지 않으니까. 그러나 실제로는 피해 입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앎, 자신이 알고 익힌 도구 하나만으로 특정 상황을 해석한 결과가 아닐지 하는 의심은 피할 수 없는 것 같다.


타인을 알고자 하는 시도는 ―상대가 극심히 거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긍정한다. 서로의 앎을 공유하며 맞춰가는 태도 역시 훌륭하다. 그러나 요즘 많은 이들이 심리학에 기대하는 바는 앎이 아닌 확신인 듯 싶다. 그러나 그 어떤 학문조차 불변의 확신을 안겨주긴 어렵다. 막말로 인간 나고 심리학 생겼지, 심리학 생기고 그 케이스에 끼워 넣을 인간이 난 게 아니니 말이다. 이렇게 알아도 불안하고 모르면 더 불안한 게 우리의 현주소일지 모른다.


 

 

(3) 불안에 대처하는 방식: 아는 게 힘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불안에 어떻게 대처하도록 유도할까. 자본주의 사회답게 유행은 상품의 형태로 팔려나간다. 최근 학교에서 제공하는 적성 검사를 치르고 싶어 예약 페이지를 접속한 적 있다. 그러나 몇 번을 접속해도 좀처럼 예약 자리가 나질 않아 포기해야 했다. 이것은 비단 학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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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로 상담소를 찾는 젊은이들의 수가 급증했다고 한다. 회당 100만원에 가까운 상담료를 감수하고도 특정 불안의 해소를 기대하는 것이다. 2022년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해당 연도에만 400여개가 넘는 민간 자격증이 등록되었다고 한다. 물론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우도 있을 테다. 심지어 귀 모양이나 손금 등을 분석하는 상담소도 성황리에 등록 및 운영되었다는 정보를 접했다. 이처럼 시장이 급격히 커진 만큼 전문성이 의심되는 경우도 숱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가며 숨구멍을 찾으려는 간절한 시도가 계속된다.

 

많은 상품은 외치고 있다. 당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불안정하고 비정상적인지를 인지하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상품을 먹고 입고 이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를 ‘공포 마케팅’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앎을 강요하고 무지를 비판하는 목소리만큼이나 공포를 조장하는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품들은 소위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소비자를 설득한다. 이를 쉽게 끊을 수 없다는 것도 난점이다. 이미 알아버린 개념들은, 과학이라는 단단한 근거로 박혀버린 타인과 나에 대한 인식은 그 소비를 중단할 것을 추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보기 좋은 포장에 속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는 많지 않다. 가끔은 그 모든 것을 나의 감각으로, 나만의 언어로 구체화할 것을 추천하는 이도 드물다. 잠시 논리 부여와 분석에서 멀어져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마치며: 우리는 정말 해방되었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스케줄러를 확인하는 나는 계획의 수립과 달성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A는 이런 내가 강박증의 소유자이며, 상담을 통해 보다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조언했다. 나는 물을 무서워하며 수영을 못한다. B의 말에 따르면 이는 PTSD 양상으로, 어릴 때 익사할 뻔한 적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스스로 감이 좋은 편이라는 믿음으로 종종 타인의 마음을 재단할 때가 있다. 이로 인해 나와 말싸움하던 C는 나를 편집증 환자라고 칭했다. 밝고 쾌활한 D는 언제나 나를 걱정한다. 우울증을 창작의 동력으로 삼으면 안 된다고 조언한다. 나의 모든 특성과 행동에는 지극히 과학적인 근거가 붙는다. 

 

나 역시 이 과오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군가를, 특히 처음 만나는 사람을 어설픈 심리학적 지식이라는 창에 구겨 넣곤 한다. 미지의 것들이 조금은 이해 가능해지는 것 같은 기분을 즐긴다. 심리학이라는 허울 좋은 정의는 이것들이 설득력 있음은 물론, 심지어 정당하다고 느끼게 한다.

 

심리학 붐을 낳은 심리는 잘 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정신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고, 무지의 약이 필요 없어질 만큼 앎의 힘을 키우는 쪽을 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시도가 반갑다. 그들이 보편적인 지식이 된 것을 긍정하기도 한다. 심리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이들 모두를 매도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실제로 현대 사회에는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으며, 주변에 수많은 이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모르는 것보다는 언제나 나를 설명할 언어가, 그것도 전문적인 근거가 뒷받침된 언어가 있는 쪽이 낫다. 그러나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 우리는 정말 나아지고 있는가? 인간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고 있는가? 그로 인해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었는가?

 

앞서 소개한 경험에 의하면 나는 시간 강박증, 편집증, 우울증의 소유자로 종종 PTSD에 시달리기까지 하는 환자이다. 그런데도 그 사실에 무지함으로써 자기파괴까지 일삼는 사람이다. ‘과학적’으로 문제투성이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마치 모두가 젊어지는 약을 먹고 있는데 나 혼자 노화에 몸을 맡기는 것 같은 기분으로. 비정상의 나를 고치기 위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시달린다. 그래서 자꾸만 상담 서비스를 찾아보고, 비싼 심리 검사를 신청할지 고민하고, 날 정상인처럼 보이게 할 무언가를 찾아 몸에 둘러야 할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린다.


반대의 경우도 성립할 수 있다. 최근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그렇다고 이름 붙인 결과로 그런 사람이 너무나 많아져 버렸음을 느낀다. 즉, ‘그런 사람’은 디폴트가 된다. 우울증, 강박증, ADHD 등의 병명은 애쓰며 제대로 살고 있는 사회 구성원이라면 응당 가슴에 달아본 바 있는 명찰처럼 느껴진다. 아픔을 호소하면 ‘다들 그렇게 힘들게 살아’라는 조언이 숱하게 따라붙는 건 그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정말 위기를 앞둔 이들이 제때 의학적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상적인 해결 방법은 제대로 아는 것, 그리고 때때로 심리학을 의심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심리학적 개념을 이용하고 적용하는 자기 능력을 의심해 보는 것에 있다. 평소 자주 쓰던 단어도 반복해서 말하다 보면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 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을 현미경으로 대폭 확대하면 낯선 외계 생명체처럼 보인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불가해한 사람이,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가끔은 앎의 추구를, 무리한 질서 짓기와 유형화, 분류를 잠시 멈춰도 좋다고 스스로 일러줄 때이다.

 

 

[오송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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